한국성이 불거지는 조건 우선, 건축에서 한국성이 늘 문제가 되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을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성이란 이슈가 한국 사회 전반의 문제로 등장했던 것은 특정한 시대적 조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적인 예로 김수근 선생과 강병기 선생 등 일본 동경대학에서 유학하고 있던 대학원생들이 1959년에 국회의사당 현상설계에 참여했는데요. 현상설계 지침을 확인해보진 않았습니다만, 당선안으로 미루어보건대 우리나라 최초의 국회의사당 현상설계임에도 ‘한국성을 어떻게 구현하라’든가 ‘전통을 어떻게 표현하라’는 요구 조건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승만 대통령의 호를 딴 우남회관이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자리에 지어집니다. 이 역시 굉장히 기념비적인 건물이고, 타워 부분이 10층 정도 높이로 상당히 높은 건물이었죠. 광화문 앞 육조거리라는 장소성에도 불구하고 한국성을 어떻게 구현해내라는 이슈는 전혀 불거지지 않았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이 해방된 후, 기념비적 건축물은 규모가 크든 작든 하나둘 건립되었지만, 한국성이 문제 되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1940~50년대는 한국이 미국 주도 아래 재편되는 전후 국제 사회 속에 어떻게 자리를 잡을 수 있느냐가 더 큰 문제였습니다. 한국 국가 예산의 90% 이상이 미국의 국가 원조로 이루어지던 시절에는 한국성이란 문제가 크게 불거지지 않았다는 것이죠.
심사위원 박정현 ‘한국성’은 한국의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1960년 이래 건축계에서 완전히 사라진 적 없는 문제적 개념입니다. 일본과 다른 정체성에 대해 묻는 부담감은 사라졌지만,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장에서 한국 건축의 문화적 배경과 내러티브를 설정해야 하는 지금도 한국성은 여전히 논쟁적 문제이자 물음입니다. 이 어려운 질문에 답해준 모든 참여자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주제설명회 개요 • 일정: 2021년 11월 20일 (토) 오후 5:00~7:00, 정림건축문화재단 라운지(유튜브 생중계)• 심사위원 : 김효영(김효영건축 대표), 서재원(에이오에이 아키텍츠 대표), 박정현(도서출판 마티 편집장)
2022년 정림학생건축상은 ‘지금, 한국성’을 묻습니다. 케케묵은 것처럼 보이는 ‘한국성’을 ‘지금’과 만나게 하기 위해서는 한국 현대 건축의 흐름을 되짚어 보아야 합니다. 지난 세기 한국성은 한국 건축의 성배였습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고 국민국가를 형성해나가던 1960년대 이래, 정부청사, 미술관과 박물관, 극장과 공연장, 체육관과 박람회장 등 국가를 상징하는 모든 건축물은 한국성을 찾아 나서야 했습니다. 식민지배와 전쟁 이후, 타자와 다른(무엇보다 일본과 다른) 한국이라는 고유한 정체성을 획득하는 일은 시급한 과제였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상징하는 건축물이 이 과제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면서 학생들에게 명시적으로나 암시적으로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모든 형태, 모든 아이디어가 반드시 건축적으로 의미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신기한 것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학생들 중 몇몇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게, 자신에게 익숙한 어떤 대상(가령 꽃과 같은)을 그대로 건축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다. 시간을 초월해 이러한 모습이 반복되는 것은 아마도 인간 본성에 내재한 일반 조형의 의지와 건축적 표현 사이의 구분을 배우지 못 했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 건축을 배우는 학생에게 그 차이를 인식시키고 건축의 기초와 방향을 짚어주는 것이 선생의 역할이다. 그렇다면 일반 조형과 건축을 가르는 차이는 무엇일까. 이 쉽지만 어려운 질문은 건축가로서 나 자신에게도 항상 던지는 질문이다. 무엇이 건축을 건축으로 만드는가. 무엇이 건축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인가.
요앞건축은 건축의 이상과 실제 사이 접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고민한다. 일상에서 발견한 장면을 건축에 투영하기도 하고, 건축적 상상을 다른 영역으로 확장하기도 한다. 작업 과정에서의 자유로운 상상은 그대로 실제가 되기도 하고, 건축의 한계 덕분에 아이러니하게 새로운 단락에 이르기도 한다. 경계에서의 실험과 새로운 시도는 통제된 결과 너머의 지점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고정되지 않은 열린 결말의 시나리오는 작업의 즐거움이다.
건축 큐레이팅이란 정다영 CAW 1기 프로그램이 오늘 ‘참고문헌 읽기’ 발표와 함께 끝났다. 지금 종합토론 시간은 전체 발표자분들을 모두 모시고 이번 워크숍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각자 ‘건축 큐레이팅’ 을 무엇으로 생각하시는지, 그리고 1기 워크숍이 끝난 지금 다시 한번 나누고 싶은 이슈가 있다면 무엇인지 듣고 싶다.
건축의 큐레이팅은 미술과 다르다. 건축이 온전히 예술로 수행되거나 연구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무엇이 다르고,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모아본 적이 없다. 건축 큐레이팅에 대해 건축계가 공유할 만한 공동의 연속성, 규율성, 전문성이 쌓이지 못한 채로 소모되고 휘발되기를 반복하고 있다. 건축의 기획(큐레이팅)을 실무로 삼고 씨름하는 사람이 부족한 상황 속에서 쏟아지는 수요에 휩쓸려 온 것이 아닌가 진단한다. 미술이 아닌 건축에서 ‘큐레이팅’ 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 행위일까. 건축에서 큐레이팅은 단지 전시를 만들고 올리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획’ 이라는 큰 범주 안에서 건축 큐레이팅은 건물을 짓는 일을 넘어선 건축의 다양한 실천적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작업이다. 건축계 내부에서 큐레이팅이라는 활동은 한국에서는 이제 막 진지한 논의를 얻는 시점에 놓여 있다. 이번 건축큐레이팅워크숍(이하 CAW)은 비평의 무대이자 작가와 대중을 매개하는 장소로서 전시, 자료를 발굴하고 그것을 축적하는 행위로서 아카이빙, 건축을 둘러싼 다양한 시각 매체를 읽고 그것을 배치하는 에디토리얼까지 큐레이팅을 둘러싼 내외부의 이야기들을 펼쳐보는 시간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논의들은 2010년 이후 한국 건축의 시간과 현장들을 엮는 키워드가 될 수 있다. 건축 큐레이팅은 앞으로 한국 건축을 둘러싼 여러 난제를 검토하고 도전해 볼 수 있는 영역이 될 것이다.
전봉희는 2013년부터 발행되기 시작한 목천건축아카이브의 구술집 시리즈 서문을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전 세대의 건축가를 갖게 되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대단히 압축적인 표현이다. 30대에서 80대까지 세대별 건축가가 모두 있다는 이 간단한 사실에서 많은 것을 추출해낼 수 있다. 현대 건축 초기의 주요 인물 가운데 박길룡(1898~1943 )은 45세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박동진(1899~1980 ), 이천승(1910~1992 ), 장기인(1916~2006 ) 등은 모두 80세 이상 생존했다. 그러나 말년의 그들이 건축가로서 당대 담론에 끼친 영향은 거의 없었다. 박동진은 1950년대에, 이천승은 1960년대 이후 담론의 장에서 목소리를 확보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들은 한 세대로 불리기 힘들 만큼 대단히 예외적인 소수였다. 공교롭게도 나상진, 김중업, 김수근은 비교적 이른 나이인 50, 66, 55세에 타계했다. 그동안 한국에는 나이 든 건축가가 없었다. 2010년대 들어서 70~80대가 된 일군의 1930년대생 건축가들이 처음이다. 이들은 해방 후 한국의 대학에서 현대 건축을 공부하고 1960년대 이후 독립해 자신의 사무실을 일구었으며, 설계 현장에서는 멀어졌더라도 현재까지 다양한 활동을 해오고 있는 세대다. 국가의 경제 성장과 개인의 생애 주기가 일치한 세대이기도 하다. (이전의 양식 건축 등과 구분되는 ) ‘현대 건축’ , (몇몇 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 불리는 ) ‘세대’ 등의 의미를 따진다면 이들이 어쩌면 온전한 한국 현대 건축 1세대다. 드디어 한국에서 현대 건축이 늙기 시작한 것이다. 이 늙음은 정확히 젊음과 공명한다. 2010년대 젊은 건축가 현상은 이전과 비교하면 무척 낯선 것이다. 해방 이후 한국 건축사는 젊은 건축가들의 연대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국회의사당 현상설계에 당선되었을 때 김수근은 20대 후반이었고,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에서 초대형 국가 프로젝트를 도맡아 진행했을 때도 아직 30대였다. 김중업은 42세에 주한 프랑스대사관을 설계했다. 이희태가 국립극장 설계를 맡았을 때도 45세에 불과했다. 김기웅이 독립기념관, 김석철이 예술의전당 현상설계에서 당선되었을 때도 채 40이 되지 않았다.1 1980년대 말 새로운 기치를 내건 건축가 모임, 4.3그룹은 이름에서도 드러나듯 30~40대 건축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 모두 지금이라면 젊은건축가상 응모 대상자들이다. 그러나 1960년대에도 1990년대에도 저들을 두고 젊은 건축가라고 부르는 일은 드물었다. 모두가 젊을 때 젊음은 젊음으로 호출되지 않았다. 젊음은 나이 듦을 배경으로 할 때만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현대 건축이 나이 든 2010년대 그리 젊지 않은 40대 건축가는 젊음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1 ‘아방가르드’(Avant-garde)는 20세기 예술사에서 가장 남용된 단어 가운데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아방가르드’를 설정해보려는 이 글은, 결국 아방가르드에 대한 최소한의 논의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현대건축을 이해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친 베니스의 역사학자 만프레도 타푸리(Manfredo Tafuri)는 아방가르드의 역할을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가 야기하는 충격을 피할 수 없는 존재 조건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아방가르드는 근대가 불러온 전대미문의 충격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예방접종 같은 것이었다.
‘어느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에서 살고 있나요?’라는 물음에 돌아오는 답은, 모르거나 아파트 건설사 이름이 대부분이다. 문득 이런 현실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 살고, 일하는 공간을 계획한 건축가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현실 말이다. 보편적인건축사사무소는 건축과 공간 전문가로서 사람들에게 친밀하게 다가가기 위해 기억하고 부르기 쉬운 이름으로 2013년 문을 열었다. 현재는 아내인 황은 소장이 합류해 함께 운영하고 있다.
건축사사무소 몰드프로젝트1는 보수적이고 경직된 기존 설계사무소의 운영방식과 다르게 프로젝트의 성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는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실험 중이다. 우리는 외피를 통한 추상적인 표현보다는 장소에서 유래되고 오래도록 감응을 주는 건축물을 추구한다. 도시의 역사, 문화, 예술에 관심을 갖고 고민함으로써 건축적 해법과 장치를 찾으려 한다. 우리는 대지에 조심스럽게 개입하여 겸손한 자세로 일상적인 건축을 추구하며, 섬세한 과정을 통해 건축물의 특성과 분위기를 만드는 것에 큰 관심이 있다.
AEA(아에아건축)는 프랑스어 Atelier Espa:ce Architectes (아틀리에 에스빠스 아키텍트)의 머리글자 조합이다. ‘Espace’는 공간 또는 장소라는 뜻이며 이것을 탐구하는 건축가 그룹이라는 뜻으로 지었다. 우리 두 사람은 배병길도시건축연구소에서 함께 실무 경험을 쌓았고, 파리 라빌레트 건축학교에서 석사 졸업 후 파리에서 실무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첫 프로젝트였던 경남 사천시 상가주택 H1115-7을 계기로 귀국, 2016년 경남 진주라는 지방도시에 정식으로 사무소를 열었다.
이야기를 만드는 것처럼 산보를 좋아한다. 걷는 것을 통해서 마을을 느낀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건축을 시작한다. 책상 위에 모형을 두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도시 전체를 한눈에 바라보는 시점이 아닌, 그 안에서 걸으며 마을을 알아가는 시점에서부터 건축을 생각한다.
2012년. 아름지기에서 주최하는 헤리티지 투모로우 프로젝트 공모전에 참여했다. 이도은과 임현진이 함께한 첫 번째 작업이었고, 우리는 ‘겹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제안했다.
살아 있는 것 건축은 이런저런 이유로 자유롭지 못하다. 건축주의 목적, 땅의 여건, 각종 법규와 제약, 무엇보다 비용과 자본의 논리, 건축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항상 이러한 조건들에 종속적이어서 각각의 상황에 적당히 대처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도시를 빼곡히 메운 건물들이 용적률 게임을 하며 그 틈 안에서 저마다의 해법을 찾아내 비집고 서 있는 모습이 우리 시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도 같다. 그러나 우리는 건축이 비바람을 막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거기서 더 나아갈 때 더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안다.
인터뷰 김창일 연세대학교 건설공학과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ROTC 1기 공병 장교로 군 복무 시에도 건축 실무를 익혔다. 한국은행을 거쳐 1967년부터 정림건축에서 48년간 재직하며 사장을 역임했다.
인터뷰 권도웅 한양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1967년 정림건축에 입사해 44년간 근무하면서 1995-1998년 사장을 쳐서 2012년까지 정림건축 상임고문과 기술연구소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서울 YWCA 고문과 한국 HABITAT 고문이다.
이 글은 김정철의 일대기도 정림건축의 첫 20년에 관한 밀도 있는 비평도 아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겪고 60년대에 창업해 국내에서 가장 큰 설계사무소를 일군 한 인물의 전기를 쓰기 위해서는 개인사에 대한 내밀하고 세세한 정보가 무엇보다 필수적이다. 그러나 20세기 한국의 역사는 각종 문서와 자료를 충실히 챙기고 보존할 여유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다. 김정철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헤쳐온 시대를 증언해줄 수 있는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생전에 남긴 미공개 회고록과 몇 장의 사진이 전부다. 창업자의 정보가 이렇게 소실되어 가는 동안 정림건축 초기의 많은 자료 역시 망각의 늪에 빠졌다. 다행히 주요 작업에 관한 슬라이드 필름과 마이크로필름이 남아 있었지만, 대형 설계사무소가 어떻게 운영되고 몸집을 키워냈는지 확인하기에는 부족했다. 제출과 함께 사라진 현상설계안뿐만 아니라 각종 상세도면, 직원 명부와 조직도 같은 회사가 생산한 문서를 충분히 살펴볼 수는 없었다. 이 부재는 한국 현대 건축사 서술의 조건과 같다. 대단히 파편적이고 불연속적인 단서와 정보들의 불완전한 조합이다. 이 글도 마찬가지다. 김정철 개인사의 주요 지점을 한국 현대사의 문맥 속에서, 초기 정림건축의 주요 분기점을 한국 현대 건축사의 흐름 속에서 읽어보고자 했다. 이 짧은 에세이는 직소퍼즐을 맞출 때 제일 처음 놓는 몇 개의 조각일 뿐이다.
세대론은 대개 젊은 세대에 관한 이야기다. 국내에서는 특히 20대 대학생의 정치적 주체화의 과정과 연관되어 있다. 공교롭게도 60년대 이후 한국 사회는 대략 10년을 주기로 정치적 격변을 겪었다. 60년대 대학생(40년대 생)은 4·19세대, 70년대 대학생(50년대 생)은 유신 세대, 80년대 대학생(60년대 생)은 민주화 운동권 세대로 엮인다. 10여년 전 386세대가 호출될 때 세대론의 정확한 위상이 드러났다. 당시 30~40대를 현재의 시점이 아니라 그들이 대학생이었던 시절에 겪었던 경험의 공유에 기대어 묶어냈던 것이다. 정치적 격변은 사라졌지만 20대 대학생을 세대론으로 묶어 호명하는 것은 90년대도 마찬가지였다. 건담의 ‘뉴타입’이나 에반겔리온의 ‘신인류’처럼 90년대 X세대는 새로운 시대, 세대 단절의 표상이었다. 최루탄 냄새가 사라진 학교를 다녔던 첫 세대인 90년대 대학생(70년대 생)은 정치적 주체가 아닌 대중 문화의 주체로 거듭났다. <건축학개론>이나 <응답하라> 시리즈 같은 영화나 드라마 등이 호출하는 90년대는 모든 것이 디지털과 자본에 의해 재편되기 전이자, 기획사와 스타시스템 없이 음반이 백만 장이나 팔리는 ‘아름다운 시대belle époque’로 기억된다. 정치가 사라진 후 대학생은 그냥 대학생이었을 뿐이었고 세대론 역시 사라진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