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행복, 평화와 안전, 헌법과 질서, 민주주의. 2024년 12월 우리 몸과 마음에 매일매일 새겨넣은 한마디 한마디다. 국회의사당, 국민의힘 당사, 헌법재판소를 에워싸고 밤낮 울려 퍼진 시민들의 맹렬한 외침은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했던 것들이 어쩌면 그렇게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그저 공기처럼 주어진 것이 아니라 힘겹게 쟁취해낸 것이었다는 각성과 깨달음이 우리로 하여금 뉴스창을 수시로 새로고침하게 하고 종일의 피곤을 짊어지고 광장으로 나가게 만들었다.
이 책은 정림건축문화재단 포럼 시리즈 <당선작들, 안녕하십니까>의 현장 이야기를 글로 옮겨 기록한 것입니다. <당선작들, 안녕하십니까>는 공공건축 당선작의 핵심 디자인, 실현 과정, 운영 상태를 모니터링함으로써 건축의 공공성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사회에 건강하게 자리잡는 데 도움이 되고자 마련되었습니다. 당선과 완공이라는 단편적 관심이 아니라, 그 앞과 뒤, 과정 전반에 걸친 의사결정과 협의 과정을 짚어봄으로써 당선작이 지나는 복잡한 경로를 살폈습니다.
사회 구성원이라는 감각 김현종(ATELIER KHJ) 건축가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사회적 역할을 하고 있다. 건축가 또한 사회적으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지만, 건축가에게 더 많은 사회적 역할과 태도를 요구하는 것에는 공감하지 않는다. ‘건축가로서 다른 분야의 사람들보다 사회적 역할을 하고 있는가?’라고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면 아닌 것 같다. 공공 프로젝트로 사회가 기대하는 건축가로서의 역할을 해낼 수도 있겠지만, 공공 프로젝트는 현상설계공모를 통해 당선되어야만 작업할 수 있기에 그 기회가 한정적이다. 나와 내가 이끄는 ATELIER KHJ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도시 전반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문화적 경험을 우리의 시각으로 전달하려고 한다. 그 경험의 형태는 건축이나 공간, 가구, 전시 등이 될 것이고, 사람들에게 우리의 시각을 전달하는 것으로 사회적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지 생각한다.
설계 공모 과열 전연재(마니) 경기침체로 민간 프로젝트가 줄다 보니 설계 공모 시장이 과열되고 있다. 최근 노원구 자전거센터 공모에 등록한 팀이 400팀이 넘었는데, 실제로 출품한 팀도 60여 팀에 달했다. 설계 공모 시장이 과열되면, 이것이 공정하게 치러진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생긴다. 60팀이 한 공모에 도전한다고 할 때, 각 팀은 최소 1천만 원 이상의 비용을 치르게 된다. 당선 팀 이외 나머지 59개의 사무소가 수천만 원의 손실을 보는 것이다. 사회적 비용이 크고, 이는 결국 열악한 근무 환경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걱정스럽다.
일상건축사사무소는건축이 어렵지 않기를 바랍니다.건축의 어려운 담론을 떠나 개개인의 일상을 공유하고 그 일상을 건축에 담아내고자 합니다.
독립부터 현재 _ 작가 아틀리에, 중규모 외국계 사무실, 대형 종합건축사무소를 두루 거치고 독립했다. 내 작업을 하겠다는 욕망보다는 자신의 호흡으로 삶을 꾸려가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미끄러지는 공공성 공공건축과 공공성은 비슷하지만, 별개의 문제다. 공공건축 시스템 내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면 공공의 돈으로 공공을 위한 프로젝트를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누구의 돈인지 모를 돈으로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느낀다. 또한, 지금 상황에서는 건축가가 너무 많은 희생을 하면서 일을 해야 한다. 일단 건축가와 발주처가 생각하는 좋은 공공공간이 너무 다르다. 건축가들은 공공에 개방된 공간을 설계하는데, 관에서는 안전 때문에 그렇게 하지 말자고 했다는 이야기는 너무 많다. 다음으로는 공공건축 작업에 책임 없이 한마디씩 얹는 플레이어들이 너무 많다. 심의를 말하는 게 아니다. 다양한 유관 부서의 요청이 잘 관리되어 전달되지 않고 산발적으로 내려오는데, 공모전을 통해 당선된 건축가가 그것을 다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비일비재하다. 이런 이유로 굳이 공공 작업을 안 해도 된다면 그 고생을 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더 힘이 생겨서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전까지는 관심 없다.
기획이라는 영역 조세연(노말) 요즘 많은 사람이 스테이나 카페 등에서 색다른 공간을 경험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그에 맞추어 하드웨어를 잘 설계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총괄적으로 기획하고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을 맞춤으로써 경험의 완성도를 높이는 일이 점차 중요해지고 있다. 우리는 만가타 프로젝트에서 건축 설계와 함께 이 공간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설계 의도에 부합하는지를 고민했고 클라이언트에게 제안했다. 실내 온도 기준부터 사물을 어떻게 둘 것인지, 음악은 어떤 장르의 곡을 틀 것인지, 손님을 어떻게 안내해 드리는지까지 공간 운영에 관한 세세한 설정을 아울렀다. 이런 내용은 건축적인 고려 사항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공간을 느끼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고, 소프트웨어이며, 우리가 생각하는 기획이다. 건축가가 이 영역까지 다룰 수 있어야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공간이 완성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기획에 참여하려고 노력한다.
다양한 경험의 조합 김나운 미국에서 학부를 졸업했고, 워싱턴 DC에서 대사관이나 공립학교 위주로 설계하는 사무실에서 2년 반 동안 일했다. 이후 네덜란드 델프트 공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개소하고 나서야 실무를 허겁지겁 배우기 시작한 셈이다. 그래서 고민도, 시행착오도 많았다.
사회성의 공감대 지금은 건축가들 모두 각자의 미학이나 태도만 이야기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주제의식이 강하지 않다. 사회성과 공공성은 좀 다르다. 내가 이해하는 사회성은 ‘프라이빗’에서 ‘퍼블릭’으로 이어지는 선상에 있지만, 서로 중의적으로 겹쳐진다. 건축가의 ‘사회적’ 역할을 이야기할 때는 ‘공공성’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의 이야기일 것이다. 공공성은 사회성의 하위 영역으로 볼 수 있다. 내가 사회적 역할을 말할 때는 내가 하는 건축 자체가 주변과 어울린다거나 하는 작은 부분이다. 그걸 공공성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작업과 밀접하게 맞닿는 부분에서의 아주 작은 사회성이다. 그 정도 이야기는 의식적으로 하려고 한다.
종암박스파크는 서울시 ‘고가 하부공간 공공공간 조성사업’ 일환으로 종암사거리 내부순환로 교각 아래 공간을 재조성해 만든 공간이다. 설계는 심플렉스 건축사사무소가 맡았으며, 2021년 대지면적 1,455m², 지상 1층, 연면적 692.5m² 규모의 문화예술공간으로 문을 열었다.
서울공예박물관은 한국 최초의 공립 공예박물관으로 종로구 안국동에 위치한 (구)풍문여고 건물 5개 동을 리모델링하여 마련됐다. 2016년 서울시 설계공모를 통해 천장환, 송하엽, 행림종합건축사사무소의 ‘크래프트 그라운드(Craft Ground)’가 당선작으로 선정되어 설계가 진행되었으며, 2021년 완공 후 개관했다. 공예품뿐만 아니라, 공예를 둘러싼 지식, 기록, 사람, 환경 등을 연구하고 공유함으로써 공예가 지닌 기술적⋅실용적⋅예술적⋅문화적 가치를 경험할 수 있는 플랫폼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양천공원책쉼터는 양천공원 내 위치한 연면적 464.55㎡, 지상 1층의 규모의 도서관으로 2020년 10월 문을 열었다. 양천구 목동의 5대 공원을 전체적으로 리모델링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2019년 7월 서로아키텍츠가 설계를 맡아 진행했다. 2021년 ‘서울시 건축상’(우수상)과 ‘대한민국 공공건축상’(대상)을 수상했다.
서울서진학교는 강서구 가양동에 위치한 공립 특수학교로, 폐교된 공진초등학교 부지에 증축 및 신축되어 지어졌으며 2020년 3월 문을 열었다. 2017년 강서양천교육지원청이 진행한 설계공모에서 코어건축사사무소가 당선, 설계를 맡게 되었다. 현재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전공과 학생까지 14년의 교육과정에 170명의 발달장애 학생이 재학 중이다. 2021년 서울시 건축상 대상을 수상했다.
건축은 대개 공공을 향해 서 있지만, 모든 건축물이 다 공공을 위해 존재하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건물이 도시의 시각적 풍경 변화에는 기여하지만, 시민의 일상 변화와는 동떨어져 있다. 아쉽게도 도시와 건축은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다. 오늘날 자본의 논리에 잠식되지 않은 영역을 찾기란 힘들겠지만, 자본주의 도시 문명에서 공간 경험은 경제 논리 그 자체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 불평등, 혹은 소외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 최소한의 방어선이 공공 건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이 기획되고 생산되고 운영되는 전 과정에 지속적으로 안부를 묻고 들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당선작들, 안녕하십니까>는 설계공모 당선작의 핵심 디자인, 실현 과정, 운영 상태를 모니터링함으로써 건축의 공공성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시민사회에 건강하게 자리잡을 수 있도록 돕고자 합니다. 당선과 완공이라는 단편적 관심이 아니라, 그 앞과 뒤, 과정 전반에 걸친 의사결정과 협의 과정을 짚어봄으로써 당선작이 지나는 복잡한 경로를 살핍니다.
분열된 사회 정체성 공공건축가 시스템이 만들어진 뒤 많은 건축가가 공공건축 설계에 참여하고 좋은 건물을 만들어갈 기회가 마련된 것은 분명하다. 특히 지방에 이 제도가 도입되며 공공건축물을 짓는 과정이 많이 개선됐다. 그러나 여전히 공공건축의 열악한 조건으로 인해 건축 자체의 퀄리티는 하향평준화 되어가는 느낌이 든다. 또 건축가가 전문가로서 사회에 이바지한다는 마음으로 이런 일에 참여하기는 하지만, 작은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희생을 강요당하는 면도 있다.
실무 경험: 건축에서 도시까지 맹필수 대학원 졸업 후 공간건축에서 5년 반 정도 근무했다. 원래는 건축 설계 업무를 기대하고 입사했는데, 당시 공간건축은 턴키나 해외사업을 많이 하고 있었고, 내가 맡았던 프로젝트들은 굉장히 규모가 컸다. 바쁘게 일하다가 문득 내가 도시 설계와 관련한 지식도 없이 그리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덜컥 당선되기도 하고, 아프리카 알제리 등지에서 내가 그린 도시가 실제로 생기기도 할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건축보다 더 큰 스케일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유학을 갔다.
일의 양보다는 종류가 많아졌다. 공공건축의 프로젝트가 늘고 개인 건축주들이 소규모 개발의 주체가 되었다. 건축가의 업역은 날이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주어진 과제를 잘 푸는 건축가보다 스스로 과제를 만들고 자기 일을 찾아가는 건축가가 필요한 세상이 되었다. 초대 건축가들과의 인터뷰 가운데 ‘체감하는 시장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한 건축가 여섯 팀의 이야기를 한데 모았다.
초대 건축가들과의 인터뷰 가운데 ‘건축(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이야기한 아홉 팀의 말을 한데 모았다. 이들은 작은 시도가 제 역할을 다할 때, 충분히 더 좋은 사회가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동네 건축가 혹은 마을 건축가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환경의 디테일을 개선한다. 또 대중에게 건축가의 작업을 가깝게 하기 위한 건축 수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건물을 사용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건축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아이디알(IDR)은 2014년 마흔이라는 늦은 나이에 부부 건축가 전보림과 이승환이 개소한 건축설계사무소다. 아이디어(idea), 아이디얼(ideal) 같은 단어가 연상되는 알파벳 조합을 찾아 만든 이름이다. 당시 5년간의 런던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터라 프로젝트는커녕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 같은 것도 없었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도전한 첫 설계공모가 천만다행으로 당선으로 이어져 공공건축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그렇게 매곡도서관(142쪽 참고)이 지어졌다. 첫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생긴 자신감은 이어지는 공모전 낙선 덕에 깊은 회의감으로 바뀌었다. 운영이 위태로울 지경에 이르던 차에 다행히 학교 다목적강당 설계공모에서 당선되었고, 교육청과 씨름하며 두 학교의 강당을 완성하고 나서야 그럭저럭 앞으로 이 일을 계속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영어를 처음 접했던 중학교 때 어느 컨트리음악 가사에 나오던 ‘dreamer’를 사전에서 찾아봤었다. ‘몽상가’, 생소한 뜻풀이에 갸우뚱거리며 부모님께 물어보니, 근면 성실한 시대를 사셨던 아버지는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놀고먹으며 헛된 꿈만 꾸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참고로, 아버지는 은행원이었고, 그때 그 노래는 케니 로저스의 「Don’t fall in love with a dreamer」였다. 그래서였나, 그 단어는 노래 가사처럼 여자의 맘을 찢고 떠나가는 나쁜 남자와 같은 잔상으로 아직도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런데 내가 하는 일의 모양을 되돌아보니, 이 먼지 낀 박제와 같은 단어를 언급하지 않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건축가의 일이란 게 제 의지로 시작되기보다는 주어지는 일이 대부분이고, 또 의지와 상관없이 엉뚱한 곳으로 방향을 틀거나 강제 종료 당하기도 한다. 게다가 용감히 첫발을 내딛는 이들에게는 그 시작의 기회마저 야박하다. 그러다 보니 실천하는 행동가이기보다는 혼자 즐거움을 만끽하는 소심한 몽상가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나보다.
2012년. 아름지기에서 주최하는 헤리티지 투모로우 프로젝트 공모전에 참여했다. 이도은과 임현진이 함께한 첫 번째 작업이었고, 우리는 ‘겹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제안했다.
한국 건축은 눈앞의 작은 이익에 매몰되어 큰 메카니즘을 볼 시야를 잃었다. 건축에 대한 진지한 사유는 불안과 모순의 상황을 악용한 약장수의 거짓 위로로 대체됐다. 최근 이상헌의 『대한민국에 건축은 없다』나 이종건의 『건축 없는 국가』와 같은 저작이 반향을 일으키는 이유이기도 하다. 성찰이 불가능한 시대에 “없다”라는 극단의 부정만이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절실한 희망으로 다시 쓰고, 다시 사유해야 할 때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MMCA,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은 우리 관공서의 변모를 징후적으로 보여준다. 모뉴멘트와 랜드마크의 소란은 사라지고 ‘차분한’ 헤테로토피아적 상상력이 꽈리를 틀고 있다. 단순하고 소박한 세계의 그리움은 상이한 것들이 중첩된 무형의 건축에 닿고자 노력한다. 건축가 민현준을 인터뷰 하면서도 ‘뜨거운 열망’의 단어보다 ‘멜랑콜리한 속삭임’이 더 잦았던 이유다.
2011년 홍성에 들어선 미술공간 <이응노의 집> 이후로 조성룡 성균관대 교수는 활동이 뜸한 것처럼 보였다. 간담상조肝膽相照했던 평생의 지기 정기용 건축가가 2011년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상심이 어떠했을 지는 굳이 가늠할 필요조차 없어보였다. 그럼에도 새로운 일을 쉬지 않고 해온 조 교수의 스타일을 생각하면 그의 에너지가 식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동시대 건축가들 중에서 조성룡 교수보다 더 유명한 이는 늘 있었다. 그러나 그처럼 꾸준하게 건축을 해온 이는 드물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건축계에서 그의 존재감은 점점 더 커져갔다. 그의 위상을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은 언론을 통해 간간이 발표되는 각종 설문조사들이다. 2011년 <조선일보>가 국내 건축가와 건축학과 교수 등 전문가 2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물’ 설문에서 조 교수의 대표작 한강 <선유도공원>은 1위에 올랐다. 건축을 베스트나 워스트로 순위를 매기는 것이 옳은 것인지는 차치하더라도, 2000년대 이후 꽃을 피운 그의 건축이 한국을 대표하는 반열에 오른 것만큼은 분명할 것이다.그리고 올해 초 ‘SPACE’와 <동아일보>가 함께 발표한 ‘건축가 100인이 꼽은 한국 현대건축 베스트’ 조사 결과는 조 교수의 비중을 더욱 분명하게 확인시켜준 소식이었다. 최고 건축물 20개 안에 조 교수의 작품은 <선유도공원>(조성룡 +정영선, 2002)이 3위, 어린이대공원의 <꿈마루 >(2011)가 14위, <의재미술관>(조성룡+김종규, 2001)이 17위에 올랐다. 세 개의 작품이 한국 현대건축 베스트에 꼽힌 건축가는 그가 유일했다. 세 작품 모두 2000년대 이후의 것이란 점, 그리고 모두 공공성이 강한 건축이란 점은 더욱 의미심장했다.어느새 조 교수는 한국 건축계 최고 윗세대가 됐다. 1940년대 생 건축가들 중에 지금껏 일선에서 활동하는 이는 이제 그 외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같은 세대 중진 건축가들 중에서 그처럼 아들뻘인 후배들과 지속적으로 만나며 호흡하는 이도 없다.10년 전, 그의 회갑을 맞아 후배 22명이 글을 써 헌정한 책, 『건축 사이로 넘나들다』(2004) 의 서문에는 조 교수를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이 있다. “60이 된 조성룡은 여전히 호기심 어려 있고, 여전히 끊임없이 일을 벌이고 있으며, 여전히 실무 건축인의 부지런함을 그대로 안고 있으며, 여전히 자신의 손과 발로 그 무엇을 만드는 일을 즐기는 모습도 그러하다. 여전히 영화와 음악과 책과 회의와 현장을 쉴 새 없이 오간다. 여전히 어떠한 질문에도 소박한 답을 하면서도, 여전히 고집스럽게 심지 굳다.”10년이 지나 그가 칠순을 맞은 지금도 이 구절은 유효하다. 발표하는 작품 소식은 줄어든 듯해도 그는 여전히 무언가를 하고 있다. ‘젊은건축가상’ 을 비롯한 여러 심사에서 그의 이름을 볼 수 있고, 여러 건축계 행사장에서 그의 얼굴을 직접 마주칠 수 있었고, 페이스북에 올리는 사진을 통해 자주 근황을 접할 수 있다.전화와 웹으로 안부를 전해오다가 《건축신문》 의 인터뷰 원고 요청으로 조 교수의 <지앤아트 갤러리>(경기도 용인)에서 모처럼 여유롭게 그를 만났다. 조성룡 건축을 보면서 성장한 후배 건축가들이자 ‘파워건축블로거’들이 부담 없이 만나는 자리에 끼어들어 담소와 술자리로 인터뷰를 대신했다. 6시에 시작한 모임은 밤 11시에나 끝이 났을 정도로 오래 이어졌고, 그는 진지하면서도 무겁지 않게 여러 이야기를 풀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