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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성장 시대의 도시건축론

박인석

일 년 전쯤인가. 등산 모임 남산 산행길에 얼마 전 환경개선 사업이 진행된 해방촌 신흥시장에 들렀다. 동행했던 선배와 프로젝트에 대해 호평을 나누다가 화제가 도시재생 프로젝트의 성공 요건으로 번졌다. 북촌, 성수동, 신당동 등 “그만하면 성공”이라고 꼽힌 몇몇 사례들은 모두 부동산 가격 상승을 업은 곳이었다. 힙플레이스가 됐고, 젠트리피케이션을 겪는다. 반면 성과가 불분명한 지역들은 예외 없이 부동산 가격 상승 없이 현상 유지 상태다. 산행 중 대화인지라 결론 없이 그쳤지만, 이 화제는 평소의 의문으로 연장되며 내 머리를 맴돌았다. 부동산 가격이 안 오르면, 현상 유지면, 실패인가?

부동산 가격을 높이고 젠트리피케이션을 일으켜서라도 도시재생 사업에 ‘성공’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래야 하는 것인가? 모든 재생사업은 부동산 가격 상승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말인가? 부동산 가격이 오르지 않는다면 어떤 재생이 가능할까? 그저 기초 인프라만 개선한다면? 지금의 생활경제 국면을 유지하면서 지역의 삶의 질을 개선해 나간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한가? 반드시 가치 생산량을 높이고(외부 구매 인구 유입이든 자체 생산성 증대이든) 그 결과로 부동산 가격이 높아져야 하는가? 부동산 가격 상승이 더 큰 문제 아닌가? 오히려 가치 생산량 증가가 부동산 가격을 자극할 수준을 넘어서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재생사업의 목표가 돼야 하지 않는가?

한국의 저성장이 구조화한다는 신호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OECD는 한국의 2027년 잠재성장률이 1.5%로 낮아질 것이라고 예상했고, 한국개발원(KDI)은 2040년에 제로성장에 가까워질 것으로 전망했다. 점점 심해지는 소득・자산 양극화, 세계 최하위 출산율, 급기야 지방소멸을 예고하는 지방 도시 인구 감소 추세 …. 저성장의 요인이자 결과라고 할 만한 비관적인 뉴스들이 미디어를 덮고 있다.

이에 반해 저성장 관련 현상에 대한 사회적 논의나 담론은 아직 과거 틀에 머물고 있는듯하다. 예컨대 최근 뜨거운 화두로 떠오른 지방소멸 문제를 다룬 한 책의 요지를 보자. “근린지구 안에 증가하는 빈집 비율은 근린지구의 지가를 하락시킨다 …. 지가 하락은 세수 감소로 이어지고 그 결과 정부의 근린지구에 대한 재투자가 줄어들면서, 결국 근린지구의 경제와 환경은 더 쇠퇴하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된다.”(이삼수・정광진(2022), 축소도시, p.42) 

이게 합당한 얘기인가? 지가 하락은 세수 감소라는 부정적 영향만 초래하는가? 임대료 인하로 자영업자 등 지역산업의 비용 부담을 완화하고 이윤을 늘리는 효과는 없는가? 이로 인한 세수 증대 효과는? 공공 인프라 설치 비용 감소 효과는? 지가 하락이야말로 지역 경제 활력과 삶의 질 수준을 높이는 필수조건 아닌가? 지가 하락이 가져오는 긍정적인 측면과 그 효과 정도는 왜 거론하지 않고 따져보지 않는가. 지가 하락이 정말 문제라면 왜 역대 모든 정부는 부동산 가격 안정을 위해 애쓰는가. 성장 시대에 익숙한, 계속되는 인플레이션과 부동산 가격 상승에 익숙해진 기존의 틀로 모든 사안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까지 도시개발과 건축생산은 ‘경제성장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믿음을 전제로 이를 위한 유력한 수단으로 복무해 왔다. 모든 건축-도시공간 사업에서는 으레 기획 단계부터 ‘사업성’을 절대기준으로 신성시해 왔다. 사업을 통해 생산되는 가치량이 투입되는 가치량보다 월등히 많아야 했다. 저성장 시대의 도래는 이러한 ‘사업성’이 한계에 도달했음을 뜻한다.

사업성 좋은 사업이 어려워졌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성장 시대의 경제시스템은 교환가치량 증대를 절대시하며 교환가치를 기대할 수 없는 인간적-윤리적-환경적 덕목들을 경시하고 절멸시켜 온 시스템이었다. 저성장 시대는 이러한 시스템이 한계에 도달했음을 뜻한다. 교환가치가 늘어나지 않아도 삶의 질을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운다. 대신에 사용가치가 늘어나면 되지 않는가? 하자 없는 견실한 집, 매력 있게 설계되고 시공된 우리 동네 공공건축물과 공공공간. 저성장 시대는 돈으로 사고파는 재화가 아닌 덕목들, 사용가치에 기반한 삶의 질에 다시 주목하고 일구어 가야 할 시대다.

물론 저성장을 벗어나기 위한, 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위한 정부와 기업들의 노력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저성장 구조화를 알리는 전망은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저성장이 불가피함을 말하는 것이다. 저성장이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저성장 상황에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관심과 노력도 필요하다. 저성장-제로성장 시대에 분배-축적 메커니즘은 어떻게 될까? 과연 성장 없이는 잘 살 수 없는 것인가? 저성장 상황이 빚어내는 문제들을 살피고 이 문제들을 완화하고 해소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이러한 시각에서 우리 사회가 다시금 건축을 살펴야 하는 이유를 제기하고 돌아봐야 할 지점을 들춘다. 1편(‘40년건축’으로 만든 나라)에서는 경제성장 수단으로 복무해 온 한국 건축의 민낯을 보여준다. 한국의 건축물 수명이 40년이 채 안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100년 건축이 보통인 유럽 나라에 비해 건축 수명이 턱없이 짧다는 것을 확인한다. ‘40년마다 철거-신축을 반복하는 건축생산’이야말로 GDP라는 허수를 채우는 유력한 수단이고, 그 대가로 국민의 삶의 질을 낮추고 있는 질곡이라는 ‘아무도 밝히지 않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리고 저성장 시대에는 더 이상 계속해서는 안 될 그 질곡을 벗어날 방안을 고민한다.

2편(부실시공, 공공책임 부재의 귀결)의 주제는 ‘40년건축’의 쌍둥이라 할 만한 부실시공 문제다. 사용가치로 살아가야 할 저성장 시대에 최우선으로 해소해야 할 또 다른 질곡이다. 수십 년 동안 무수한 처방이 거듭됐지만 도대체 나아지지 않는 부실시공의 근원이 ‘공공의 감독 책임 방기’에 있음을 밝힌다. 이 역시 ‘아무도 밝히지 않는 사실’이니 설득력 있는 논거를 샅샅이 찾아야 했다. 1990년대 건축생산이 팽대해지며 부담이 커진 건축공사 검사(inspection) 업무를 공공이 어떤 경로로 손 놓았는지, 이해 상충을 따지지도 않고 검사 업무를 떠안긴 민간 감리용역 시장이 어느 정도로 기형적인 몸집 불리기를 해왔는지, 닥치고 감리 강화로 일관하는 부실시공 대책으로 시공관리에 긴요한 다른 직능과 업무들이 어떻게 왜곡되고 파탄지경에 이르고 있는지를 드러내려 했다, 그리고 다른 어떤 나라도 검사 업무를 한국처럼 민간 시장에 맡기지 않는다는 사실, 어떤 형태로든 공공이 직접 챙기거나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도 곁들였다,

3편(건축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은 저성장 시대에 접어든 한국 사회가 지속가능한 사회로 살아남는 데에는 건축의 산업적-경제적 역할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제기한다. 건축산업은 산업 규모만으로도 국가 기간산업이라 할 만큼 거대하다는 ‘대부분 모르고 있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게다가 전형적인 내수산업이자 지역 현장 생산 중심 산업이라는 건축산업의 특성은 한국 사회가 맞닥뜨리고 있는 주요한 문제와 과제에 대응할 유효하고도 적절한 수단이라는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저성장 시대 안정경제를 위해서는 물론, 해결책이 비관적으로 보이는 소득 양극화 문제나 기후 위기, 그리고 저출산 문제와 지방 소멸 문제까지, 한국 사회를 조이고 있는 이 모든 과제를 풀어가는 길목에 건축이 있다는 ‘모두가 알아야 할 사실’을 논한다. 바야흐로 한국 사회가 건축을 보듬고 살아야 할 진짜 ‘건축의 시대’에 들어섰음을 알린다.

* * *

요즘 한국 경제 분위기가 남다르다. 글을 시작한 일 년여 전과는 완연히 달라 보이는 분위기다. AI 열풍에 반도체 산업이 ‘호황’이라는 단어가 부족하리만큼 불타고 있다. 주식시장이 폭발하는가 하면 상식 수준을 넘어서는 초과이윤 배분을 둘러싼 갈등과 논의가 분분하다. 한국의 성장률 전망치도 잇달아 상향 조정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저성장’을 논하기가 문득 부자연스러울 정도다.

그러나 이 엄청난 반도체 호황을 더해도 한국의 성장률 예상치는 당초 1%대에서 2%대로 높아진 정도에 머문다. AI 산업 선두그룹에 서기 위한 국가적 노력에 전 사회가 동의하고 합심하는 분위기이지만 그것이 가져올 것으로 기대하는 초과이윤 배분의 예상도는 상쾌하지 않다. 최근 성과급 논란에서 보듯이 극히 일부 초대기업 임직원들에게 편중될 전망이다.

막대한 초과이윤이 현실화하는 가운데에서도 소득 양극화가 심해질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은 계속되고 있다. 저성장의 그늘은 여전히 다수 국민의 생활을 짓누를 태세다. AI와 반도체 열풍 속에서도 여전히 저성장 시대를 논해야 하는 이유다.


박인석

현재 명지대학교 건축학부 명예교수. 도시와 건축 및 주택 정책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대안적인 정책을 제안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 국가 건축정책위원회 5기 위원과 6기 위원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건축 생산 역사』(전 3권), 『건축이 바꾼다』, 『아파트 한국 사회』 등이 있다.

저성장 시대의 도시건축론

분량4,355자 / 8분

발행일2026년 6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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