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돌돌 얼마 전 트위터에서 떠내려오는 이미지들 사이로 성당 앞에 걸린 “모든 돌은 천국에 갑니다”라는 문장을 보았다. 모든 돌이 천국에 간다니 천국이 있기는 한 지 내가 천국에서 기다릴 수 있을지 돌에게도 영혼이 있는지 죽음도 있는지 모든 돌이 착한지 신은 이름 없는 돌을 무엇이라 부를지 천국에도 중력이 여전해서 돌이 언제나처럼 가장 아래에 자리 잡을 것인지 신중히 따져봐야 할 문제들이 산적하지만 여기는 건축신문이니 세부적인 논의는 잠시 미뤄 놓겠다. 나는 이 문장이 마음에 들었다. 모든 돌,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것들에 나름의 생기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 그것들이 주고받는 생기 사이로 공명하고 싶다는 소망, 이 모두의 영원한 안녕을 바라는 불가능한 사랑의 마음, 그리고 세상에서 비인간적인 건 인간밖에 없다는 인간화 된 자연에의 각성 말이다.
일상건축사사무소는건축이 어렵지 않기를 바랍니다.건축의 어려운 담론을 떠나 개개인의 일상을 공유하고 그 일상을 건축에 담아내고자 합니다.
건축과 시각물의 결합은 단순히 3D와 2D의 표현법이나 구축되는 형태가 아니라 경험이라는 행위 안에서 상호작용이 일어나야 한다. 이러한 공감각적 경험은 형태와 기능 사이의 관계에서 얻는다. 그로부터 시작된 고민을 풀어내듯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의 “Form follows function.”과 시각디자이너 폴 랜드의 “Design is a relationship between form and content.”란 두 문장에서부터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성을 고민하면서 그 결과물로 폼앤펑션이란 사명을 풀어냈다.
라이프건축은 황수용과 한지영이 2016년 서울 부암동에서 시작한 작은 건축가 그룹이다. 우리는 라이프를 시작하기 이전에도 다수의 공모전을 함께 작업했고 좋은 결과를 얻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그 신뢰라는 것이 두 사람이 같은 방법론과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굉장히 다르다. 쉽게 설명하자면, 황수용은 도시나 사이트의 경관, 주변과의 관계에서 건축 설계를 시작하고, 한지영은 내부의 프로그램이나 동선, 사람이 건축 공간에서 경험하는 감각으로부터 설계를 시작한다. 어느 쪽에서 시작하든지 다양한 지점에 대해 서로를 설득하고 인정하며 결국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어 나간다.
ATELIER KHJ는 이제 막 5년을 넘겼다. 아직 호기심이 많고 여러모로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우당탕거리는 과정 속에 크고 작은 일들을 진행했다. 일의 규모와 상관없이 무엇이든 쉽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런 마음가짐이 좋은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독립부터 현재 _ 작가 아틀리에, 중규모 외국계 사무실, 대형 종합건축사무소를 두루 거치고 독립했다. 내 작업을 하겠다는 욕망보다는 자신의 호흡으로 삶을 꾸려가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등장하는 건축가들을 만나며 이 세대를 지칭하는 다른 수식어, ‘젊은(젊음)’을 되새긴다. 이 표현을 향한 여러 갈래의 의문, 해석, 비평, 비판이 다양한 지면을 통해 지속되었으므로 굳이 다시 꺼낼 필요는 없을 것이나, 시즌마다 도돌이표처럼 자꾸만 되돌아오는 이 모호한 수식을 곱씹어보게 된다. 그리고 만남을 거듭할 때마다 그 의미는 미묘하게 변주된다.
공간을 탐구하는 과정 신민지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이 스튜디오 베이스였다. 결혼하고 나서는 독립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 되어서 프리랜서로 일했고, 클라이언트와 인연이 이어지고 일이 계속 생겨서 사업자를 낸 뒤 개인 스튜디오를 운영했다. 그러다 임명기 소장이 독립하게 되면서 함께 공기정원을 열었다.
다양한 프로세스와 프로젝트 김종서 학부 시절, 최문규 소장님과의 인연으로 가아건축에서 인턴을 했는데, 당시에 최 소장님과 조민석 소장님의 협업 프로젝트인 ‘딸기가 좋아’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그 때 조 소장님을 처음 뵈었다. 그리고 대학원 재학 중에 조 소장님이 같이 일해보자는 연락을 주셨고, 매스스터디스 창립 멤버가 됐다. 막 시작하는 사무소였으니 조 소장님은 늘 ‘우리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을 했는데, 소장님이 열정적으로 일하는 모습에 나도 열과 성을 다했다. 그때 같이 일했던 멤버들에게는 지금까지도 의지하고 있다. 그렇게 한 3년 정도 계획 위주의 프로젝트를 하다 보니 현장을 향한 목마름이 생겼다. 그래서 원오원으로 옮겨 현장 중심으로 일했다. 1년 남짓의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사무소 운영 측면에서는 그때 경험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고 있다. 그러다가 다시 매스스터디스로 돌아가서 프로젝트 매니저 역할을 하며 사우스케이프를 비롯해 큰 규모의 프로젝트를 여럿 진행했다.
다양한 경험의 조합 김나운 미국에서 학부를 졸업했고, 워싱턴 DC에서 대사관이나 공립학교 위주로 설계하는 사무실에서 2년 반 동안 일했다. 이후 네덜란드 델프트 공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개소하고 나서야 실무를 허겁지겁 배우기 시작한 셈이다. 그래서 고민도, 시행착오도 많았다.
현실 세계의 건축 백상훈 김영준 도시건축(yo2)에서 8년 가까이 일한 것이 개소 전 주요 경력이다. 그전에 대학원에서는 구영민 교수님 밑에서 건축에서의 추상적 개념과 공간, 물성에 관해 공부했고, 현실 건축보다는 페이퍼 건축과 이론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았었다. 졸업 후에는 dmp 창립 시 멤버로 합류해 dmp 초기 주요작 IFEZ ARTS Center 및 노들섬 예술선터 등을 같이 했었다. dmp가 처음에는 50명 규모에 디자인을 추구하는 회사라고 생각해서 갔지만, 어느 순간부터 스케치 한 장에 담긴 의도를 추정해서 도면화하고 모형을 만드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 지루하게 느껴졌다. 사무소 규모가 커지면서 담론은 사라졌고 여느 대형 설계사와 비슷해지면서 설계가 시스템화 되어가는 것에 거부감이 들었다. 그런 상황에 신물이 나서 영국으로 유학을 준비했고 바틀렛(UCL)에 입학하게 되었지만 개인 사정으로 그만 두었고, 일본에서 잠시 일할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내 위치가 너무 애매했다. 페이퍼 건축에 관한 공부를 한 데다가 대형 설계사 경험만 있다 보니 도면 한 장을 제대로 그리지 못했다. 그래서 국내 아틀리에의 작품과 도면을 찾아서 들여다봤고, 가장 눈에 들어왔던 게 김영준 도시건축의 작업들이었다. 그래서 그곳에 직접 일하고 싶다는 메일을 보내서 입사를 하게 됐다.
일을 놓고 찾은 길 최윤영 희림건축에 신입으로 입사해서 10년 정도, 권이철 소장은 해안건축에서 신입사원으로 시작해 15년을 있었다. 둘 다 기본적으로 주거본부에서 대규모 아파트 설계를 했고, 나는 주로 규모검토, 기획설계, 현상설계를 했다. 실무 10년 동안 현장이나 프로젝트 준공을 거의 경험하지 못했고, 소규모 건축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기 때문에 ‘내 사무소’ 혹은 ‘우리 사무소’ 오픈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서 회사 생활을 이어가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는데, 하루 2~3시간 쪽잠 자는 생활을 이어가다가 결국 건강에 문제가 생겨 갑작스럽게 퇴사하게 되었다. 퇴사 후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궁리하다 어린 시절 꿈을 다시 꺼내 보기로 마음먹고 취미미술학원에 등록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덕에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도 점차 치유되었고, 좋은 기회를 얻어 전시까지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다 한 아트페어로부터 외부 공간을 같이 기획해 보자는 연락을 받았다. (그쪽에서도 내 커리어를 신기하게 본 것 같다.) 조금씩 일을 진행하던 차에 자금난으로 행사가 취소되면서 그 안을 실현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일을 계기로 건축과 미술 중간 어디쯤에 우리가 몰랐던 시장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라크랩(LACLAB)이라는 스튜디오를 개설해 공공미술, 전시기획, 연구 프로젝트, 기획설계, 법규검토 등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2년 정도 열심히 일을 찾고, 작은 프로젝트들을 시도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권 소장도 드디어 독립을 생각하게 되었다.
실무, 함께 일하는 법을 배운 시간 이복기 졸업 작품 발표회 크리틱으로 만난 장영철 소장님과의 인연으로 와이즈 건축에 입사했다. 원클럽맨처럼 한 곳에서 오래 일하는 걸 꿈꿨기 때문에 와이즈 건축에서만 8년을 일했다. 그동안 포럼, 전시부터 주택, 근린생활시설, 박물관, 기업 사옥까지 다양한 규모의 프로젝트를 단계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실무 경험 중에서도 지금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장영철, 전숙희 소장님이 시공자 등 협업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 가는지 곁에서 보고 배운 것이다. 프로젝트에서 결정을 내릴 때 그런 부분이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장 소장님은 아이디어를 키워나가는 것에 관심이 많고, 전 소장님은 매우 꼼꼼하게 풀어가는 분이다. 이처럼 두 소장님의 성향이나 관심사가 매우 다름에도 조화를 이루며 한 단계씩 일하는 법을 배웠다. 노말의 세 소장도 성향이 완전히 다르지만, 두 분에게 보고 배운 것을 토대로 서로 채워주고 맞춰가고 있다.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able)이라는 신조어가 더 이상 새롭지 않은 지금, 많은 젊은 건축가가 웹사이트 제작보다 인스타그램 계정 운영을 우선한다. 다른 소셜미디어에 비해 특히 인스타그램은 이미지로 소통하며 정체성을 구축해 가는 곳으로, 좋은(예쁜) 공간과 장면, 특별한 순간을 끊임없이 소비하는 장이다. 인스타그램의 소통 방식과 특성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지와 상관없이, 공간을 소비하고 누리는 데에 관심이 많은 젊은 세대에게 자신의 작업을 어필하기 원하는 건축가라면 적극 활용해야 할 소셜미디어가 되었다.
건축가의 일이란 보통 작업 결과인 건축물을 지칭한다. 건축가에게 “당신은 어떤 건축가입니까?”라는 질문을 건넬 때에는 그가 어떤 작업을 했는지, 건축가로서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건축계 이슈에 어떠한 입장인지에 먼저 관심을 두게 된다. 건축가의 일은 이러한 개별성을 지니는 것인 한편, 업무 자체만 떼어놓고 봤을 때는 절차에 의해 수행해야 하는 과제가 명확하고, 전문적인 분업이 필수이며, 실현 과정에서는 더 확장된 영역의 사람들과 협업하는 일이다.
주체적인 건축가로 서기 전진홍 계획된 독립은 아니었다. 당시를 되돌아보면, 재직 중이었던 공간그룹의 법정관리 사태는 내게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전 세계를 누비며 다국적 회사로 운영되는 모델이 잘 작동될 수도 있지만, 건축가가 거대 자본의 흐름에 기대어 사무소를 운영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적 모델이 필요하지 않을까 스스로 많이 묻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OMA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 세대로, 클라이언트가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보다는 개인의 관심사를 연구하고 생각을 발전 시켜 나아가는 능동적인 건축가의 모습을 그렸던 것 같다. 이렇게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건축가로서 내적 논리를 탄탄하게 갖추어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겠다고 생각했다.
팀 결성 전필준 이윤정 소장과 나는 영국 유학 중에 만났다. 내가 바틀렛 건축대학에서 유학하던 시기에 이윤정 소장도 RCA에서 순수미술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 소장이 초기에 도시 풍경과 관련된 작업을 많이 했다. 예를 들면 공업 생산품을 이루는 내부 형태로부터 도시 속의 건축을 떠올리거나, 진열대 위에 상품이 가지런히 배열된 모습이 하나의 시티스케이프와 유사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주제로 삼아 작업하고 있었고, 서로 의견을 많이 주고받았다.
첫 독립, OMR 조성학 대학 졸업하자마자 뭐든 해보자고 마음 먹고 우리 둘과 바이아키텍쳐의 이병엽 소장까지 함께 창업해 무작정 일을 하나 받았었다. 그런데 실무 경험이 없다 보니까 너무 막막했고, 결국에는 그 일이 잘 안 됐다. 6개월 정도 지나서야 건축사사무소에 들어가 일을 배워야겠구나, 깨달았다. 그때 팀 이름은 OMR이었다.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김세진 처음 취업해 일을 시작할 때는 생산자이자 소비자였던 것 같다. 일을 통해 회사에 기여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동시에 스스로 깨닫거나 배우는 것도 많았다. 설계라는 직능에 있어 기여와 배움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고, 생산과 소비가 순환되는 기간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혼자 처리할 수 있는 업무의 비중이 높아지고 배움보다는 기여가, 소비보다는 생산이 주를 이루었다.
공간을 도면으로 표현하는 법 김윤수 나는 운생동이 처음 사무실을 시작하던 시점부터 함께 하며 초창기에 지어진 건물의 실시설계를 많이 했다. 주로 소장님들이 그린 선을 정리하고 다듬어 건물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학생 때는 모형 만드는 걸 좋아했고 모형으로 스터디를 많이 했는데, 사무소에서 도면 정리하는 일을 본격적으로 해보니 도면에 공간이 표현되고, 공간이 곧 도면으로 보여야 하는 부분에 대해 더욱 관심을 두게 되었다. 어찌 보면 단면도를 주요 매체로 선택하게 된 것은 운생동의 영향이다.
독립, 조금이라도 젊을 때 강우현 언젠가 건축사 자격증을 따면 건축사사무소를 개소해서 직접 디자인한 건물을 지어보는 게 막연한 희망 사항이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30대에는 개소하고 싶었다. 더 늦어지면 아무래도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칠 수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젊을 때 독립하고 싶었다. 그래서 강영진 소장이 먼저 건축사 면허를 취득한 뒤 계약된 일도, 제대로 된 사무실도 없이 개소했다.
독립, 젊을 때 몸으로 부딪치자 최영준 대학생 시설, 월간지 『C3 코리아』 국내 건축가 시리즈를 통해 서혜림, 김인철, 김영준 같은 건축가들을 접했고, 건축가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일하는 직업임을 느꼈다. 졸업 후 책에서 만났던 선생님을 찾아갔고, 김영준도시건축에서 실무를 했다. 그곳에서 건축주를 대하는 법, 건축가로서 해야 할 일 등의 기술을 습득하고 수련했다. 거기에는 한치의 의심도 없었다.
실무 경험: 건축에서 도시까지 맹필수 대학원 졸업 후 공간건축에서 5년 반 정도 근무했다. 원래는 건축 설계 업무를 기대하고 입사했는데, 당시 공간건축은 턴키나 해외사업을 많이 하고 있었고, 내가 맡았던 프로젝트들은 굉장히 규모가 컸다. 바쁘게 일하다가 문득 내가 도시 설계와 관련한 지식도 없이 그리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덜컥 당선되기도 하고, 아프리카 알제리 등지에서 내가 그린 도시가 실제로 생기기도 할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건축보다 더 큰 스케일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유학을 갔다.
건축가로서의 매력 김경도 대학교 3학년 때 설계스튜디오 선생님이 허서구 교수님이었다. 졸업할 즈음 교수님께서 “취직했니? 갈 데 없으면 그냥 우리 사무실로 와라” 말씀하셨고, 그렇게 첫 사무소에 들어갔다. 거기에서 3년 4개월 정도 일했는데, 함께 일했던 김재경 한양대학교 교수가 유학 준비를 하며 내게도 유학을 떠나라고 계속 권했고, 나도 마음을 굳힌 뒤 유학 준비를 해서 스위스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ETH)으로 갔다. 어학연수 1년을 포함해 3년 정도 공부하다가 여러 사정으로 졸업하지 않고 2011년에 귀국한 뒤 바로 사무소를 시작하게 되었다.
건축하는 법 강현석 유학 기간 중과 졸업 이후에 헤르조그 & 드 뫼롱(Herzog & de Meuron)에서 3년 넘게 실무를 했다. 학교에서는 상황과 맥락을 보고, 읽고, 생각하는 방식을 배웠고, 사무실에서는 구체적인 생각들을 건축 어휘를 사용해 완결된 물리적인 문장으로 치환하는 법을 배웠다. 자크(Jacques)와 피에르(Pierre)는 항상 부연 설명 없이도 즉각적으로 발현하는 반-재현적인 건축을 강조했는데, 프로젝트의 초기 단계에서 두 사람의 생각이 무수한 시행착오와 부산물들을 거쳐 하나의 구축물로 귀결되는 과정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 때의 과정들을 떠올리면서 설계한다. 물론 당시 함께 일했던 소중한 동료들과 여행에서의 경험들은 현재까지도 큰 자산이 되고 있다.
우연한 기회에 독립 고영성 솔토건축에서 실무를 시작했고 회사 사정이 어려워져 대형설계사로 옮겼지만 큰 규모의 회사가 나와는 맞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프로젝트를 받아서 독립하게 됐다. 처음에는 인테리어부터 직접 시공까지 다양한 일을 했다. 현장에서 시공할 때 기능공 옆에 붙어 지내다 보니 사무실에 앉아있을 때보다 실무를 많이 익힐 수 있었다.
실무 경험: 기획부터 조직 운영까지 이주한 석사 과정을 마치고 희림종합건축사사무소에 입사해 현상설계 전담부서에만 3년 반 정도 있었다. 한 달에 마감을 서너 개 할 때도 있어서 체력적으로 힘들었지만, 디자인이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다 보니 ‘정예부대’라는 자부심이 있었고, 한 프로젝트의 시작점이자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미 누군가가 모든 규정을 만들어 놨고, 난 정해진 틀안에서 주어진 내용을 그림으로 그려내는 손일 뿐인가?’ 하는 고민이 시작됐다. ‘기획’에 대한 갈증이었던 것 같다. 현상설계가 기획 영역에 가장 가까이에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대지는 누군가가 정해 놨고, 왜 거기에 해야 하는지 모른 채로 설계하고, 프로그램과 설계 방향도 다 정해져 있고, 나는 그 틀안에서 끼워 맞추기 식으로 그림을 그려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대형설계사무소라서 더 그런 느낌이 심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형태나 이미지에 치중할 때가 많았다. ‘그렇다면 공공 프로젝트든 민간 프로젝트든 기획 단계의 일은 도대체 언제 누가 어디서 하는 걸까?’ 하는 궁금증과 함께 ‘기획이 건축의 시작이라고 배웠던 것 같은데…’하는 갈급이 점점 심해졌다. 3~4년 차쯤 되었을 때니 그런 생각을 할 시기가 오기도 했었다.
소수건축에서 유연성은 중요한 개념이다. 소수건축의 사무실은 고정된 벽체로 구획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무실의 공간 개념은 소수건축의 수평적 소통을 위함이다. 우리는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내외부로 생각을 확장하고, 공유와 공감의 장을 넓히려고 한다.
얼마 전부터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면서 학생들에게 명시적으로나 암시적으로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모든 형태, 모든 아이디어가 반드시 건축적으로 의미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신기한 것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학생들 중 몇몇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게, 자신에게 익숙한 어떤 대상(가령 꽃과 같은)을 그대로 건축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다. 시간을 초월해 이러한 모습이 반복되는 것은 아마도 인간 본성에 내재한 일반 조형의 의지와 건축적 표현 사이의 구분을 배우지 못 했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 건축을 배우는 학생에게 그 차이를 인식시키고 건축의 기초와 방향을 짚어주는 것이 선생의 역할이다. 그렇다면 일반 조형과 건축을 가르는 차이는 무엇일까. 이 쉽지만 어려운 질문은 건축가로서 나 자신에게도 항상 던지는 질문이다. 무엇이 건축을 건축으로 만드는가. 무엇이 건축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인가.
나는 어려서부터 공사 현장의 포크레인을 좋아했다. 길을 걷다가도 공사 현장이 나타나면 발걸음을 멈추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포크레인의 모습을 몇 시간이고 서서 구경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내가 나고 자란 인천의 동네에서는 목재공장들도 쉽게 볼 수 있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공장 앞에 쌓인 자투리 나무 조각들을 주워와 이것저것 만들곤 했다. 건축가가 되지 않았다면 목수가 되었을 것이다.
사무소는 10여 년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학교 선후배로 같은 시기에 공부했고, 부부가 되어 함께 건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일상이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 다른 사무소에서 실무를 경험했기에 피할 수 없는 의견 차이는 있고, 아직은 특별히 정해진 것 없는 유연한 상태로 건축가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당신은 어떤 건축가입니까?’라는 질문이 매우 어색하고, 우리도 우리가 어떤 건축가가 될지 무척 궁금하다.
사무소에 ‘서가’라는 이름을 단지 8년째다. 인테리어와 전시, 작은 공공시설물 디자인이 주된 일이던 3년의 시간을 보냈고, 집을 짓는 서가건축이 된 지는 6년 차의 사무소다. 8년이라는 시간을 지나며 구성원의 변화가 있었고, 현재는 박혜선, 오승현이 서가를 이끌고 있다. 신입사원으로 들어와 7년 차가 된 김유빈, 다른 사무실에서 실무경력을 쌓고 입사한 정상호, 오수진, 작년에 새내기로 입사한 박나영, 이민범, 한수지와 함께 작업 중이다.
기반은 같되 다른 결을 가진 우리의 건축 공부가 보여주듯, 최소의 건축공간에서부터 공동체의 플랫폼인 도시공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관심사를 서로 상보적으로 공유하며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건축에 기초하지만 건축설계에 함몰되지 않는, 실무와 연구, 교육과 사회봉사 전반에 기여할 수 있는 폭넓은 건축 직능을 갖추고자 노력 중이다. 작은 협소주택에서부터 갤러리, 근린생활시설, 물류창고, 공동주택, 업무시설, 리모델링 등 용도와 규모에 구애받지 않고, 건축설계 작업과 도시재생 뉴딜사업, 마스터플랜까지 다양한 연구와 건축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요앞건축은 건축의 이상과 실제 사이 접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고민한다. 일상에서 발견한 장면을 건축에 투영하기도 하고, 건축적 상상을 다른 영역으로 확장하기도 한다. 작업 과정에서의 자유로운 상상은 그대로 실제가 되기도 하고, 건축의 한계 덕분에 아이러니하게 새로운 단락에 이르기도 한다. 경계에서의 실험과 새로운 시도는 통제된 결과 너머의 지점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고정되지 않은 열린 결말의 시나리오는 작업의 즐거움이다.
아이디알(IDR)은 2014년 마흔이라는 늦은 나이에 부부 건축가 전보림과 이승환이 개소한 건축설계사무소다. 아이디어(idea), 아이디얼(ideal) 같은 단어가 연상되는 알파벳 조합을 찾아 만든 이름이다. 당시 5년간의 런던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터라 프로젝트는커녕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 같은 것도 없었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도전한 첫 설계공모가 천만다행으로 당선으로 이어져 공공건축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그렇게 매곡도서관(142쪽 참고)이 지어졌다. 첫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생긴 자신감은 이어지는 공모전 낙선 덕에 깊은 회의감으로 바뀌었다. 운영이 위태로울 지경에 이르던 차에 다행히 학교 다목적강당 설계공모에서 당선되었고, 교육청과 씨름하며 두 학교의 강당을 완성하고 나서야 그럭저럭 앞으로 이 일을 계속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인식(awareness) 건축의 인생은 어느 한때의 문제보다 크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업을 지속하면서 ‘무엇을’ 고민할지보다 ‘어떻게’ 고민할지가 중요해지고, 고민도 조금 선명해진다. 일상은 느리고, 일반적으로 잘 인식되지 않는다. 인간은 기억(과거)과 상상 혹은 기대(미래)로 현재를 산다. 지금, 이곳을 인식할 수 있는 공간적 장치가 필요하다.
영어를 처음 접했던 중학교 때 어느 컨트리음악 가사에 나오던 ‘dreamer’를 사전에서 찾아봤었다. ‘몽상가’, 생소한 뜻풀이에 갸우뚱거리며 부모님께 물어보니, 근면 성실한 시대를 사셨던 아버지는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놀고먹으며 헛된 꿈만 꾸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참고로, 아버지는 은행원이었고, 그때 그 노래는 케니 로저스의 「Don’t fall in love with a dreamer」였다. 그래서였나, 그 단어는 노래 가사처럼 여자의 맘을 찢고 떠나가는 나쁜 남자와 같은 잔상으로 아직도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런데 내가 하는 일의 모양을 되돌아보니, 이 먼지 낀 박제와 같은 단어를 언급하지 않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건축가의 일이란 게 제 의지로 시작되기보다는 주어지는 일이 대부분이고, 또 의지와 상관없이 엉뚱한 곳으로 방향을 틀거나 강제 종료 당하기도 한다. 게다가 용감히 첫발을 내딛는 이들에게는 그 시작의 기회마저 야박하다. 그러다 보니 실천하는 행동가이기보다는 혼자 즐거움을 만끽하는 소심한 몽상가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나보다.
관찰자로서 가장 인상 깊은 순간을 꼽으라면 포럼이 시작되기 10분 전 발표자 주위를 감도는 묘한 긴장감을 말하겠다. 창 너머를 바라보며 거듭 물 잔을 들이키는 건축가의 표정에는 갓 완성한 발표 자료를 되뇌어보는 아득함, 아직 비어 있는 자리를 눈으로 셈해보며 번뜩 스치는 걱정, 밀려드는 청중들 사이에서 지인을 찾은 반가움 등이 빠르게 오버랩되며 지나간다. 마치 첫 소개팅 자리처럼 어색함과 기대감이 공기 중에 녹아 있다. 만약 이런 자리에 능수능란한 고수였다면 이와 같은 풋풋함을 느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여느 때보다 유난히 관찰자 입장에서 전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인터뷰 자리가 끝나갈 때쯤 인터뷰이로부터 역질문을 하나 받았다. “어떻게 하다 기자가 됐어요?” 간혹 듣는 질문이었지만, 진지하게 대답을 해야만 할 것 같은 순간은 처음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기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 여러 가지 이유 중에 손에 꼽는 것이 젊은 건축가를 만나는 일이었다. 신인 발굴이야말로 매체와 기자의 할 일이라고 생각했고, 때마침 『공간』의 젊은 건축가 연재를 비롯해 이들에 대한 관심과 소비가 두드러지던 시기였다. 그리고 사회에 첫발을 딛는 내 입장에서 앞으로 함께 걸어갈 동료들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건축계의 젊음이란 당시 졸업반이던 나와는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의 시차가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두 번째 책을 내면서 두번째탐색을 만든 개인사적 배경을 짧게 붙여본다. (함께 책을 만든 두 사람의 이어지는 글도 마침 각자의 소회이니 자연스러울 것 같다.) 2017년 정림건축문화재단(이하 재단)에 합류해 당장의 급한 불들을 끄고 나서 이듬해 시작할 포럼을 어렴풋이 준비하기 시작했다. 재단이 그간 지속해온 건축 포럼 시리즈에 ‘두 번째’라는 라벨을 붙여 시즌의 변화를 알리고, ‘탐색’이라는 제목으로 방향 전환을 꾀했음은 이미 두어 차례 밝힌 바 있다. 두번째탐색에는 두 개의 줄기가 하나로 엮여 있다. 하나는 재단이 초창기부터 이어온 다양한 포럼으로 쌓아 올린 담론의 연속체이고, 다른 하나는 건축 기자 시절부터 내게 맡겨진 새로운 건축가 취재라는 끝나지 않은(을) 미션이다. 공교롭게 잠시 소강상태에 있던 둘이 만나서 기획한 첫 일이 각자에게, 그리고 공통으로 크게 단락지어진 ‘두 번째’ 무엇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