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최욱의 현대카드 영등포 사옥은 두 가지 점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된다. 우선, 외부 커튼월에서 보이는 정교한 기계적 구성과 재료의 투명성이 오피스 건물의 구축적 질서를 잘 드러냈다는 점이다. 현대카드의 이미지로부터 도출한 중첩된 커튼월은 조형적인 측면 뿐 아니라, 건물 내부에서 채광과 조망을 조절하는 역할도 겸하고 있다. 두 번째로 이 건물은 오피스 건물이지만 주변의 도시적 맥락과 적절하게 조응하도록 설계되었다. 건축가는 대지의 일부를 마당으로 조성하며, 이것이 내부 공간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도록 하여 로비 공간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상층부의 사무공간은 양방향 코어의 설치로 인해 개방적이면서도 쾌적한 무주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이같은 건축가의 시도를 높이 평가하며 수상작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심사평 탄허대종사 기념박물관은 전통사찰 건축공간을 현대건축으로 재해석 해내는 시도로서 매우 의미 있는 해결 방법을 보여주었다. 수평적으로 연계되는 전통사찰의 내ㆍ외부 공간들을 입체화하여 단일 건물 속에서 다층의 집중적 공간으로 재해석했다. 건축가는 전통양식과 공간의 직설적인 재현보다 현대건축의 틀 안에서 은유와 상징을 통한 전통건축의 체험을 유도하였고, 이를 놀라운 집중력과 테크놀로지의 성취로써 근래 우리 건축에서 보기 드물게 완숙한 건축으로 완성했다.
2009~2019 접점 학부 시절 읽은 커트 행크스의 『재미있는 디자인 여행』이라는 책에는 인상적인 다이어그램이 있었다. 작은 사물부터 건축에 이르는 다양한 스케일의 영역이 겹쳐져 있는 스케치였다. 명쾌함과 모호함이 공존하는 그의 아날로그 스케치는 건축과 디자인에 관한 대화를 시작할 때 사용할 수 있을 효과적인 도구처럼 보였다. 이것을 조금 더 정교하게 그려볼 수 없을까 하는 생각에 새로운 디지털 프로그램을 배울 때마다 재차 새롭게 그려보곤 했다.
1 2018년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 공동감독을 맡은 이본 파렐(Yvonne Farrell)과 셸리 맥나마라(Shelley McNamara)는 관대함과 인류애, 두 가지를 건축의 핵심과제로 규정하면서 ‘Free Space’(자유공간)라는 주제를 발표했다. ‘자유공간’을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기회와 민주화의 장이 되는 불확정적 도시 공간으로 정의한 두 사람은, 공적 공간 – 사적 공간의 교차와 공간의 공유를 통해 집단의 정치적 잠재력을 일깨우며, 사람과 장소 사이에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건축의 역할이라고 밝혔다. 이에 71명의 건축가와 63개의 각 국가관은 ‘자유공간’에 대해 저마다의 해석을 내놓았다.
1979년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로 완공된 샘터사옥은 한 회사의 사옥임에도 사유지인 건물 1층에 길을 내어 공공 통로를 두고 지하와 저층부에는 대학로 문화와 함께 호흡하는 프로그램들을 유지해왔다는 점에서 건축적·도시적 가치가 크다. 샘터사옥은 올해 새 소유주 공공그라운드를 만났다. 공공그라운드는 건축사적으로, 도시사적으로 의미 있는 오래된 건축물의 상징적 가치를 사회적 자산으로 본다. 한편으로는 지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활용함으로써 미래를 위한 사회적 가치를 생산하는 사용자들의 열린 플랫폼으로 개발하는 일을 꿈꾼다. 공일스튜디오가 건축가로 참여한 샘터사옥 리노베이션은 이런 아젠다를 실행에 옮기는 첫 프로젝트(공공일호)로서 의미가 크다. 그래서 공일스튜디오와 공공그라운드는 함께 샘터사옥의 리노베이션 과정을 기록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이곳에 생겨날 새로운 생태계가 이전의 역사와 전환의 과정을 기억하고 새로운 문화의 바탕으로 삼기를 희망한다.
예측은 늘 어렵다. 더구나 지금처럼 변화가 빠른 (게다가 한국) 사회에서 무언가를 대비한 해결책 제시는 어쩌면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는 편이 현명할지도 모른다. 이 제안은 특정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나 건축적 성과 혹은 해결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 단지 그간의 작업을 통해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시도했거나, 현재 진행 중인 몇 가지 실험의 일부다. 아직은 과정도 탄탄하지 못하고 결과가 보장된 실험도 아닐지 모를, 문제 제기 정도의 단계로 보는 편이 적당하다. 하지만 문제 제기를 통한 사고의 공유가 모든 프로젝트의 출발점임을 상기하면, 그것대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풍년빌라 프로젝트는 이러한 문제 제기와 함께 몇 가지 단서를 제공한다. 그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주택 정책 한국은 새마을운동을 기점으로 경제 발전에 역점을 두고 미국 경제 발전 방식을 모델로 삼았다. 미국은 저금리 모기지론으로 1가구 1주택을 구매하도록 유도했고, 주택을 담보로 평생 이자를 갚아나가는 구조를 만들었다. 노동자들은 주택을 얻게 되지만 주택 구입을 위한 이자를 내기 위해 열심히 노동하게 되고, 이를 동력 삼아 국가 경제가 작동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이후 일본도 이와 같은 방식을 도입했고, 1960년대 한국도 비슷한 방식을 도입했다. 그렇게 출발한 한국 주택 정책은 경제 성장의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존재하게 되었다. 이는 ‘어떤 주택을 공급할 것인가’, ‘어떤 주택에서 생활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간과하게 만들었고, 오랫동안 주택을 경제(재화) 수단으로 인식하게 했다. 현재 1가구 1주택을 전제로 한 내 집 마련 정책이 실패했다면, 그 실패는 단순히 경제 정책의 실패가 아니라 우리 일상생활이 파괴되었음을 뜻한다.
소필지 주거지의 원룸화 1970년대 50 – 60평 필지로 구획된 서울 도심의 주거지역에 단층의 전후 보급형 주택들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서구식 주거 방식이 도입되면서 ‘양옥’으로 통칭하던 2층짜리 단독주택이 도심 주거지역을 채우기 시작했다. 1990년 다가구 주택이 법제화되면서 반지하 위에 지상 2층을 얹어 총 세 개 층으로 이루어진 주택 유형이 소필지 주거지역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반지하에 두 세대, 1층에 두 세대, 2층과 옥탑에 주인 세대가 거주하는, 다셋 세대가 모여 사는 옥외 계단형 다가구 주택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1990년대 말에 이르러 옥외 계단실을 실내로 전용하여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옥외 계단을 건폐율에 산입하도록 건축법이 개정되었다. 이와 함께 공용공간을 실내화한 ‘중앙 계단형 다층 다가구·다세대 주택’이라는 유형이 등장했다.
참여 디자인으로 만든 어린이 공간 테즈카 건축(Tezuka Architects)에서 설계한 도쿄 다치카와의 후지유치원은 전 세계에서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10대 유치원으로 뽑힌 곳이다. 2007년에 개원한 이 유치원은 울창한 숲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 자연 속에서 배우고 노는 아이들 모습에서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하자센터부터 청년허브까지 1999년 하자센터를 맡으면서 청소년 문제와 마주하게 되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나와서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청소년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했는데, 처음에는 그들의 사고나 행동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을 두고 보니 특정한 맥락에서 아이들이 다르게 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커먼즈 ‘커먼즈(commons)’라는 단어가 최근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커먼즈는 공유지, 공유재, 공유 자원 등으로 조금씩 다르게 해석되는데, 데이비드 볼리어1의 『공유인으로 사고하라』를 보면, 커먼즈를 공동의 가치와 정체성을 보존하는 자원을 장기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사회적 시스템, 공동체가 시장이나 국가에 의존하지 않거나 최소로 의존하며 관리하는 자기 조직적 시스템으로 정의한다. 또, 우리가 물려받거나 함께 생산하여 더 발전시키거나 줄어들지 않은 상태로 자손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부, 곧 자연의 선물, 시민 인프라, 문화 작품, 전통, 지식 등으로 정의한다.
우리 도시의 현주소 우리는 그동안 너무 양에 집착해서 빨리빨리를 외쳤고 질을 등한시 했다. 질이라고 하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지난 선거 과정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공정한 사회, 정의로운 사회에 대해 이야기했다. 국민들이 주인 의식을 갖도록 뒷받침하겠다고 했고, 전라도와 경상도, 야당과 여당, 좌우와 같은 이념적 대립을 탈피해 국민 통합을 이루겠다고 했다. 피폐한 경제 상황에서의 일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했다. 언급된 여러 가지 이야기 중에 나는 주거 공간을 만드는 국민 주권과 통합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국민 주권 시대에 방법론을 이야기할 때 가장 핵심적인 이야기다.
뉴타운 키즈와 DDP 서울은 도시 공동의 장소의 기억을 삭제하는 것을 너머 그러한 공간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도시이다. DDP가 원래 동대문운동장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20대는 거의 없다. 청계천이 원래 고가도로였다는 사실을, 한강이 백사장이 있고 물이 맑아 수영할 수 있는 강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도 거의 없다. 문제는 한강변이나 청계천이 콘크리트여서 불편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별로 없다는 점이다. 콘크리트 건물에서 태어나 아파트 단지 내 조경을 자연 삼아 자란 세대에게 도시의 과거와 자연을 기억하자는 일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600년 된 도시의 역사를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우리 세대나 다음 세대는 동대문운동장이 어떤 공간이었는지, 청계천이 어떤 공간이었는지 기억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재개발 도시를 움직이는 주체는 무엇일까? 도시를 움직이는 두 ‘시장’이 있다. 하나는 mayor이고, 다른 하나는 market이다. 도시에서 어느 쪽이 더 주인 역할을 할까? 시장(Mayor)이 많은 권한을 갖고 있지만, 마켓의 힘에 휘둘릴 때가 많다. 도시에서 자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재개발이다.
대항하는 정체성 사회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자아 혹은 집단이나 조직의 아이덴티티이다. 아이덴티티는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하는 사람이고, 어떻게 사는 사람인지를 나타낸다. 만약 이것이 지속적이지 않고 매 순간 바뀐다면 그것을 정체성이라 볼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정체성이 항상 동일하고 반복적일 필요는 없다. 정체성이란 상황과 사건을 통해 조정되고 교섭되면서도 지속성이라는 틀을 유지하는 자기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이 정체성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지되고 변화하는지가 사회학이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도시 정치 ‘도시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말이 있다. 중세 시대 신분제에 얽매여 있던 농노라도 도시로 들어가서 1년이 지나면 자유인으로 살 수 있었다. 신분제가 있던 딱딱한 사회에서 도시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공간이었다. 이렇듯 과거의 도시는 자유의 공간이었다. 그렇다면 현대의 도시는 어떨까? 여전히 자유를 주는 공간일까?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자유를 주는 공간이지만 때로는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주기도 한다. 한 예로, 미국 디트로이트시에서는 자동차 산업으로 대기오염이 심각해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병에 걸렸다. 도시가 자유가 아니라 죽음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도시 패러다임은 전환기를 맞고 있다. 고도 성장기의 중앙집권적 방식으로는 지금 도시 문제의 해결책을 찾기가 어렵다고 한다. 새로운 출구를 찾아야 하나, 주택과 토지 그리고 자본은 점점 소수에게 집중되고 있고, 이에 따른 불평등은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여전히 시민 사회의 창의성은 억압되고 지역적 다양성은 간과되며 전통적인 토착적인 지식은 무시되고 있다. 생각만큼 도시의 삶에서 시민 주도, 공정과 평등으로의 변화를 경험하기 어렵다. 서울의 도시정책도 시민 다수를, 특히 힘없고 가난한 시민들을 서울 밖으로, 살던 지역 밖으로 내모는 데 개발 사업과 마찬가지로 도시재생 사업도 일조하고 있다. 세상이 바뀌어도 축출되거나 배제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도시가 서울이다.
『시민의 도시, 서울』은 정림건축문화재단이 2017년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의 일환으로 기획한 시민 교양강좌의 강연을 글로 정리, 편집한 책이다. ‘사회적 자본’, ‘공동의 부’, ‘지역공동체’ 등의 큰 주제를 아우르며 사회학자, 행정가, 건축가, 활동가, 도시학자, 정치가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를 통해 도시의 공공성은 무엇이며, 시민은 어떤 권리와 책임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나눈다.
과잉 사회에 적응 나는 ‘카제테리언Car-getarian’이다. 이 생소한 단어가 무슨 뜻인지 검색할 필요는 없다. 자동차와 채식주의자를 의미하는 두 영문 단어를 합성한, 내가 방금 만든 콩글리시 단어이기 때문이다. 자가용, TV, 스마트폰 또는 신용카드 등 문명사회가 주는 혜택을 당연시하지 않는 약간 유별난 사람들이 공유하는 느슨한 연대감에서 발상한 신조어 정도라고 하자. 가진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발적 결핍을 통한 또 다른 향유를 통해 개인 성향이 드러나는 것은, 역설적으로 과잉된 사회에서 나타날 수 있는 증상이지 않은가. 나는 마치 러다이트Luddite처럼 과격하게 기계를 혐오하는 이도 아니고, 자가용 없이는 살아도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자동차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다 (만약 자동차와 전혀 상관없이 살겠다는 극단적인 이들이 존재한다면 ‘카비건Car-vegan’ 정도로 부르면 좋을 듯하다). 나는 서울에 지천으로 깔린, 미안할 정도로 저렴한 택시를 일주일에 10번은 타고 살며, 친절한 지인들의 자가용을 곧잘 얻어 타기도 한다. 2016년 현재 27년째 면허를 가지고 있지만 운전은 물론 평생 자가용을 소유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은 어느 날 갑자기 대오각성하고 내린 결정이 아니고, 지극히 자연스럽게 다양한 장소에 적응하며 살아온 행적의 결과일 뿐이다. 이 글을 이동성에 관한 나의 구체적인 경험과 발견에 관한 다소 파편적인 소사 정도로 여겨주시면 좋겠다.
서
피터 윈스턴 페레토는 어린 시절부터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살았다. 지금도 다르지 않은 생활 가운데 그는 서울에서의 5년의 경험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했다. 세계의 도시들은 점점 비슷해지기보다는 명확해지고 있다면서 복잡한 층위의 다면적인 정체성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고 말한다. 서울은 어떨까? 그의 서울에 관한 책 『플레이스/서울』을 통해 이야기해보았다.
인구 천만의 거대 도시 서울은 인구밀도의 적정선을 넘어선 지 오래다. 정치지리학자 임동근은 도시 인구 증가는 필연적으로 그 도시를 메트로폴리스로 만드는데, 그 순간을 결정하는 힘들이 무엇인지 한 권의 책으로 정리했다. 국가의 재산과 권력은 과거 영토에서 인구로 그 중심과 중요도가 옮겨졌고, 인구 통치술은 봉건제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모르는 사이 매우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메트로폴리스의 어원을 따라가면 ‘모母도시’라는 뜻이 있는데, 그렇다면 서울의 식민도시는 어디일까? 라는 흥미로운 질문으로 시작하는 이 책을 중심으로, 오늘날 서울의 통치술은 바른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는지 임동근 박사께 들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