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서울여자대학(강당, 학장공관), 서울 대광고등학교(과학관, 강당), 서울 나진산업 용산 화물센터(계획안), 서울 운화교회, 서울일신방직공장, 인천금호동 H씨댁, 서울
위치서울시 관악구 서울대학교 내규모지하 1층, 지상 6층연도1988 서울대학교 선경경영관은 1980년대 정림의 주요한 디자인 유형 중 하나다. 차분하고 인간적인 스케일이 어울리는 교육 시설의 차분한 분위기와 스케일에 적합한 붉은 벽돌을 적용했고, 이는 영락고교 교사동(1981)에서도 사용한 바 있다. 창호 디테일에 의장적 요소를 도입하되, 과장된 형태나 고전적 요소의 직접적인 차용보다 디테일의 레벨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 이미지를 도입했다.
설계김정철, 김진구위치경기도 용인군 내사면대지면적55,070m²건축면적546.8m²연면적1,107.1m² (or 1,167m²)규모지상 3층구조철근콘크리트조외부마감제물치장콘크리트 (노출콘크리트)연도1987 건물이 자리 잡은 지역은 용인군(당시) 내로서 전형적인 우리나라의 산지 지형을 이룬 곳이며, 약 1.5km의 골짜기 진입로를 지나야 비로소 건물이 보이게 되는 산속이다. 건축계획의 기본 목표는 순교신앙의 전승이라는 건립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 장소가 종교적 잠재력을 갖도록 하는 것이었으며, 건축적으로 집약된 표현성을 갖도록 하는 것이었다.
설계김정철, 김창일설계자채재학위치서울시 서대문구 신촌동 연세대학교 내대지면적11,048m²건축면적3,110.41m²연면적9,907.91m² (or 9,908m²)규모지하 1층, 지상 3층구조철근콘크리트조, 철골트러스조외부마감화강석 버너구이 및 혹두기연도1985설계기간1985.11-1986.6준공1988.3 연세대학교 캠퍼스의 상징 축인 백양로와 광혜원 및 제각에서 연장되는 의료시설군 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다. 역사적 의미의 성격과 주 진입로에서의 강한 정면성이 요구되었다. 박물관과 강당이라는 서로 다른 성격을 구심적인 로툰다로서 기능과 동선을 분리하고, 또한 하나의 건물이라는 공간적 일체감을 부여하도록 했다. 이 로툰다는 건물의 주 공간이며, 박물관의 홀과 강당의 로비와 함께 각종 행사가 이루어지는 복합적 기념성을 표출하고자 했다. 외관은 화강석을 정교히 다듬어 사용했고, 중앙에 유리 부분을 강조하여 기념성과 격조를 높이면서 흡입성과 포용성을 갖도록 디자인했다.
설계김정철, 김창일계획담당최태용, 김광출, 이형재구조담당배원태기계담당추영래전기담당문전기위치서울시 종로구 당주동 2호, 4호의 38필지건축면적1,861.13m²연면적33,446m²규모지하 4층, 지상 14층, 옥탑 2층구조철골철근콘크리트조주요설비중앙공급 냉난방, GAS 냉온수기외부마감PC판 위 자기질 타일, 알루미늄새시(프로로폰), 열선반사유리내부마감대리석, 화강석, 암면흡음텍스, 비닐카페트, 수성페인트연도1983 세종문화회관 후면 광장에 면해 있으며 도심지 환경을 개선하고자 하는 서울시 재개발사업의 하나이다. 사업성 제고를 위해 사선제한의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용적을 확보했으며, 이로 인해 불균형해진 건물 외곽선을 전체적 매스 표현의 정제를 통해 해결했다. 선명하고 대담한 색상의 외장타일과 반사유리의 대비적 질감을 교차하여 표현한 수평선의 강조를 통해 매스 전체를 결속하고 있으며, 회색의 도시환경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외부 공간에 조화된 환경조형물은 건축과 하나가 되어 시민들에게 친근감을 주는 환경을 만들었다.
설계김정철위치전북 전주시 다가동대지면적3,001m²건축면적1,057m²연면적2,820m²규모지하 1층, 지상 3층외장재붉은 벽돌 치장쌓기연도1979준공1983.12 전주시의 전통적이고 정정한 가로 분위기와 친화감을 갖도록 특별한 축선과 정면성이 없는 조소적 형체의 건축을 시도했다. 벽돌이 모여 작은 매스를 이루고, 이 작은 매스가 모여 하나의 교회 공동체의 형태를 이룬다. 이러한 조형은 8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이 교회의 고난의 발자취를 상징한다. 내부는 강단 상부의 종탑에서 쏟아지는 빛이 예배 공간의 정점인 말씀의 자리를 더욱 신성화시키고, 창에서 흘러들어온 부드러운 채광과 더불어 신앙적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광장에 복원 배치된 옛 종탑은 친교의 외부 공간을 더욱 구심화시킨다.
위치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27-2대지면적9,917m²건축면적3,467.43m²연면적41,570.47m²규모지하 3층, 지상 20층, 옥탑 2층구조철골철근콘크리트조, 철골조내부마감PC커튼월 및 유리커튼월, 화강석 건식 붙이기시공(주)금강건축주사립학교 교직원, 연금관리공단준공1982 사학연금회관은 여의도에 위치한 고층 오피스로, 저층부 포디엄과 고층부 사무실이라는 정림건축의 오피스 도식이 다르게 변주된 작업이다. 또 철제 멀리언으로 정면 커튼월을 구성하면서 측면은 화강석으로 마감한 방식은 외환은행에서 시작된 정림건축의 오피스 작법의 한 단계를 보여준다.
위치대구시 수성구 수성동연면적29,226m²규모지하 2층, 지상 18층연도1979 대구시의 새로 계획된 간선도로에 면하고 있으며, 지역 금융과 장소성의 의미를 갖도록 고층화시켜 랜드마크로서 도시 공간의 공공성을 제공토록 했다. 건축 공간에 담겨진 제 활동을 사적, 반사적, 공공적 성격으로 구분하여 내·외부 공간을 구성했으며, 이들은 상호 관입되고 교호되어 공간의 흐름을 적극 표출한다. 대지 내에 적극적인 공공 공간을 확보하고 저층부와 고층부 사이에는 선큰 가든을 두어 대지의 포용력에 순응하는 계획으로 땅과의 밀착성을 높였다. 투명성과 솔리드, 포디엄과 타워의 대비적 요소와 구조 방식과 연결되는 조형은 복합적 구성을 통한 다의적 표현을 추구하고 있다.
여러 공장의 사택단지를 통해 집합주택에 관한 설계 경험을 축적해온 정림건축은 1970년대 말부터 한국주택공사와 협업하기 시작했다. 둔촌주공과 도곡주공아파트의 평형별 평면을 설계했으며, 이후에는 주택공사의 프로젝트 가운데 고층 아파트를 주로 작업했다. 한남외인아파트, 과천주공아파트의 고층 유형이 대표적인 예다.
1975년부터 1982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수행한 계획안으로 정림의 은행에 대한 어휘인 영업장의 포디엄과 사무동 타워 부분의 구성이 각기 다른 환경적 특성을 지닌 대지에 일관되게 적용되고 있다. 1975년 현상설계에서 1등 당선된 이래 이전 계획의 변경에 따라 일련의 작업이 수행되었으며, 모두 실현되지는 않았다.
위치서울시연면적1,553m²규모지하 1층, 지상 2층연도1974 정사각형 평면의 대각선 방향으로 공간의 초점을 모아 정중하고 친근감 있는 예배 공간을 형성하고, 내부에 잠재된 공간감을 그대로 조형 이미지와 연결했다. 도심 관통 도로의 한가운데 부상하는 종탑은 본당과 더불어 강한 신앙적 조형성을 표출했다. 내부마감은 적벽돌을 사용하여 빛에 의한 시원적 분위기를 연출했다.
설계김정철, 김창일위치서울시 중구 을지로2가대지면적11,722m² (or 11,715m²)건축면적3,924m² (or 3,399m²)연면적74,750m² (or 74,745m²)규모지하 3층, 지상 24층구조철골철근콘크리트조외장재PC판 위 자기타일, 화강석(브라질산)연도1977설계연도1977.12 준공1980 명동 지구 재개발사업의 일환으로 계획되었으며, 1973년 현상설계 당선으로 시작되었다. 국제적 은행으로서의 성격과 을지로 도시 패턴 형성의 시발점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고층부 사무실과 랜드마크적 포디엄 영업장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는 은행 본점 건축의 하나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진다. 선큰 가든의 첫 시도로 지하 공간을 개방, 활성화하고, 보안을 건물 자체에 국한시켜 담장을 없애고, 옥외 공간을 지역에 공개하여 도시 공간화를 실현했다. 외부 공간에는 환경 조각물을 디자인 요소로 사용하여 품위와 즐거움을 더했다. 외장은 브라질산 화강석과 진달래색의 타일로 마감되어 온화하고 생동감 있는 느낌을 준다.
위치인천시연면적2,708m²규모지하 2층, 지상 2층연도1968 인천항으로 접근할 때 첫눈에 띄는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인천 개신교의 상징적 위치를 점하고 선교 1세기를 향한 역사성을 간직한 교회로, 등불과 같은 역할을 가지도록 의도했다. 종탑과 예배당을 일체로 묶어 하늘을 향한 믿음을 표현하고 하늘의 소망을 지향한 듯 세모진 지붕 선이 종탑으로 모이고 십자가로 정점을 이루어 바다에서는 물론 인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도록 계획했다. 예배 공간은 설교단을 구심으로 평면과 공간이 모이며 이는 외관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설계김정철위치서울시 용산구 후암동연면적1,370m²규모지하 1층, 지상 3층, 예배당 600석연도1967 단순한 형식과 청순한 정신은 초기 기독교 시대를 연상케 한다. 설계 당시 재래의 교회 양식을 탈피하면서 장로교의 기능, 교회의 음향효과, 채광 방식의 조화를 통한 영적인 내부 분위기의 조성을 시도했고, 성가대의 위치를 제단 후편에 두어 새로운 예배 공간을 구성하였다. 내부 공간은 바실리카적 단면 형태로 좁고 높은 네이브 부분은 한층 더 엄숙하게 메시지를 전하는 공간이 되고 있으며, 기둥을 노출시켜 구조미를 강조하고 있다. 측벽의 변색 벽돌 릴리프는 산상보훈을 양각시킨 것으로 음향효과도 고려하여 계획되었다.
인터뷰 김창일 연세대학교 건설공학과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ROTC 1기 공병 장교로 군 복무 시에도 건축 실무를 익혔다. 한국은행을 거쳐 1967년부터 정림건축에서 48년간 재직하며 사장을 역임했다.
인터뷰 권도웅 한양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1967년 정림건축에 입사해 44년간 근무하면서 1995-1998년 사장을 쳐서 2012년까지 정림건축 상임고문과 기술연구소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서울 YWCA 고문과 한국 HABITAT 고문이다.
이 글은 김정철의 일대기도 정림건축의 첫 20년에 관한 밀도 있는 비평도 아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겪고 60년대에 창업해 국내에서 가장 큰 설계사무소를 일군 한 인물의 전기를 쓰기 위해서는 개인사에 대한 내밀하고 세세한 정보가 무엇보다 필수적이다. 그러나 20세기 한국의 역사는 각종 문서와 자료를 충실히 챙기고 보존할 여유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다. 김정철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헤쳐온 시대를 증언해줄 수 있는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생전에 남긴 미공개 회고록과 몇 장의 사진이 전부다. 창업자의 정보가 이렇게 소실되어 가는 동안 정림건축 초기의 많은 자료 역시 망각의 늪에 빠졌다. 다행히 주요 작업에 관한 슬라이드 필름과 마이크로필름이 남아 있었지만, 대형 설계사무소가 어떻게 운영되고 몸집을 키워냈는지 확인하기에는 부족했다. 제출과 함께 사라진 현상설계안뿐만 아니라 각종 상세도면, 직원 명부와 조직도 같은 회사가 생산한 문서를 충분히 살펴볼 수는 없었다. 이 부재는 한국 현대 건축사 서술의 조건과 같다. 대단히 파편적이고 불연속적인 단서와 정보들의 불완전한 조합이다. 이 글도 마찬가지다. 김정철 개인사의 주요 지점을 한국 현대사의 문맥 속에서, 초기 정림건축의 주요 분기점을 한국 현대 건축사의 흐름 속에서 읽어보고자 했다. 이 짧은 에세이는 직소퍼즐을 맞출 때 제일 처음 놓는 몇 개의 조각일 뿐이다.
건축가이자 정림건축과 정림건축문화재단 설립자인 김정철 선생은 2010년 9월 27일 새벽에 타계했다. 향년 79세. 어느덧 7년이 지났다. 그의 뜻에 따라 다음 해 4월 26일 정림건축문화재단이 설립됐다. 그는 평생 신앙인으로서 ‘청지기의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 복음에 빚진 자로서 한빛누리재단에 이어 정림건축문화재단을 만들어 나눔을 실천한 것이다.
샤르트르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에는 네 명의 위대한 히브리 선지자 어깨 위에 사복음서 저자들이 앉아 있다. 그 어깨 위에서 비로소 구약의 선지자들이 열망했던 메시아를 볼 수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고전 물리학을 완성한 뉴턴도 “내가 멀리 바라볼 수 있었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섰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 꼭 거인이 아니어도 누군가의 어깨 위에 서 있는 셈이다. 앞서 걸어갔던 사람들이 모두 후대에 기릴 만한 유무형의 유산을 남긴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선조들의 유산 덕에 모든 일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인류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이렇게 선대들의 노고와 그 결과로 남겨진 유산 덕분이다. 그러므로 만약에 후대에 뭔가를 남기고 싶은 사람은, 반드시 자신이 서 있게 된 ‘어깨’를 잘 이해하고, 때로는 해석하고, 그리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