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성 ≠ 한국성 ≠ 전통성 ≠ 지역성
강림, 겜돌이, 곰, 냥꾼, 닥터페퍼, 쪠, 채운, 천하장사
분량12,139자 / 24분
발행일2026년 10월 26일
유형대담
잡담회는 첫 번째 읽을거리로 키워드의 ‘프리츠커상’을 골랐다. 이 키워드는 2024년 3월, 야마모토 리켄의 프리츠커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이후 국내 건축계에서 되풀이된 한탄과 자성을 계기로 연관된 글들을 묶어 발행됐다. 그로부터 2년 뒤 엡스타인 파일 논란으로 프리츠커 재단 내부 문제가 불거진 시점에 잡담회는 프리츠커상의 의미, 그것의 변화와 상 제도, 지역성 등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 일시: 2026년 3월 8일 일요일 오후 1:30 – 4:00
- 장소: 정림건축문화재단 라운지
- 참석: 강림, 겜돌이, 냥꾼, 천하장사, 채운, 쪠, 닥터페퍼, 곰
차례
지역성 ≠ 한국성 ≠ 전통성 ≠ 지역성
강림: 야마모토 리켄의 경우에는 그 지역의 공동체, 그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반면 라카통 앤 바살은 그 지역이 처한 물적 조건, 가능한 개입의 범위에 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 같고요. 이를테면 라카통 앤 바살에게는 한 지역의 프로젝트에 주어진 예산조차도 일종의 지역성이에요. 이처럼 건축가마다 지역성을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요. 또 지역성은 저희가 이전부터 많이 이야기했던 한국성에 관한 논의와 얽혀 있기도 해요. ‘지역성은 정치적 혹은 문화적 용어이다’를 읽고 느꼈던 것 그리고 지역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해요.
저는 임근준의 말이 신기했어요. 지역성은 결국 랜드마크와 같은 개념이라는 것이죠. 지역성을 국제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합리화 담론으로 쓰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비판했어요. 사실은 동전의 양면인데 말이죠. 궁극적으로 따지자면 장소특정적인 것이 아닌 건물이 없다는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 장소성을 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이었어요. 굉장히 흥미로운 견해였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읽었나요?
겜돌이: 저는 황두진과 임근준의 대화에서 ‘지역성’을 ‘전근대성’과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 아니냐는 물음이 나온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임근준은 왕슈와 승효상을 같이 이야기하면서 그들이 표현하는 지역성이 전근대성에 머물러 있다고 비판했고, 저는 그 의견이 유의미하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떠올리는 지역성이나 한국성은 전근대성에 가까운 것 같아요. 황두진의 말처럼, 예를 들어 지역 축제는 보통 그 지역에서 전근대적 시점에 존재했던 문화를 축제의 요소로 디자인하는 것이잖아요? 전근대적인 지역성에는 이제 한계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이 좌담이 있었던 것이 2012년이에요. 당시에 그러한 문제의식과 비판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한국에서 지역성이 소비되다 보니 결국에는 지역성에 대한 논의 자체를 상실하게 된 것 아닐까요? 전근대성을 긍정하기는 어려워요. 현대에 보편적으로 적용하기도 어렵고요. 한국의 지역성, 그러니까 한국성이 한국의 전통, 전근대에서 발견되는 어떤 미학적인 것이라면, 논의할 가치가 없는 것처럼 여겨져요. 그런 논의는 결국 자연스럽게 소멸하게 되지 않을까요?
라카통 앤 바살이 이야기하는 지역성이 현대 사회에는 더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보편적인 적용도 가능하고요. 그렇지만 제가 쓰는 지역성이라는 용어 자체도 이미 한국 건축계에서 학습한 것이고 전근대성에 어느 정도 기대고 있기 때문에, 라카통 앤 바살의 태도를 지역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남아 있어요. 라카통 앤 바살의 지역성은 결국 인터내셔널한 것이 아닐까요? 그것을 지역성이라고 볼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요.
강림: 임근준이 비판하고 있는 것 중 겜돌이가 전근대성이라고 일컫는 것을 또 다른 말로 하자면 ‘민족성’인 것 같아요. 결국에는 그게 민족적인 담론인 것이 아니냐는 것이죠. 지역성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마다 가장 듣기 싫은 단어가 ‘우리’예요. “우리가 편하게 느끼는 비례” 이런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짜증이 나요. ‘나는 그 ‘우리’가 아닌데 왜 자꾸 우리라고 하는 거야? ‘너희들’이지 왜 자꾸 나를 포함시켜?’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 식으로 논의를 몰고 가는 것에 동의할 수가 없어요.
겜돌이: 맞아요. 지역성을 ‘우리’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추상적인 개념으로 연결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마당을 한국적인 것이라고 많이 이야기하지만 현대의 주거에서 마당을 적용하기 어려울 수 있어요. 그리고 현대 건축물에 마당을 만들어두면 그 건축물이 한국성을 반영한 건축물이 되는 걸까요? 마당을 ‘비워져 있는 공간’이라고 정의한다면 마당이 한국적인 것인지도 의문이에요. 훨씬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페터 춤토르는 건축물의 생산 과정에 있어서 지역에 있는 재료를 최대한 사용하려 해요. 운송 가능한 지역 재료들의 형태를 미학적으로 풀어내요. 지역성은 결국 이렇게 구체적인 행동으로 제시되어야 하는 것 같아요.
강림: 결국 배형민의 입장인 것이죠. 지역성을 일종의 실천 체계로 봐야 해요. 관념적이고 담론적인 것을 지역에 앞세우는 순간 함정에 빠져요. 라카통 앤 바살이나 야마모토 리켄과는 조금 다르지만, 시게루 반처럼 지역을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을 수도 있어요. 지역성을 어떤 형태, 조형의 관점에서 보지 말고 그 지역이 처해 있는 상황에 건축가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의 관점에서 보자는 것이죠. 지역에 있는 어떤 형상, 형태, 재료를 재생산하려고 하니까 지역성이 문제 있는 개념이 되는 것 같아요. 저는 지역의 분위기나 공간처럼 추상적인 것도 재생산하려는 순간 문제가 되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재현하는 순간 그것은 지역이 처한 상황, 현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게 되는 것일 수도 있어요.
채운: 저도 라카통 앤 바살의 인터뷰가 인상깊었어요. 그리고 저희는 이미 다소간 세뇌가 되어버린 것인지도, 너무 익숙해진 것인지도 몰라요. 한국에서는 지역성과 전통성이 혼용되어서 쓰이고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그 지역에 있는 재료를 쓰거나 그 지역의 형태를 차용해서 쓰는 방법은, 제게는 지역적이라기보다는 전통적이라고 느껴져요.
강림이 말한 ‘지역 상황’을, 저는 어떤 일정한 생활 양식을 공유하고 있는 바운더리로 이해했어요. 그 지역 사람들 삶의 방식에 도움이 되는 것, 그 지역 사람들이 원하는 것, 건축가가 자기 가치관 안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 이 세 가지를 추구하는 것이 지역적인 태도 아닐까요? 그 바운더리가 국가가 된다면 한국성이 되는 것이고요.
겜돌이: 저는 지역성의 총합이 한국성일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지역 간의 서로 다름이 합쳐질 수 있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어요. 한국성은 결국 지역성과는 별개로 우리가 찾아야 하는 무엇일 것 같아요. 물론 ‘찾아야 한다면’이라는 전제가 있지만요. 지역성과 달리, 한국성은 전통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한국성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무거워요. 그 무게감 있는 인상에 걸맞아지려면 변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야 절대다수가 공감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것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지역성이 변화무쌍하다고 봐요. 건축가가 그 지역에서 나오는 재료를 쓴다고 해도 지역성은 변화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지역의 재료를 사용하는 것 자체는 전통성일 수도 있어요. 같은 재료라도 어떻게 쓰는지가 달라질 수 있잖아요? 목재처럼, 과거에는 구조로 썼던 재료를 구조에서 벗어난 다양한 방식으로 쓸 수도 있을 테고요.
채운: 그러니까 저도 지역과 전통, 그 둘을 분리시켜서 생각하고 싶다는 입장이었어요. 한편, 대도시일수록 지역에 따른 차이가 많이 없어지고 있잖아요? 전근대에는 지역성이었던 것이 오늘날 대도시에서는 전통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어요. 겜돌이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겜돌이: 네.
강림: 『의심이 힘이다』에서 최문규가 ‘지역으로 보자면 자신은 한국 건축가가 아니라 서울 건축가’라고 했죠. 이야기가 약간 관념적으로 뻗어 나가는 것 같네요? 다시 돌아와야겠어요.
라카통 앤 바살 다시 읽기
강림: 저는 ‘같은 예산으로 두 배로 크고 밝은 공간’에서, 라카통 앤 바살에게 광장 리노베이션 프로젝트가 들어왔을 때, 그들이 찬찬히 살펴보고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인상 깊었어요. 그리고 예산에 관해서 계속 강조하는 것 같아요. 형태에 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것이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심지어 그런 말을 하잖아요? 자신들의 건축은 미학적 문제가 아니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건축물은 대단히 아름다워 보여요. 이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쪠: 저도 그 글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고, 공감하면서 읽었어요. 사실 건축은 내가 좋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주변의 환경을 많이 생각하면서 해야 하는 일 중 하나인 거잖아요? 라카통 앤 바살은 미학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미학적인 것을 뛰어넘은 것에 가까워요. 미학적인 고려는 깔려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주변 환경이나 시민 등을 고려해서 뭐가 더 나은지를 판단하는 거예요. 라카통 앤 바살이 프리츠커상을 받았다는 사실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건축이 형태적인 것을 넘어서, 형태적인 것은 바탕으로 두고, 그 위에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를 던져주는 느낌이에요.
한국 건축가들도 분명히 주변 환경을 고려하면서 설계할 거예요. (아, 아닌 분들도 당연히 있겠지만….) 그래도 저희 세대의 건축가들은 주변 환경에서 받아들인 것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한다고 생각해요. 똑같은 이야기지만, 지역성 담론이 생기기 위해서는 받아들인 것을 표현해야 해요. 표현했을 때에야 어떤 이야기가 되고, 그런 이야기가 모이고 모여서 하나의 큰 줄기가 생길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겜돌이는 한국성이 무겁다고 했지만, 한국성을 무겁게 생각할 필요도 없어요. 내가 생각을 솔직히 표현했을 때 나오는 그 표현이 저에게는 한국성일 수도 있어요. 남들이 생각하기에 한국성일 수도 있고요.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이렇게 방향을 정하는 것도 한국성이 될 수 있어요. 먼저 정의를 내리려고 하다 보니 이상한 상황이 되는 게 아닐까요? 라카통 앤 바살의 글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저희가 시대의 흐름을 더 발 빠르게 따라가야 할 것 같다는 것이었어요. 라카통 앤 바살은 이미 관통했어요. 저희는 아직도 형태, 지역의 재료, 물성 이런 데에 생각이 멈추어 있어요. 조금 더 저희의 삶과 연결된, 더 다양하고 넓은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모두: (동시에) 저는….
겜돌이: 오늘 제가 지분이 많네요? 저는 라카통 앤 바살의 글을 읽고 프로젝트들을 검색해 봤는데, 너무나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보고 떠오른 다른 글이 있었어요. ‘토대와 방향이 부재한 한국 건축에 묻다’인데요. 김인철과 이필훈의 대화 말미에 김인철이 “‘아트’(art)라는 단어는 예술에 앞서서 기술이라는 뜻을 가진다. 기술에 도가 트면, 기술을 초과하면 예술이 된다”고 말해요. 저는 라카통 앤 바살의 작업을 보면서 딱 그 말이 떠올랐어요. 기술에 도가 터 있기 때문에, 기술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것만으로도 예술까지 나아가요. 그게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라카통 앤 바살의 실천적 행위 자체가 가지는 의미가 매우 커요. 한국에서는 이런 건축가들을 보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세계 어디나 다 어렵겠지만요. 이런 논의나 이야기들을 지향점으로 삼는 건축가들이 많이 등장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강림: 『미로』 4호에 수록된 이세웅의 글 ‘무구한 마음의 영원한 햇살’과도 공명하는 것 같아요. 예술과 기술이 결합되어야 하는데 한국은 예술로 기술을 회피하려고 하거나 기술로 예술을 회피하려고 한다는 것이죠. 겜돌이가 같은 것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 같아요.
건축의 모든 부재를 장인이 만들었던 시기도 있었죠. 물론 보편 건축, 민중들의 건축은 그렇지 않았지만…. 교회 같은 것을 떠올려보면 모든 부재를 장인이 만들어요. 당연히 예술적 아름다움이 있어요. 그런데 지금은 건축의 모든 부재가 공장에서 생산되거나 작업자들이 현장에서 간략히 만들어요. 공장에서 온 시멘트로 콘크리트 벽을 세우고 영등포에서 만든 문을 집어넣고 독일에서 만든 도무스 손잡이를 다는 식이에요. 기술적 산물의 예술이 되었어요. 대량 생산된 기술적 복제품들을 가지고 건물을 지어야 해요. 그러다보니 건축물이 어떻게 ‘예술’로 받아들여져야 하는지 난감한 지점이 있어요. 쉽게 말해, 다 대량 생산된 것인데 내가 한 것은 예술이라고 주장해야 해요. 가장 안 좋은 전략이 작가성으로 돌파하는 거예요. ‘내가 만든 건 비례가 다르다, 네가 콘크리트 벽을 아무리 써봤자 이 느낌은 안 나온다’ 이런 식이에요. 한국에서 많이 듣는 표현이죠? 그런데 라카통 앤 바살은 그런 언어를 거의 쓰지 않아요. 건축에서 건축가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저는 그 인터뷰가 특히 좋게 느껴졌어요.
닥터페퍼: 저도 ‘같은 예산으로 두 배로 크고 밝은 공간’이 좋았는데,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건설업의 절대적 파이가 작은 한국 건축가가 라카통 앤 바살처럼 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어느 프로젝트를 포기하는 그런 행위가 가능할까요? 한편으로는 ‘단가가 안 맞았나?’ 이런 심술궂은 생각도 들어요.
강림이 말한 것에 대해서는, 저는 어떻게 바라보느냐면, 건축가가 하는 일은 큐레이팅이나 편집과도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작가성을 앞세우는 것은 이상해요. 그렇다고 해서 작가성이 없다고는 말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편집이나 큐레이팅에도 편집자나 큐레이터의 의도가 담기잖아요? 그 의도로 인해서 생기는 작가성은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냥꾼: 저희는 지역성을 미리 찾아놓고 무언가를 만들어 가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애초에 지역성이나 한국성은 결과물로서 나중에 오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라카통 앤 바살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사실 프로젝트에서 육하원칙이,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가 정해지고 나면 자동적으로 결정되는 것들도 있다고 생각해요. 라카통 앤 바살이 이야기한 예산 같은 조건들을 모두 포함해보면 사실 프로젝트의 윤곽은 어느 정도 정해져요. 그 정해진 한계를 논리적으로 돌파해 나가서 마지막에 나오는 것, 그것은 결과적으로 지역성을 가진 어떤 것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 과정에서 ‘이런 지역이니까 이런 형태로 가자’와 같은 접근은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요. 라카통 앤 바살은 어쨌든 이런 절차를 밟아서 결과적인 지역성으로 가려고 하는 건축가인 것 같아요.
라카통 앤 바살이 건축적 미학에 신경을 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이유도 간단한 것 같아요. 아름답다는 것 자체가 사실 주관적이고 애매한 감정이에요. 그렇지만 우리가 호모 사피엔스로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어떤 아름다움은 일반적으로 생존에 관한 것이거나 아주 합리적인 것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그런 것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호모 사피엔스들만 살아남았다고 생각해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라카통 앤 바살의 결과물은 생존에 관한 최소한의 것만이 남아 있고, 아주 합리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게 아닐까요?
채운: 인터뷰를 보면, 애초에 라카통 앤 바살이 지역성을 추구하는 프로젝트를 지향한 것도 아니에요. 그 지역에 있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 법규, 예산을 고려하다 보니 그 지역에 자연히 녹아든 것에 가까워요.
곰: 어떤 건축가를 ‘지역적인 건축가’라고 분류할 때 생기는 문제 같아요. 지역을 아예 무시하고 건축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어떤 건축가나 작품을 향해 ‘지역성을 띤다’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그 지역의 바깥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지역 안에서 지역성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요?
냥꾼: 저는 지역성이라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거나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지역성을 결과물로 인식하고, 함께 해석하고 이야기할 때 더 의미가 있다는 쪽이에요. 나중에 지역 내에서 판단할 수는 있지만, 지역성이 결과물을 만드는 수단이 되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강림: 배형민의 말을 경유해보면, 결국 보편적인 것이 동시에 지역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라카통 앤 바살도 지역에 따라 다른 방법론을 쓰지는 않는 것 같아요. 연구해서 찾아둔 같은 방법론을 상황에 맞게 구사하는 것에 가까워요. 한옥은 목구조 모듈러 시스템이기 때문에 본질상 보편적이에요. 그렇다고 한옥 전반을 ‘보편적이고 인터내셔널한 건축’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지역성을 태도, 그러니까 그 지역에 얼마나 밀착하는지, 혹은 어떤 특수한 생각을 했고 어떤 방식으로 그 생각을 구체화했는지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평면도나 입면도를 보고 ‘이 건물은 지역적이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해요. 구축되기까지의 사유와 과정까지 알아야 판단할 수 있다고 봐요.
예를 들어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도 얼핏 인터내셔널해 보이잖아요? 그런데 알고 보면 너무나 지역적인 건축물이에요. 그 과정을 살펴보면, 클라이언트랑 조율하는 과정도 있었고, 건물의 해체에 대비해야 하기도 했고, 그런 상황에서 뒤쪽의 뷰를 열어줘야겠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그런 특수한 생각들이 섞여 있기 때문에 그 건축물은 지역적인 것이에요. 설령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제게는 그렇게 보이기도 합니다.
후담: 엡스타인 파일
강림: 시작하면서 말했듯, 프리츠커상의 수상 기조가 변했다는 사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기조가 ‘프리츠커상이 조금 더 윤리적이 되었다’고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원래는 저명한 건축가들한테 주었었는데 이제는 실천적인 건축가들한테 주니까 상의 윤리성이 보증된 것이 아니냐는 식이죠. 저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번의 엡스타인 논란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어요. 어쩌면 프리츠커상이 가지고 있는 윤리적 이미지조차도, 프리츠커상이 서구 담론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겨 주지는 못하는 듯했어요. 개인적으로는, 지금은 프리츠커상을 거부하는 것이 더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프리츠커상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을 마지막으로 한 번씩만 언급해 주시고 마무리하면 될 것 같아요.
쪠: 서구의 담론이라는 이야기에 공감해요. 디즈니가 〈백설공주〉에서 백설공주 역에 라틴계 미국인 배우를 캐스팅했잖아요? 그런 것이 서구의 선민의식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아시아에서는 그래도 일본이 좀 괜찮지’ 이런 느낌을 받을 때도 있고요. 비서구 지역에서 그런 건축가들을 뽑아서 상을 주는 것은 사실 쉽다고 생각해요. 확고한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누가 봐도 인정할 만한 성취를 낸 사람은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프리츠커상은 큰 의미를 가지지 않아요. 다만 한국인들이 프리츠커상 수상자가 계속해서 없는 상태 혹은 갑자기 생긴 상황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느냐가 의문인 거죠.
다만, 김연아가 피겨 스케이팅을 하기 전까지 한국은 피겨 스케이팅에 관심도 없었잖아요? 그런데 김연아 같은 사람이 한 명 나오고 난 이후에는 누가 큰 상을 받지 못하더라도 누가 잘하고 있는지를 가끔 찾아봐요. 그런 것처럼 수상자가 나온다면 건축계 바깥의 분들이 건축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요?
강림: 내적으로는 딱히 의미가 없겠지만 외적인 효과는 있을 것이다?
쪠: …내적 의미도 있지 않을까요?
닥터페퍼: 저는 작가와 작품을, 혹은 작가의 윤리성과 작품의 윤리성을 분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럼에도 이번에 터진 사건을 든 생각은, ‘프리츠커 회장이 설마 프리츠커상 심사하는 데에 입김을 넣었겠어?’라는 생각이었어요. 본능적으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 제 자신을 보고 반성했어요.
한편, 이 사건으로부터 쇄신하기 위해서 어떠한 다음 행보를 이어 나가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비윤리적인 오너가 있다는 그 오명을 씻기 위해서는 프리츠커상이 더 엄격히 수상자를 선발해야 한다는 입장이에요. 그리고 계속해서 말이 나왔지만, 수상 자체가 상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될 거예요. 겜돌이가 말했듯 주변의 인정으로, 강림이 말했듯 성찰의 계기로, 쪠가 말했듯 외부적인 관심을 끌기 위한 하나의 도구 정도로 활용한다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채운: 공감해요. 누군가 수상한다면 그 이슈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 자체만으로도 한국 건축 문화에 있어서 긍정적인 사건이 될 거예요. 지금 있는 그 불미스러운 사건과 별개로요. 저도 닥터페퍼랑 비슷하게,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음에도 오히려 ‘뭔가 프리츠커 회장과 프리츠커상이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기사를 읽거나 인스타그램 글들을 보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그 상이 있기를 바라는 것 같아요. 여전히 프리츠커상이 가치 있고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상이기를 바라요. 문제를 잘 해결한다면 오히려 좀 더 공신력이 있지 않을지 생각했어요.
곰: 저는 미쉐린 스타 같은 제도가 건축계에서 생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어요. 프리츠커상은 한 명한테 그냥 주잖아요? 그런데 미쉐린은 그런 개념이 아니에요. 매년 유지해야 하는 것이고, 스타를 유지하기 위해서 팀이 항상 공동의 정신을 가지고 일한다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공감하고요. 결과적으로는 미쉐린 타이어라는 회사에서 시작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업계에서는 굉장히 인정받아요. 그래서 한국 건축계에 그런 제도가 생겨도 재밌을 것 같아요.
갑자기 〈흑백요리사〉도 떠오르네요. 저는 〈흑백요리사〉를 보면서 요리사들에 대해서, 요리 업계에 대해서 좀 더 알게 된 것 같아요. 공감하게 되었고, 요리사라는 직업이 멋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말하자면 요리사라는 프로페셔널을 제가 이해하게 된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식당 하나를 가도 요리사들이 볼만한 부분까지 보려고 하는 것 같아요. 건축에서도 이런 계기가 생기면, 사람들이 흔히 지은 건물을 하나를 보더라도 건축에 관한 생각들을 하게 될까 기대돼요.
겜돌이: 건물도 매해 나이가 들어갈 테고 그것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노고도 분명히 있을텐데, 미쉐린이 매년 갱신하는 것처럼, 건축상도 그런 노고에 좀 더 주목하면 좋겠어요. 건축물이 살아가는 일생을 평가하는, 가치를 판단하고 긍정적인 부분을 발굴해주는 상이 있으면 좋겠네요. 건축의 생애 주기 전반을 다루는 상들이 찾아낸 이야기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건축상이 결국 건축가 개인에게 주어진다면, 건축가에게 특권적인 지위가 부여되는 것은 피할 수 없어요. 물론 한 건축가가 기울였던 노력에 대한 보답이 될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그 건축가의 정치적 위치를 더 공고히 해 주는 수단이 될 수도 있어요. 건축상이 주는 영향력이 어떻게 재편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되네요.
냥꾼: 다들 많이 이야기해 주셔서 새로운 의견은 없어요. 저도 겜돌이가 말했던 것처럼 상 자체가 가지는 그 속성이 있다고 봐요. 극소수만 비추어주고, 사실 그 극소수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말해주지 못해요. 상을 받았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 되거나 훌륭한 건축가가 되는 것도 아니고요. 상을 못 받았다고 해서 훌륭하지 않은 건축가인 것도 아니에요. 그럼에도 상을 딱 주는 그 순간에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무언가가 생기는 것 같아요.
상이라는 제도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프리츠커상에 관심도 크게 없어요. 하지만 오늘 이야기하는 것만 들어보아도, 프리츠커상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었어요. 프리츠커상과는 별 상관없이 훌륭한 건축 문화가 있는 곳에서 우리끼리 떠드는 날이 왔으면 해요.
곰: 저도요.
천하장사: 이번 엡스타인 사건을 보고 프리츠커상의 위계적인 구조와 우리가 관계 맺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니체가 말했듯이, 우리는 관계망 자체 안의 유무형의 존재들 중 하나인 것이죠. 저도 프리츠커상과 동등한 위치에서, 같은 관계망 속에서 관계를 맺고 있는 것뿐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강림: 프리츠커상 메달에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게 영어로 된 비트루비우스의 건축의 3 요소예요. 그것도 어떻게 보면 좋은 건축에 관한 정의를 먼저 내려놓고, 나머지가 그 정의에 부합하냐 부합하지 않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상은, 처음에 닥터페퍼의 교수님이 그랬듯, 교육을 위해서 탄생했다고도 볼 수 있어요. 그런 부분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거예요. 그러나 그런 부분들 때문에 완강히 거부하는 것도 좋게 보이지는 않죠. 이미 있는 것을 어떻게 잘 활용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잡담회
잡담회는 건축의 이름 아래에서 생산되는 텍스트들을 성의 있게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 후,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를 텍스트로 재생산하는 독서모임이다. 아홉 명의 정규 구성원이 함께하고 있으며, 한 달에 한 번 정도, 한 권의 건축책을 읽고 와서 두 시간 반 동안 이야기를 나눈다. (비건축적인 의미로) 늘 매너리즘에 허덕이고 있기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주실 손님을 환대한다. 잡담회 아카이브: 블로그 / 인스타그램
지역성 ≠ 한국성 ≠ 전통성 ≠ 지역성
분량12,139자 / 24분
발행일2026년 10월 26일
유형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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