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혹은 순수
강림, 겜돌이, 곰, 냥꾼, 닥터페퍼, 쪠, 채운, 천하장사
분량10,534자 / 20분
발행일2026년 10월 26일
유형대담
잡담회는 첫 번째 읽을거리로 키워드의 ‘프리츠커상’을 골랐다. 이 키워드는 2024년 3월, 야마모토 리켄의 프리츠커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이후 국내 건축계에서 되풀이된 한탄과 자성을 계기로 연관된 글들을 묶어 발행됐다. 그로부터 2년 뒤 엡스타인 파일 논란으로 프리츠커 재단 내부 문제가 불거진 시점에 잡담회는 프리츠커상의 의미, 그것의 변화와 상 제도, 지역성 등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 일시: 2026년 3월 8일 일요일 오후 1:30 – 4:00
- 장소: 정림건축문화재단 라운지
- 참석: 강림, 겜돌이, 냥꾼, 천하장사, 채운, 쪠, 닥터페퍼, 곰
차례
- 정치 혹은 순수
- 집착과 갈망
- 토대와 발굴
- 지역성 ≠ 한국성 ≠ 전통성 ≠ 지역성
잡담 시작: 건축신문 읽기의 감각
강림: 반갑습니다. 모임 전에 미리 써준 글들을 읽어봤는데 글을 좀 더 자주 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확실히 글로 의견을 정리해 보니까 서로의 생각을 더 깊이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어떻게 방어할지도 미리 준비하게 되고요. 저도 여러분의 글을 읽으면서 ‘프리츠커상’이라는 키워드로 묶여 있던 글들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번처럼 정성스럽게, 꾸준히 쓰지는 못하겠지만, 앞으로도 되도록 책이나 글을 읽고 나서 생각과 감상을 정리하는 글을 쓰고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해요.
여러분의 글을 읽으면서 눈에 띈 점은, 웹진이라는 형식 자체에 흥미를 많이 느낀 것 같다는 것입니다. 웹진 읽고 만나는 것은 우리 모두 처음이잖아요? 아이스 브레이킹도 할 겸, 웹진이라는 매체에 관해서 어떻게 느꼈는지를 공유해 볼까요?
겜돌이: 이번에 단행본이 아닌 키워드로 묶여 있는 웹진을 봤잖아요? 그래서 냥꾼이 글에 쓴 것처럼 ‘프리츠커상’이라는 키워드를 토대로 묶인 글들을, 큐레이션의 관점에서 읽을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 글들이 묶여 있는가’에 관해 생각해 볼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야마모토 리켄이나 라카통 앤 바살의 글도 마찬가지고요. 이 글들을 읽다 보면, 프리츠커상을 받기 위해서는 일종의 인정된 지역성, 그러니까 저희의 입장에서는 한국성이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어요. 또, 그런 관점으로 이 글들을 큐레이팅해놓은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고요.
다들 알겠지만, 프리츠커상에 대한 직접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글은 없어요. 그게 신기했어요. 그리고 비교적 오래 전의 글들이라는 것도 흥미로워요.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더 프리츠커상에 대해 논의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한국 건축계 내부적으로도 과거에 비해 프리츠커상을 수상하기 위한 노력 자체가 크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건축가의 작가성이나 자율성을 토대로 한 이야기들이 지금은 더 많은 것 같고요. 그게 과연 좋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강림: 글들에서 프리츠커상이라는 단어 자체가 별로 안 나와서 당황했던 기억이 있어요. 더 재미있기도 하고요.
냥꾼: 프리츠커상과 무관한 서로 다른 글들이 이렇게 프리츠커상이라는 키워드 아래 모이게 되면 또 다른 의미가 생겨요.
강림: 김피탕(김치 피자 탕수육) 같은 것이죠?
냥꾼: 맞아요. 예를 들어 ‘한국이 점점 프리츠커상에 다가가고 있다’는 식의 글들을 싹 모아서 읽는다면, 한국 건축계의 문화적 수준이 많이 올라왔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잖아요? 반면 지금 모여 있는 글들은 ‘프리츠커상은 어떤 사람들한테 주어질까, 한국이 프리츠커상을 받기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은 어떤가’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요. 글을 모아 이런 메시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재미있었어요. 디지털 매체가 이런 큐레이팅에 더 유리한 방식인 것 같아요.
저는 종이책을 더 좋아하는 편인데, 종이책의 장점은 ‘이 책이 점점 내 책이 되어가고 있다’는 감각이 있다는 것이에요. 저도 모르게 오래 머물러 있는 페이지는 좀 더 벌어져 있기도 하고, 빠르게 지나갔던 페이지는 새것처럼 되어 있기도 하고요. 다 읽고 났을 때 제가 읽은 흔적들이 남아 있어요.
강림: …새것처럼 되어 있는 페이지가 더 많겠네요?
냥꾼: 그런 게 많긴 한데…! (웃음) 디지털 매체의 경우 그런 흔적은 안 남으니까요. 디지털 매체의 장점은, 어디서나 스마트폰을 다 들고 다니니까 접근하기 쉽다는 점이에요. 종이책의 경우, 책을 읽다가 갑자기 다른 책을 펴서 보기가 번거로운 반면, 디지털 매체는 검색도 할 수 있고, 검색 후 돌아와서 다시 볼 수도 있고, 또 다른 글을 찾으러 갈 수도 있어요. 스마트폰이라는 하나의 매체에서 계속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 있고요. 이건 디지털 매체가 더 잘할 수 있는 영역이에요. 특히 이렇게 짧은 글들이 모여 있는 이런 형식은 디지털 매체로 보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요.
강림: 그렇다면 『건축신문』 키워드 기능의 장점을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네요. 하나는 큐레이션이라는 방식 자체의 즐거움. 대상 자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그 대상을 말하기 위한 맥락들을 제공하는 글들이 하나의 키워드 아래 묶여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인공지능’이라는 키워드 아래 이희준의 글이 들어가 있는데, 막상 읽어보면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여요. 다만 이희준의 글을 경유해서 인공지능을 생각해 보았을 때 어떤 것들을 떠올릴 수 있게끔 큐레이션이 유도하고 있어요. 다분히 의도적이죠. 다른 하나는 디지털 매체만이 가지고 있는 매체특정성. 디지털 매체만에서 가능한 읽기 형식이 분명히 있어요. 냥꾼이 말해 주었던 것처럼 동시성이 있어요. 여러 글에 동시에 접속해 있을 수 있고, 검색했다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어요.
저는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종이책보다 확실히 빨리 읽는 것 같아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나왔을 때, 종이책에서는 멈추고 생각하게 되는데, 디지털 매체에서는 상대적으로 이해가 잘 되지 않아도 일단 한 번 끝까지 읽어요. 다음에 또 읽으면 되니까요. 그래서 종이책보다 여러 번 읽게 되는 특성이 있는 것 같아요. 천하장사의 생각도 궁금해요. 디지털 매체의 낯설음에 대해서 썼던 것 같아요.
천하장사: 이미 이야기가 나왔듯 다소 게으른 사람이라도 더 알고 싶은 정보를 바로바로 검색하면서 읽을 수 있는 용이성이 있었어요. 그런데 아직은 좀 낯설다고 생각해요. 종이책을 보면 그 판형 안의 글자까지를 하나의 이미지로 기억하게 되잖아요. ‘어느 쪽 아래에 이런 내용이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요. 반면, 디지털 매체는 확대해서 보고, 아이패드로 보고, 스마트폰으로 보고, 노트북으로 보고 이렇게 여러 방식으로 보다 보니 그 이미지뿐만 아니라 실제로 모습이 달라져요. 폰트도 달라지고, 위치도 달라지죠. 그러다 보니, 구조화가 어렵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잘 읽고 싶으면 디지털 매체의 글이라도 인쇄해서 읽는 것이 저한테는 더 좋은 것 같아요.
강림: 채운이 또 그걸 알아차리고 인쇄해왔어요!
채운: 천하장사의 말처럼, 아이패드로 글을 읽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때로는 어디까지 읽었는지 눈이 못 따라갈 때도 있었어요. 그래서 첫 번째 글을 ‘아, 이거 안 되겠다. 뽑아서 읽어야겠다’라고 생각해서 다 뽑았어요. 『건축신문』의 ‘키워드’가 큐레이션 같다고 다들 이야기 했는데, 저도 다시 확인해 보니 글이 시간순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더라고요.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해보게 되었어요.
지역성, 그리고 프리츠커상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주는 글들이 먼저 있었고, 다음으로 라카통 앤 바살이나 리켄의 인터뷰 등 프리츠커 수상자들을 비교할 수 있게 해주는 글들이 있었고요. 그 다음이, 여기에서 뻗어나가 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주제의 글들이었어요. ‘일부러 이렇게 순서를 배치해 놓으신 걸까?’ 생각했어요.
저는 그런 이야기들이 주로 나온 시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큐레이션된 글 중에 2012년도 글도 있으니, 10년이 훌쩍 넘은 글도 있는 것이잖아요? 저는 시간순으로 한번 읽어보고 싶어서 시간순으로 뽑아서 읽었어요. 시간순으로 읽으면 점차 현재에 가까워지는 느낌이니까요. 또, 종이책의 경우, 같은 글이라도 옛날에 읽었을 때와 3일 전에 읽었을 때의 느낌이 달라요. 같은 글을 다른 시간대에서 아이패드로 보아도 그렇게 느낌이 다를지 궁금해요.
겜돌이: 지면과 웹은 완전히 다른 플랫폼 같아요. 책은 좌에서 우로 계속 읽어 나가고, 책장을 넘기고, 책장을 넘길 때에는 단락이 끊기죠. 반면, 웹진의 경우 위에서 아래로 스크롤하면서 읽는 거예요. 끊김없이 계속 읽을 수 있어요. 저는 색다르면서도 편했어요. 다만, 저는 표시를 하면서 읽고 싶었는데, 그럴 땐 화면을 캡처하고 노트 어플리케이션에 옮겨야 했어요. 웹에서 표시가 가능하게 된다면 더 좋을 것 같지만, 그것을 구현하기는 어렵겠죠. 그런 점에서는 웹이 오히려 개인의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아요.
강림: 쪠도 뽑아 왔는데 마찬가지의 이유 때문인가요?
쪠: 네. 이해가 잘 안 되어서요. 웹으로 읽으니 글들이 더 어렵게 느껴졌어요. 그냥 읽다가는 잘 모르게 될 것 같더라고요. 다시 위로 올라가서 처음부터 읽다가 좀 있으면 다시 위로 올라가서 처음부터 읽고 이랬어요. 그러다 결국 “에잇, 뽑자!” 하고 출력했죠.
강림: 출력물로 읽는 것이 웹으로 읽는 것보다 도움이 되었나요?
쪠: 그런 것 같아요. 웹보다 확실히 더 집중이 되고요. 아까 강림이 말했던 것처럼 웹은 편하게 슉슉 넘기면서 읽었던 것 같아요. 다만 몇몇 글들은 그렇게 읽어서는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강림: 웹이라는 공간 자체가 매끄러운 공간이에요. 반면 책은 접혀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분절, 격차, 틈새가 있어요. 매체 특성이 독서 경험에 차이를 주는 것 같아요. 집중과 이해에도 차이가 생기고요. 잡담회가 블로그에 올리는 글은 아마 출력해서 읽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다 보니 저희가 글을 발행할 때에도 어떻게 쓰면, 혹은 편집하면 더 좋을지를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처음 읽는 프리츠커상
강림: 쪠의 글을 읽었을 때 가장 흥미롭게 느낀 부분은, 우리가 체감하는 프리츠커상의 지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고민한 부분이었어요.
프리츠커상이라는 것도 학교에 다닐 적 건축계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상이라는 말로 처음 알게 되었다. 정말 설명도 한국다웠다. 나열하고, 순서 매기고, 제일 좋은 상을 받았으니 제일 잘하는 건축가, 제일 잘나가는 건축가라고 생각하는 한국의 기사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그냥 보기 싫었던 것 같다. 한국 사람은 ‘최고’를 좋아하지 않는가. 그래서 그냥 동경하고, 따라하고, 무분별하게 좋아만 보이는 건축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라리 한국에 프리츠커상을 받는 건축가가 없는 것이 더 이로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그 상을 받았다가는 여기저기서 흉보거나 따라하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니까.
– <건축신문> ‘프리츠커상’에 관한 잡담회의 단상 – 쪠
사실 학부에 입학한 후에 교수님들이 계속 프리츠커 어쩌고저쩌고하니까 중요한 상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 실제로 이 상이 얼마나 권위 있고 의미가 있고 중요한 상인지 철두철미하게 탐색해 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프리츠커상의 수상자가 매년 3월쯤 발표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올해에는 제프리 엡스타인 파일이 공개되면서 프리츠커 재단 회장이 사임했어요. (아직 이사회 멤버이지만요.) 그렇다고 해서 꼭 프리츠커상이 비윤리적이고 타락한 것인지는 모르겠어요. 프리츠커 수상자는 회장이 정하는 게 아니라 건축가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이 주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심사위원단은 정치적·경제적으로 이사회와 독립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어요.
저(희)는 흔히 프리츠커상을, 프리츠커상 수상자가 속해 있는 계, 네트워크를 인정해 주는 대타자로 여겨 왔어요. 프리츠커상의 인정을 받는 것이 ‘우리가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의 증명이라는 거죠. 다만 프리츠커상의 권위를 형성하는 더 상위에 있는 무언가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아요. 이번 사건을 통해서 프리츠커상의 권위도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다층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어제 겜돌이와 찾아보니, 프리츠커상을 받은 나라가 22개국이더라고요? UN에 등록된 나라가 193개국이니까 171개국은 아직 프리츠커상을 받지 못한 나라죠. 그럼 나머지 171개국에는 건축이 없는 것일까요? 이런 질문도 한번 해볼 수 있겠어요.
먼저, 전반적으로 프리츠커상에서 느끼는 인상에 관해서 이야기해보았으면 좋겠어요. 또, 매년 수상자가 나올 때마다 어떤 생각이 드는지, 프리츠커상 수상자 발표가 여러분 개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닥터페퍼: 저는 학부 시절 일이 떠올랐어요. 학부 1학년 때 교수님이 프리츠커 수상자 작품을 엮은 작품집을 강제로 사게 했어요. 프리츠커상에 대한 전반적인 의의나 설명이 없이 다짜고짜 ‘여기서 네가 좋아하는 건물을 골라봐라’ 이런 식으로 수업이 진행됐어요. 그러다 보니 ‘이게 진짜 대단한 상인가보다!’ 싶었죠. 프리츠커상을 목표로 공부해야 한다는 인상을 남겼어요. 그런데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점점 더 프리츠커상에 대한 관심이 옅어지게 되는 것 같아요. ‘왜 이렇게 안달이야?’ 싶은 거죠. 그때의 그 교수님에 대한 반발심 때문일 수도 있어요.
쪠: 저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건축가들이, 운만 좋은 사람들은 아니라고 봐요. 프리츠커상을 받기까지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을 거예요. 그것을 바탕으로 실제 건축물을 지어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고요. 그리고 수많은 건축물을 지으면서 내공을 쌓았기에 수상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정리된 생각을 보다 강하게 표현한 사람들이 프리츠커상을 받았던 것 같아요.
강림: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프리츠커상은 보통 ‘프리츠커상을 받을 만한 건축가’들이 주로 받았던 것 같아요. 최초 수상자가 필립 존슨이었고, 일본 수상자도 주로 이미 유명했던 건축가들이었어요. 그런데 2010년대부터 상의 기조가 조금 바뀌었어요. 지역성, 공공성 등을 더욱 중요하게 보게 된 것 같아요. 공동체에 대한 기여를 묻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희가 보기에는 다소 당혹스러운, 낯선 건축가들이 많이 선정되는 것 같아요. RCR, 알레한드로 아라베나, 프란시스 케레 같은 분들이죠. 오히려 데이비드 치퍼필드의 수상이 예외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닥터페퍼: 상을 처음 제정했을 때에는 상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유명 건축가를 의도적으로 수상자로 선정한 측면도 있는 것 같아요. 그래야 상의 정체성이나 의의를 확보할 수 있으니까요. ‘역대 수상자’ 목록을 확보하는 차원이죠. 그 목록이 어떤 설명보다 더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 같아요.
강림: 그렇지만 필립 존슨을 그 당시의 가장 중요한 건축가라고 보기 어려울 것 같아요. 필립 존슨이 가졌던 영향력은 두 가지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모더니즘 건축의 중심지가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간 이후, 미국 출신의 건축가로 활동했다는 것. 두 번째로 1930년대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국제 건축 전시회를 개최한 큐레이터라는 것이에요. 문화 권력을 자기 쪽으로 끌어온 거죠. 유럽에 있었던 모더니즘 건축의 에센스를 전시회를 통하여 미국으로 가지고 왔다는 서사가 있어요.
곰: 이 지점에서 궁금한 게, 프리츠커상은 어떻게 권위를 얻었을까요? 그런 전략적인 고려가 정말로 작동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언제부터 프리츠커상이 ‘세계 최고의 건축가에게 주는 상’이 되었을까요? 혹시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강림: 저도 잘 모르겠어요.
곰: 저는 닥터페퍼에게 책을 사라고 한 교수님은, 가벼운 마음으로 권했으리라 짐작해요. 그리고 그 작품집에 있었던 건축가들은 예외 없이 스타키텍트들이었어요. ‘스타키텍트 중에 네가 좋아하는 건축가가 누군지 찾아봐라’ 이런 의도였을 거예요. 그리고 그들의 대표작을 선정해서 분석해 보자는 것이죠. 정작 학생 때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프리츠커상 자체가 왜 이렇게까지 권위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해도가 전혀 없는 것 같아요.
강림: 듣고 보니 그 부분을 저희가 따져봐야 할 것 같네요. 지금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으니, 다른 생각이 있는지를 먼저 들어보면 좋을 것 같아요.
곰: 순수하게 “누가 가장 잘해?”를 묻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수상자들을 뽑다 보니까 점점 더 전 세계적으로 과열되어버린 것 같아요. 그렇게 연도별 수상자를 정해버리니 세계적이고 공통적인 기류 같은 것이 자리 잡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다 어느 순간, 자본을 쏟아서 만들어낸 스타키텍트들의 휘황찬란한 건물에 더 이상 상을 주면 안 된다고 자성했겠죠.
그리고 수상자들이 수상 이후 어떻게 변해갔는지도 중요하죠. 여러 비판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해요. 갈수록 작업이 아쉬운 수상자들이 있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안도 타다오의 근작들도 별로예요. 제가 정말 좋아했었던 건축가인데도 말이죠. ‘안도스러운’ 건물만 지어지는 것 같아서 아쉬워요. 어떻게 보면 프리츠커상의 영향력이 프리츠커 재단이 생각하는 것보다 커진 것 같기도 해요. 건축계 전체가 그런 것을 깨달은 것 같고요. 그래서 수상 기조가 바뀐 것이 아닐까 싶네요.
겜돌이: 상은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도구라는 생각이 제게는 있어요. 상을 주는 주체가 있으니, 상을 받는 사람은 수동적인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어요. 대학이든 건축가든 상이나 제도 앞에서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잖아요. 그리고 한 주체가 상을 줄 때 그 상을 주기 위한 어떤 명분, 정치적인 이유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일종의 방향성인 것이죠. 이것이 우리가 프리츠커상이 2010년대 이후로 그 기조가 바뀌었다는 것에 주목하는 이유이고요. 스타키텍트를 생산하거나 스타키텍트가 되는 굴레를 만들어내는 상이 아니라, 그 지역의 건축 문화에 수여하는, 어떤 관계망에 주는 상이라는 기조를 만들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외부적인 압박이나 요인도 있었을 테지만 내부적인 성찰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어요. 둘 중 무엇이든 간에, 외부적으로 그리고 내부적으로 정치적인 이념이 바뀌었기 때문일 거예요.
그런 것들을 보면, 결국 건축상 전반에 대한 생각까지 나아가게 되는데, 하나의 상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사실 이상한 행위라는 생각까지 들어요. 건축상뿐만이 아니라 명예나 인정 전반에 대한 이야기가 되는 것 같아요. 한 개인이 노력해서 받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라고 생각해요. 조절할 수도 없고요. 그런데 그런 노력을 하도록 종용하는 외부의 압박이 있어요. 그런 것을 저는 조금 이상하게 여기는 거예요. 그리고 아까 강림이 프리츠커상을 받은 나라가 22개국이라고 말했잖아요? 그중 대다수가 서유럽 혹은 미국 혹은 일본이에요.
강림: 2010년대부터는 스크린 쿼터제처럼 보일 수준이죠.
겜돌이: 맞아요. 사실은 이게 굉장히 이상한 거예요. 그러니까 한국이 못 받은 것도, 한국 건축이 정치적으로 그들이 이용할 만한 도구로서 아직 위치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프리츠커상의 기능을 의심해 볼 때가 된 것 같아요.
천하장사: 저는 굉장히 순수하게 생각했어요. 아까 강림이 프리츠커상의 기조가 바뀐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잖아요? 저는 그냥 미술의 발전사처럼 생각했어요. 순수 예술을 이야기하다가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은 때가 오고, 그때에는 사회를 다루는, 사회 참여적인 예술이 이야기되기 시작하고, 이어서 대중과 관계 맺는 작품들이 등장한 것이죠.
그런 것처럼 프리츠커상도 조형, 공간, 빛처럼 삶과 다소 유리되었다고 생각될 수도 있는 요소를 다루는 설계나 건축가를 수상 기준으로 삼았었지만, 이제는 하나의 작업이 사회와 어떻게 연결이 되고, 대중들은 어떤 의견을 가지는지 등 이런 방향에 기준을 두고 판단을 내리기 시작한 게 아닐까요?
겜돌이: 저는 그것조차도 정치적인 판단의 일종이라고 생각해요. 프리츠커상 수상자들은 자신들의 건축적 지향점을 건물에 투영할 수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해요. 지금까지와는 성향이 다른 수상자들을 지목하고, 배출하고, 조명하는 것 자체가 프리츠커상이 원하는 달라진 지향점을 대중들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라고 봐요.
냥꾼: 저는 천하장사랑 비슷하게 생각했어요. 겜돌이나 곰의 말에도 일부 공감하긴 하지만 잘 모르겠어요. 쉽게 생각해보면, 예전에는 지을 일이 많았죠. 한편 앞으로는 이미 지어진 게 너무 많고, 오히려 지어둔 것들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이것들을 지었던 시대를 어떻게 다시 바라볼지가 더 중요해진 것 같아요. 혹은 지어 놓고 보니 뒤늦게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시점이기도 하고요. 한창 지을 때 생겨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지가 더 중요해졌다고 봐요. 사회 환경의 변화가 있는 거죠.
닥터페퍼: 저도 비슷하게 생각해요. 사회의 흐름이 바뀌었잖아요? 예전에는 작가주의적인 스타키텍트 한 명에 의해 탄생한 하나의 작품, 이런 것을 주로 인정했는데, 이제는 ‘사회 구성원까지 함께하는 건축’과 같은 방향으로 시대 자체가 바뀌었다고 봐요. 저는 오히려 이런 흐름에 맞추어서 변하지 않고 초반에 행했던 기조대로만 똑같이 흘러가는 것이 더 위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정치적인 입장이 다소 가미되더라도 변화하는 것 자체는 좋다고 봐요. 스스로 혁신하는 느낌이에요.
-계속-
잡담회
잡담회는 건축의 이름 아래에서 생산되는 텍스트들을 성의 있게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 후,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를 텍스트로 재생산하는 독서모임이다. 아홉 명의 정규 구성원이 함께하고 있으며, 한 달에 한 번 정도, 한 권의 건축책을 읽고 와서 두 시간 반 동안 이야기를 나눈다. (비건축적인 의미로) 늘 매너리즘에 허덕이고 있기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주실 손님을 환대한다. 잡담회 아카이브: 블로그 /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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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2026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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