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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과 표정

김민지

1

건축 준공 사진 속 공간은 대개 일상이 들어오기 전의 말끔한 상태다. 그러나 그 완벽하고 고요한 무균의 상태는 다시 오지 않을 찰나에 불과하다. 결국 누군가의 자잘한 물건들과 사건들로 채워진다. 벽과 바닥과 천장이 만나 이루는 텅 빈 물리적 공간은 상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 일도 일으키지 못한다. 사물들이 놓이고, 관계를 이루고 나서야 공간은 비로소 용도를 얻고 고유한 얼굴을 갖게 된다.

그곳이 누군가의 지극히 사적인 집이라면 공간을 완성하는 일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그의 물건들에게 조용히 넘겨주는 것이 맞다. 건축가가 미처 알지 못하고 떠난 공간의 구석들은 시간이 흐르며 거주자의 손으로 완성되어 간다. 건축가의 의도가 거주자의 자연스러운 삶을 침범한다면 그건 부자연스러운 고집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카페나 스테이처럼 잠시 머물다 떠나는 공간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런 곳에서는 아주 작은 사물의 배치까지 공간의 계획에 포함할 때 그 밀도가 높아진다. 사물은 때로 이 공간을 어떻게 경험하면 좋은지를 말없이 알려준다.

사물을 어디에, 어떻게 둘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은 결국 시선과 움직임을 헤아리는 일이다. 중정의 풍경이 가득 내다보이는 창가 식탁 위에 신선한 원두와 커피 도구를 정갈하게 올려두면 그곳을 찾은 이는 자연스레 커피를 내리며 뜰을 바라보는 고요한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고사리의 엷은 잎 그림자가 비치는 창가 데이베드 위에는 편안하게 읽기 좋은 책을 한두 권 올려둔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정원을 바라보며 그 변화에 어울리는 음악을 만든다. 곁에 있는 이와의 대화마저 잠시 멈추고 온전히 음악과 식물의 침묵에 집중할 수 있도록 1인용 헤드폰을 걸어둔다. 함께 온 이와 오후의 햇볕에 빛나는 정원을 바라볼 때는, 향과 색을 더해주는 꽃차를 마실 수 있게 차 도구를 준비해둔다. 계절마다 음악이 달라지듯 꽃차도 철마다 다른 꽃잎을 골라 블렌드를 만든다. 꽃잎이 뜨거운 물 속에서 천천히 피어나는 모습을 만끽하도록 티팟은 투명한 유리로 된 것을 고른다.

필요를 채우는 데 그치지 않고 구체적이고 낭만적인 행위를 공간 곳곳에 심어둔다. 단순히 보기 좋게 포장하고 꾸미려는 것이 아니다. 공간에 잠시 머물다 가는 어떤 이의 걸음과 시선, 몸의 방향을 상상하며 보다 선명한 그림을 그리는 설계의 연장이다.

2

보스케의 거실 데이베드에 걸터앉으면 좁은 창 너머 오래된 돌벽이 보인다. 그리고 시선의 양옆으로는 두 개의 돌벽이 가까이 놓인다. 얼핏 닮아 보이는 두 벽이지만 실은 전혀 다른 시간과 이야기를 품고 있는, 이 장소에서 가장 오래된 장면이다.

오른쪽에 완고하게 서 있는 돌벽은 이 땅에 지금의 집이 들어서기 훨씬 전부터 자리를 지키던 옛 제주 돌집의 일부다. 기나긴 세월 제주의 거센 비와 바람을 묵묵히 견뎌오며 시간의 빛이 고스란히 배어든 돌들과 그 사이사이에 무심하게 여러 차례 덧채워진 시멘트의 흔적은 켜켜이 쌓인 시간의 결을 드러낸다. 왼쪽에 선 돌벽은 이 공간을 지으면서 옛 벽과 나란하게 쌓아 올린 새 벽이다. 오른쪽의 벽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은 ‘날것’이라면, 왼쪽의 벽은 그 곁에서 조화를 이루도록 조심스레 ‘매만져진 것’이다. 나란히 놓인 두 벽이 기분 좋은 대비를 이루며 그 사이로 나지막한 긴장이 흐른다.

두 돌벽 사이, 정면의 유리창은 안과 밖을 가르는 얇은 경계이면서 시선을 곶자왈을 닮은 정원으로 이끈다. 창과 옛 돌벽이 만나는 틈새의 공간은 침실로 들어가기 전 잠시 머무는 전실이자, 툇마루로 나설 수 있는 작은 다실로 비워두었다. 거실에서 한 걸음 비켜나, 공간의 속도를 한 박자 늦추기 위해 남겨둔 자리다.

툇마루에 앉으면 시선은 자연히 창밖의 짙은 풍경으로 향한다. 그 풍경을 평면적인 그림이 아니라, 깊이 있는 공간으로 다가오게 만드는 것은 그 옆에 묵묵히 선 두 돌벽의 존재감이다. 서로 다른 시간을 품은 두 벽의 단단함이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눈앞에 펼쳐진 제주의 자연에 온전히 기대게 한다.

공간의 온도를 만드는 것은 눈길을 사로잡는 장식이나 새것의 말끔함이 아니다. 때로는 원래 그 자리에 머물던 투박한 돌덩이의 흔적을 지우지 않고, 어떤 새로운 맥락 속에서 무엇과 나란히 둘 것인가를 예민하고 꼼꼼하게 결정하는 태도가 그곳의 공기를 빚어낸다. 낡은 시간을 지우는 대신 새로운 쓸모를 더할 때, 공간은 더 깊고 단단한 위안을 건넨다.

3

거대하고 무거운 건축적 담론보다,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에 바짝 밀착된 공간의 피부, 그 미세한 결을 다듬는 일에 늘 마음이 쏠렸다. 건축은 결국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구체적인 모양새에 깊숙이 개입하는 일이고, 공간이 품은 깊이와 온기는 웅장한 뼈대가 아니라 손끝에 닿는 아주 작은 사물들로 조율되기 때문이다.

공간에 놓인 사물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람에게 말을 건넨다. 높은 천장에 길게 늘어뜨린 펜던트 조명과 바닥에 웅크린 플로어 조명은, 어둠을 걷어내는 방식도, 공간 안에 존재하는 태도도 다르다. 의자는 바닥에 놓이는 순간 앉는 이에게 자세를 제안하며 시선의 흐름을 슬며시 이끈다. 피부에 닿는 소재와 촉감도 예외는 아니다.

눈에 띄는 기능 없이도 조용히 제 몫을 다하는 것들이 있다. 평소엔 거울 달린 공에 불과하지만 켜는 순간 거실의 공기를 바꿔놓는 미러볼, ‘시인의 서재’라는 이름에 어울리도록 연필을 깎아 시를 필사할 수 있게 책상 위에 올려둔 노트와 연필깎이가 그렇다. 계단 옆 얕은 수공간에 어울릴 듯하여 현장에서 골라 놓아둔 돌멩이 하나, 쇄석만이 깔린 옥상의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아쉬운 대로 가져다 둔 마른나무 둥치 하나까지도 여백에 단단하게 찍히는 마침표가 된다. 하나의 공간이 온전한 제 모습을 갖추려면 실로 무수한 사물들이 호흡을 맞추어야 한다. 미세한 차이들이 겹쳐지며 그 공간만의 표정을 만들어낸다.

4

킴모의 웹사이트를 열어둔 지는 한참 되었지만 스튜디오 소개란은 여전히 거의 비어 있다. 작업물은 쌓여가는데, 정작 스튜디오를 설명하는 문장은 단 한 줄밖에 쓰지 못했다. 하지만 ‘이러이러한 건축을 지향합니다’라는 문장을 내 것으로 삼는 일은 여전히 망설여진다. 애초에 뚜렷한 목적지도 방향도 정해두지 않고 작업해 왔기 때문이다. 방향이 없다는 것은 때로 결핍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금까지 나를 움직여 온, 어쩌면 유연하고도 정직한 방식이기도 하다.

도면 위에서 모든 것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철저한 관리로 현장의 오차를 정교하게 통제하는 건축가들이 있다. 반면 나는 일상의 작은 사물과 장면에 매달리면서도, 정작 설계와 시공의 전 과정을 완벽하게 만들어가려는 편은 아니다. 예산과 일정이 빠듯한 소규모 프로젝트 현장에서, 두툼한 상세도를 미리 준비하기보다 현장의 작업자들과 나란히 서서 마감 전 벽면에 스케치를 남기는 일이 잦았다. 어쩌면 계획의 밀도가 성글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모니터 앞이 아닌 실제 그 자리에서만 내릴 수 있는 판단을 놓치지 않으려는 나름의 방식이었다.

현장의 감각에 기대다 보면 ‘완성도’라는 개념에 대해 자주 되묻게 된다. 편안하고 다정한 공간은 ‘건축적으로 결점 없는 완성도’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현장에서 우연히 만들어진 작은 어긋남, 거주자의 생활 방식, 오래된 가구 하나로 인해 완고하던 공간의 인상이 스스럼없이 말랑해지기도 한다. 설계의 바깥으로 밀려나기 쉬운 이 요소들을 어떻게 공간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이 글 역시 무엇도 선언하려는 것은 아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질문들 사이에서, 어떤 뚜렷한 방향을 향하지 않은 채 그저 지금의 태도를 붙들어두려는 시도에 가깝다.


킴모

킴모는 건축을 기반으로 사람과 사물을 탐구합니다. 공간과 물건 사이의 감각적인 관계에 주목하며, 설계의 여백과 사람들의 일상을 연결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김민지는 한국에서 십여 년간의 실무 경험 후 2022년부터 킴모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재미있어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기웃거리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https://kimmo.co.kr/

호흡과 표정

분량3,911자 / 8분 / 도판 3장

발행일2026년 5월 13일

유형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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