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네 편의 영상과 세 편의 퍼포먼스로 구성된 «무빙/이미지»가 문래예술공장에서 열렸다. 1층의 블랙박스와 위층의 박스시어터를 오가며 작품을 관람하고 퍼포먼스에 직간접 참여한 관객들의 모습은, 다소 건조한 전시 제목과는 다른 긴장과 온도를 띄었다. 밀도 있는 구성으로 그간 움츠린 퍼포먼스 페스티벌 중에 짧지만 유쾌한 프로젝트였다. 선별한 작품들에는 시간의 미학과 안무에 잠재된 사회성, 그리고 시각 이외의 감각과 신체성에 대한 이슈가 잘 안배되어 있었다. 이번 전시를 통해 퍼포먼스 분석을 시도한 김해주 큐레이터를 만나 움직임 속 이미지 읽기를 들어본다.
2015년 젊은 작가에게 필요한 것 작가들에게 필요한 무대는 어떤 모습일까? 공공미술관의 한 모퉁이일까? 아니면 자유롭고 자립적인 공간일까? 특히 자신만의 작업실마저 갖지 못하는 젊은 작가들에게, 습작과 실패작이 널려 있는 시행착오의 공간조차 없는 그들에게 필요한 전시공간은 어떤 모습일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청년 작가들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면 되는 것일까? 고독과 화해가 들어설 자리가 없는 한국 사회 속에서 청년 예술가들을 위한 활동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커먼센터 디렉터인 함영준과 시각문화 연구자 윤원화를 통해 들어본다.
양혜규는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조각을 전공했고, 지금은 서울과 베를린을 주요 거주지로 삼아 작업 활동을 하며, 미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여러 국경을 넘나드는 그의 삶은 이렇다: 하루는 서울작업실에서 선후배 동료 작가들과 미술 팟캐스트를 준비하고, 다른 날은 스웨덴 말뫼에 있는 학교에 출근한다. 2주간의 학교 업무일정이 끝나면 다시 여러 명의 어시스턴트가 일하는 베를린 작업실로 귀가한다. 뉴욕현대미술관MoMA이 초기작 <무명 학생 작가의 흔적>(2001)과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서 선보인 <살림>(2009), 그리고 최근에는 <향신월香辛月>(2013) 등을 소장할 만큼 양혜규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 주류 현대 미술계의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를 ‘비판적 생각을 하고 감각이 예민한 젊은 작가’ 이상으로 미술계에 각인시킨 전시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당시 같은 30대였던 기획자 김현진과 만들어낸 《사동 30번지》(2006)라 할 수 있다. 미술관이나 화랑 등의 제도화된 공간에서 벗어난, 작가 외할머니의 인천 옛집에서 가졌던 《사동 30번지》는 이른바 ‘자가-조직적self- organized’이라고 번역되는 형식이 두드러진 전시이자 작업 그 자체이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양혜규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한국 행사(2005) 조직위의 현지 사무실에서 일하기도 하는 등 ‘작업만’ 하지는 않는다. 인터뷰는 2월 8일 서울 연건동의 양혜규 작업실에서 진행했고 이 글을 정리하는 필자 김진주는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 코디네이터로 일하며 그를 처음 대면했다. 당시 작가 양혜규에게서 받은 첫인상은 개념적으로도 맥락적으로도 대규모의 작업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힘이 있으면서, 손이 많이 가는 살림살이의 역할과 기능을 중히 여기고 이에 헌신하고자 노력한다는 점이었다.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 《응결: 양혜규》를 하나의 기점으로 양혜규는 이후 ‘세계적 한국 작가’의 타이틀을 얻고 그에 걸맞게 활동해왔다. 한국 미술계도 이런 작가의 활약을 반기는 듯 이듬해 아트선재센터에서는 작가의 첫 기관 개인 초대전 《셋을 위한 목소리》(2010)를 열었고, 삼성미술관 리움은 올해 또 다른 개인전 《코끼리를 쏘다 象 코끼리를 생각하다》를 개최했다 (2015년 2월 10일~5월 10일). 현재 작가는 샤르자 비엔날레 12에서도 신작 <불투명 바람>을 전시 중이다.1
초기 개념미술과 미디어아트의 개척자인 안토니 문타다스는 번역, 공공공간, 도시에 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토탈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번 전시에서 그는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의 건축가, 리서처, 큐레이터들과 함께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각 도시의 유사점과 차이점, 충돌의 지점을 이미지와 코드를 통해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여주고 있다.
올가을 서울시립미술관은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4를 개최한다.1 이번에 총연출을 맡은 예술감독은 <독일로 간 사람들>, <신도안>의 작가이자 <파란만장>, <만신>의 영화감독 박찬경이다. 억압된 한국현대사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작가로서 박찬경은 다양한 아카이브를 활용, 미디어를 작품세계에 끌어온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계획하고 있는 <미디어시티서울> 2014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임옥상과 강영민 작가는 하나로 묶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민중미술 작가와 팝 아티스트는 생뚱맞은 조합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SNS를 적극적으로 자신의 작업에 끌어들여, 집요하면서도 재기발랄하게 예술과 사회의 연결을 시도하고 있다는 정도다. 막상 이들은 만나자마자 불꽃이 튀었다. 냉소주의 시대에 예술이 가져야 할 정치적 뜨거움이 이들을 묶었다.
전시장에 갈 땐 으레 다음의 경험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이전에 느끼지 못한 더한 자극을 받거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탄과 함께 영감을 얻거나. 작가 구민자의 작업은 공교롭게도 위와 같은 기대를 충족시켜주진 않는다. 하지만 그 평범해 보이는 상황이나 덤덤한 행위를 따라가다 보면 방관자였던 관람자는 어느새 작업 속 작가의 자리에 앉아 작가가 만들어놓은 세상 안에서 문답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것이 좋은 예술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즉각적인 자극에 수없이 노출되어 무감한 이들에게 필요한 예술가는 서두름 없이 나와 내 주변 사이를 오가며 끊임없이 질문과 대답하기를 유도하는 이가 아닐까.
처음 지인이 내게 이 책을 건넸을 땐 ‘요즘에도 이렇게 선동적인 제목을 쓰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표지의 광장을 가득 메운 시위대1를 보곤 평소 이와 관련한 예술이론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차여서 반가웠고, 목차를 메운 작가와 필자들에서 저자의 집중력이 보였다. 온갖 사회문제에 촉을 들이대는 예술을 연구해온 이의 뜨거운 가슴을 상상하며, 시린 겨울 끝자락에 『마지막 혁명은 없다: 1980년 이후, 그 정치적 상상력의 예술』2의 저자 이솔을 만났다.
비엔날레, 불평과 불만의 영토 올해도 어김없이 비엔날레에 대한 비평과 비판이 쏟아졌다. 나 역시 지난 10여 년 동안 비엔날레를 보고 나면 좋은 점보다는 나쁜 점을 더 많이 이야기했던 것 같다. 마치 ‘투견꾼’처럼 비엔날레들이 서로 경쟁하고 비교하는 것을 지켜봤다. 돌이켜 보면 마시밀리아노 지오니 Massimiliano Gioni가 감독을 맡았던 2010년 광주비엔날레만 예외였을 뿐, 대부분의 비엔날레들은 개막하기가 무섭게 욕을 먹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가장 욕을 많이 먹은 비엔날레는 개막까지 작품 설치가 끝나지 않았던 2002년 광주비엔날레였다. 예술성의 높음과 낮음을 떠나 대규모 국제 행사를 책임지는 예술감독이 기본적 요건을 채우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단일 감독이면 전시의 스펙트럼이 좁다고, 또 공동 감독제면 산만하다고 지적한다. 전시 주제가 명확하면 너무 쉽다고, 그 반대의 경우면 모호하다고 비판한다. 비엔날레 전시장 역시 넓으면 넓다고 또 좁으면 좁다고, 전시 예산도 많으면 많은 대로 또 적으면 적은 대로 불만이 나온다.
최근 백남준아트센터와 소마미술관에서는 백남준 탄생 8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동서를 가로지르고, 관객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능동적 주체로 만든 백남준의 작업이 오늘날과 미래의 미디어 환경에 어떠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는지, 문화의 패러다임을 예술적 상상력으로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었는지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