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아직 면목이 없는 상태다. 그나마 긍정적인 부분은 자의 반 타의 반이겠지만, 여러 상황상 부수고 짓는 것보다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다시 쓰는 것이 조금씩 일반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가가 올라 공사비가 너무 비싸졌기 때문에 더 유리해지기도 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정부 정책도 환경을 더 생각하는 방향으로 만들어 갈 것이니 앞으로 시장도 점점 그렇게 될 것이다. 개인 건축주들에게서도 예전보다 그런 경향 변화가 명백히 눈에 띈다. 긍정적인 변화라고 본다.
데뷔작: 리빙 라이트 리빙 라이트(Living Light) / 자료 제공: 삶것 상암동 월드컵 공원에 10여 년간 유지되다가 2년 전 철거되었다. 강의 외에 다른 작업이 없던 시절이라 뉴욕과 서울을 비행기로 오가며 3년간 여기에만 몰두했다. 발주처는 서울시였고, 예산은 디자인, 제작, 설치, 운영을 포함해 약 1억 원 규모의 작업이었다. 파트너와 단둘이서 모든 과정을 직접 진행했다. 재미있었고, 지금까지도 관심 있는 분야와 맞닿아 있는 작업이다.
MMCA 과천프로젝트는 노후화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전반적인 변화를 목표로 시작한 파빌리온 프로젝트 시리즈다. 미술관 내의 특정 공간과 기능을 설정하여 제안을 받는 방식으로, 당선작은 최소 5년간 존속된다. 2021년에는 버스 정류장을 예술버스쉼터로 바꾸어 과천관까지의 여정을 새로운 경험으로 전환하고자 했다. 다이아거날 써츠의 ‘쓸모없는 건축과 유용한 조각에 대하여’를 최종 선정했다. 2022년 프로젝트는 미술관 3층의 옥상정원을 대상으로, 2층 원형 정원과 연계하여 쉼과 산책의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조호건축의 ‘시간의 정원’이 선정됐다. 과천프로젝트는 2026년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일을 놓고 찾은 길 최윤영 희림건축에 신입으로 입사해서 10년 정도, 권이철 소장은 해안건축에서 신입사원으로 시작해 15년을 있었다. 둘 다 기본적으로 주거본부에서 대규모 아파트 설계를 했고, 나는 주로 규모검토, 기획설계, 현상설계를 했다. 실무 10년 동안 현장이나 프로젝트 준공을 거의 경험하지 못했고, 소규모 건축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기 때문에 ‘내 사무소’ 혹은 ‘우리 사무소’ 오픈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서 회사 생활을 이어가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는데, 하루 2~3시간 쪽잠 자는 생활을 이어가다가 결국 건강에 문제가 생겨 갑작스럽게 퇴사하게 되었다. 퇴사 후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궁리하다 어린 시절 꿈을 다시 꺼내 보기로 마음먹고 취미미술학원에 등록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덕에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도 점차 치유되었고, 좋은 기회를 얻어 전시까지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다 한 아트페어로부터 외부 공간을 같이 기획해 보자는 연락을 받았다. (그쪽에서도 내 커리어를 신기하게 본 것 같다.) 조금씩 일을 진행하던 차에 자금난으로 행사가 취소되면서 그 안을 실현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일을 계기로 건축과 미술 중간 어디쯤에 우리가 몰랐던 시장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라크랩(LACLAB)이라는 스튜디오를 개설해 공공미술, 전시기획, 연구 프로젝트, 기획설계, 법규검토 등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2년 정도 열심히 일을 찾고, 작은 프로젝트들을 시도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권 소장도 드디어 독립을 생각하게 되었다.
주체적인 건축가로 서기 전진홍 계획된 독립은 아니었다. 당시를 되돌아보면, 재직 중이었던 공간그룹의 법정관리 사태는 내게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전 세계를 누비며 다국적 회사로 운영되는 모델이 잘 작동될 수도 있지만, 건축가가 거대 자본의 흐름에 기대어 사무소를 운영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적 모델이 필요하지 않을까 스스로 많이 묻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OMA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 세대로, 클라이언트가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보다는 개인의 관심사를 연구하고 생각을 발전 시켜 나아가는 능동적인 건축가의 모습을 그렸던 것 같다. 이렇게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건축가로서 내적 논리를 탄탄하게 갖추어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겠다고 생각했다.
전봉희는 2013년부터 발행되기 시작한 목천건축아카이브의 구술집 시리즈 서문을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전 세대의 건축가를 갖게 되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대단히 압축적인 표현이다. 30대에서 80대까지 세대별 건축가가 모두 있다는 이 간단한 사실에서 많은 것을 추출해낼 수 있다. 현대 건축 초기의 주요 인물 가운데 박길룡(1898~1943 )은 45세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박동진(1899~1980 ), 이천승(1910~1992 ), 장기인(1916~2006 ) 등은 모두 80세 이상 생존했다. 그러나 말년의 그들이 건축가로서 당대 담론에 끼친 영향은 거의 없었다. 박동진은 1950년대에, 이천승은 1960년대 이후 담론의 장에서 목소리를 확보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들은 한 세대로 불리기 힘들 만큼 대단히 예외적인 소수였다. 공교롭게도 나상진, 김중업, 김수근은 비교적 이른 나이인 50, 66, 55세에 타계했다. 그동안 한국에는 나이 든 건축가가 없었다. 2010년대 들어서 70~80대가 된 일군의 1930년대생 건축가들이 처음이다. 이들은 해방 후 한국의 대학에서 현대 건축을 공부하고 1960년대 이후 독립해 자신의 사무실을 일구었으며, 설계 현장에서는 멀어졌더라도 현재까지 다양한 활동을 해오고 있는 세대다. 국가의 경제 성장과 개인의 생애 주기가 일치한 세대이기도 하다. (이전의 양식 건축 등과 구분되는 ) ‘현대 건축’ , (몇몇 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 불리는 ) ‘세대’ 등의 의미를 따진다면 이들이 어쩌면 온전한 한국 현대 건축 1세대다. 드디어 한국에서 현대 건축이 늙기 시작한 것이다. 이 늙음은 정확히 젊음과 공명한다. 2010년대 젊은 건축가 현상은 이전과 비교하면 무척 낯선 것이다. 해방 이후 한국 건축사는 젊은 건축가들의 연대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국회의사당 현상설계에 당선되었을 때 김수근은 20대 후반이었고,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에서 초대형 국가 프로젝트를 도맡아 진행했을 때도 아직 30대였다. 김중업은 42세에 주한 프랑스대사관을 설계했다. 이희태가 국립극장 설계를 맡았을 때도 45세에 불과했다. 김기웅이 독립기념관, 김석철이 예술의전당 현상설계에서 당선되었을 때도 채 40이 되지 않았다.1 1980년대 말 새로운 기치를 내건 건축가 모임, 4.3그룹은 이름에서도 드러나듯 30~40대 건축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 모두 지금이라면 젊은건축가상 응모 대상자들이다. 그러나 1960년대에도 1990년대에도 저들을 두고 젊은 건축가라고 부르는 일은 드물었다. 모두가 젊을 때 젊음은 젊음으로 호출되지 않았다. 젊음은 나이 듦을 배경으로 할 때만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현대 건축이 나이 든 2010년대 그리 젊지 않은 40대 건축가는 젊음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그들은 건축이 아니라 미술관이나 갤러리 같은 예술 세계의 전시나 공간 구성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 신세대 건축가들을 저 혼자 ‘파빌리온 계열’이라고 부릅니다.”1
파빌리온 프로젝트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 중이다. 건축이 특정 공공장소를 매력적인 곳으로 각인시켜 목적하는 상징성을 극대화하거나, 작은 공간의 효율성을 극대화해 기능성을 충분히 충족시켜줄 거라는 기대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반증한다. 다양한 성격의 파빌리온 프로젝트를 진행한 건축가들이 모여 파빌리온의 건축적, 문화적, 더 나아가 정치적 가능성을 이야기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