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을 가까운 미래의 난민으로 상상해 시스템의 균형을 감지하고 선택하게 하는 참여형 프로젝트로, 2014년부터 지속하고 있는 ‘판매’ ‘대표’ ‘협상’ 시리즈를 영상으로 편집해 상영했다.
작가로서 개인이 온전한 책임을 지는 전시를 4회 경험했다. 그 전시장 네 곳 중 세 곳이 사라졌다. 명동, 홍대 앞, 역삼동, 연남동. 전시장이 있던 위치엔 현재 다른 공간이 들어섰다. 서울은 ‘성인이 되어 태어난 집을 찾아갔는데, 변해버린 동네를 마주하는 기분’이 들게 한다. 서울에서 태어나 꽤 많은 이사를 다녔고, 오래 머문 동네가 없어서 기억은 조각나 있다. 30년을 넘게 살았던 경험은 서울사람이라 말할 수 있는 조건일까? 최근 4년 동안은 서울 이외의 주변을 돌아다녔다. 인천 2년, 고양 1년, 안산 1년. 매년 이사하며 짐을 줄이거나 작품들을 폐기해야만했다. 머문 시간의 증거물은 또 조각내어 담아야 했다. 서울에서 일시적으로 머물 공간을 구했고, 최소한의 짐을 꾸리고 있다. 3팀(명)이 함께 사용할 예정이며, 각각 거주/모임/작업을 위해 임대료의 1/N을 지불한다. 나는 입주 전 비어 있는 5일 동안 개인적인 전시를 하기로 결심했다. 이 전시는 그동안 경험한 개인적인 전시인 <이동을 위한 회화>(2008), <세대독립클럽>(2010), <일시적 기업>(2011), <new home>(2012)을 새롭게 살아가게 될 공간에 재구성하고, 현재의 열망을 단서로 남기는 방식을 택했다. 다시 서울에 머물고 작업하게 된다면 어떤 조각을 남기게 될까? 기억만 하게 될까? 흔적만 갖게 될까?
#1 지금 나는 나를 둘러싼 시스템 그리고 그것에서 사라질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나는 1983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작업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 사람이다. 야구감독을 하셨던 아버지(1943년생)와 오랫동안 은행원으로 근무하신 어머니(1949년생) 사이에서 태어났다. 5층짜리 보급형 아파트가 빼곡하던 서울 강남의 도곡동에서 자랐다. 모두가 주식에 몰두하던 당시 사회 흐름에서 아버지도 벗어나진 못했다. 정년의 어머니는 작은 가게를 열고 싶은 꿈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퇴직금을 포함하여 집안의 모든 돈은 주식에 올인 되었다. 금융위기가 찾아왔다. 집안 경제가 주저앉기 시작했다.
차지량, 〈New Home〉, participation performance, multi channel video, 2011 헌것을 부수고 새것을 만든다. 몇 년 동안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이사를 했다. 주거 지역이 밀집해 있는 도시에서 선택 가능한 영역과 선택할 수 없는 영역이 인식되며 경제능력에 의해 개인의 주거권이 상실되는 것을 경험한다. 옮겨온 동네는 시끄러웠다. 동네엔 여러 헌집이 철거되고 있었다. 단독주택을 부수고 다가구주택을 짓거나 원룸건물을 짓는 공사를 하고 있었다. 어떤 이의 눈에는 도시에 아직 개발할 곳이 많았다. 집은 빠르게 층을 올려가며 공사를 진행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