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라는 직업 전숙희 중간점검 자리를 준비하면서 ‘건축가’라는 말을 곱씹어봤다. 건축학과에 왔다면 모름지기 건축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절에 학교를 다녔다. 그 시절 제일 좋아했던 건축가가 루이스 칸이다. 루이스 칸과 정서적 공감대가 이루어졌던 계기가 있었다. 대학 1학년 때 학과지를 만들면서 편집장이었던 친구의 집에 3일 동안 감금되다시피해서 루이스 칸 평전을 독파한 내용을 글로 실었다. 그러면서 그의 건축과 철학에 매료되었고, 지금까지도 그는 내게 영감을 준다. 일하다가 길을 잃어버릴 때면 그의 말을 떠올리곤 했다. 『침묵과 빛』이나 『루이스 칸 – 학생과의 대화』에서 그가 하는 말을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나고 보니 시적으로 압축적인 표현으로 자기 생각을 말했다는 것을 알았다. “What do you want to be, brick?”이라는 유명한 말도 그 책에 나온다.
5%의 건축과 95%의 건축 전숙희 요즘 ‘5%의 건축과 95%의 건축’ 사이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건물을 잘 만들려면 5%의 건축 방식이 필요하고, 건물이 잘 쓰이려면 95%의 건축의 태도가 필요하다. 내가 요즘 힘든 이유는 정말 멋진 5%의 건축, 많은 사람이 누리는 95%의 건축, 두 가지를 다 하고 싶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열려 있으면서도 다녀간 사람의 마음속에 각인되는 곳을 만들고 싶은데, 지금의 보편적이고 표준화된 방법으로는 그런 건물을 만들 수가 없다. 건물을 잘 만들려는 사람들은 건물을 사적으로만 쓰려고 하고, 공공이 향유하는 건물을 짓는 사람들(주로 공공기관)은 건물을 잘 만들 수 있는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지 못하다. 그러다 보니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다 하는 중이다. 건축 업계 전체가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진 양의 일을 할뿐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의 자기 계발이나 일에 대한 애정 같은 것은 사라졌다. 너무 답답했다.
smallness 전숙희 사무소를 개소할 때 당시 경제 버블이 한순간에 꺼지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건축 시장에 긍정적일까 부정적일까를 고민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smallness’로부터 시작하기로 했고, 스스로를 툰드라의 초식 생물로 생각했다. 육식 동물처럼 먹이를 많이 먹거나 독식하려고 하지 않고 필요한 만큼의 먹이를 천천히 찾아다니는 식으로 생존하기로 했다. 처음에 집중했던 것은 그게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직접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첫 작업이 이상의 집 모바일 갤러리였다. ‘smallness’의 대원칙은 재료의 물성에 답하는 것이었다. ‘What do you want to be, brick?’이라는 루이스 칸의 말처럼, 재료의 특성이 구법으로 이어져서 그것이 건축의 본질이 되는 것을 연구하고 실천했다. 이런 마인드는 2013년 제주 애뉴알레 프로젝트까지 이어졌다.
94학번의 타임라인 전숙희 나는 94학번으로 수능 첫 세대다. 고2까지는 학력고사를 준비하다가 고3 때 갑자기 수능을 본 불안한 세대다. 그때부터 계속해서 사회가 시스템을 테스트하던 시기에 성실하게 몸과 마음을 바쳤다. 97년이 졸업 학기였고 98년 2월에 대학을 졸업했다. 우리나라가 IMF 구제금융을 신청했을 때다. 700~800원 하던 원달러 환율이 2,000원으로 세 배 가까이 치솟았고 주가지수가 300 밑으로 떨어졌다. 자고 일어날 때마다 기업이 하나씩 부도났다. 뉴스를 보고 있으면 국가가 망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로재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내가 마주한 세상의 모습이었다. 3년 동안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일을 했다.
와이즈 건축의 에센스는 ‘실천’이다. ‘행함’에 악센트가 있는 실천은 순전히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다는 뜻에서 출발해 사회를 바꾸고 윤리를 담아내는 데까지 확장되는데, 건축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표현이다. 보통 건축의 말들 속에는 ‘실현’이나 ‘구현’이라는 말을 주로 쓴다. 실현이 가리키는 대상은 ‘마인드’가 아니라 ‘아이디어’고, 실현 ‘했다’고 하기보다 ‘됐다’고 쓴다. 건축가라는 주체와 건축물이라는 대상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럼으로써 건축물도 건축가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로 분립한다. 그런데 와이즈의 건축은 그렇지가 않다. 와이즈의 초기 작업들은 ‘실천’의 정수가 날것의 상태로 담겼고, 지금도 와이즈의 코어에 자리잡고 있다. 박스 모바일 갤러리, 최초의 이상의 집, 포이동 모바일 원두막,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 그것이 발아하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중간점검’은 2010년 전후 무렵 젊은 건축가로 호명되어 지금까지 꾸준히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중진 건축가의 심층 인터뷰 시리즈입니다. 건축가로서의 깊이와 여유가 묻어나는 한편 여전히 치열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그때와 지금, 다가올 미래를 묻습니다. 그리고 건축가 개인의 관심사를 확장하여 건축계에 산재한 이슈를 함께 이야기합니다.
전숙희 마지막 회차의 토론을 시작하겠다. 지난 시간에 이어 산업자산을 조명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산업자산은 건축과 사회의 변화를 가장 잘 드러내는 사이트라고 생각한다. 문화비축기지는 석유라는 자원을 담는 그릇이었고 쓰임을 다한 뒤 새로이 활용하는 제안으로써 탄생했고, 성수연방은 민간이 부동산적 가치를 재해석해 (사용기한이 더 있지만) 리모델링을 한 사례로 볼 수 있다. 먼저 허서구 소장에게 리모델링의 배경, 즉 구조물의 쓰임이 실제로 다했는지를 묻고 싶다.
전숙희 오늘의 주제는 산업자산의 활용이다. 부천아트벙커 B39가 공공에서 산업자산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여준다면 코스모40은 민간에서 산업자산을 다루는 방식을 말한다. 앞으로 산업자산은 더 많아질 테다. 용도 폐기, 도심 확장으로 인한 이전 등 여러 원인이 있을 것이다. 건축물의 노령화 시대를 맞이하며 앞으로 이들을 어떻게 대할지를 고민하는 시간이니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해달라.
전숙희 이번 토론의 소주제는 종교건축물이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두 안 모두 천주교 프로젝트다. 수명 연장에 초대한 여러 프로젝트 중에서 양 끝에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광안리 하얀 수녀원은 신축 당시부터 지금까지의 자취를 최대한 그대로 남겨냈다면 서소문역사공원은 기초를 제외하고 거의 전부를 교체하다시피 리모델링을 했다. 건축가가 프로젝트에 착수하고 가장 먼저 하는 생각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정하는 질문일테다. 그렇다면 오늘 이 두 프로젝트는 그 극단의 사례로 여러 고민의 레이어를 살필 기회겠다.
전숙희 토론을 시작하기 전에 두 분이 “왜 우리가 짝꿍이 됐냐”라고 물어 우회적으로 답을 드렸다. “수명 연장 1회차의 주제는 김수근, 김중업의 건축물로 묶이는 건축자산 이야기였고, 2회차는 일상, 3회차는 종교건축, 4회차는 산업자산이다”라고. 내 말을 쭉 듣고는 “우리 건축물은 평범한건가?”라고 되물었는데 농담을 섞어 솔직하게 말하면 ‘족보 없는 건축’이라고 말하겠다. (웃음) 하나 족보가 없다는 것은 곧 우리 주변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들을 말한다. 구산동도서관마을은 우리네 주거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다세대주택의 다음 스텝에 대한 대답이고, 하나플레이스원 또한 흔한 상업시설 또는 업무시설의 다음 단계를 보여준다. ‘족보 없는 건축’이라고 표현했지만 두 건물 모두 서울시건축상 대상을 받았다. 두 사람의 손에 의해 족보가 생겼다고 할 수 있겠다. (웃음) 먼저 두 분에게 두 가지 키워드로 질문하고 싶다. 설계할 때 기존 건물이 가진 시간과 스케일을 어떻게 느꼈는가?
덜 익은 건축가 젊은건축가상은 독특한 상이다. 상은 업적이나 성과가 뚜렷한 사람이나 작품에 주는데, 젊은건축가상은 소위 잠재력을 가진 사람에게 주는 상이다. 젊은 건축가 지원 프로그램으로 시작한 젊은건축가상은 올해로 10주년을 맞았다. 실은 2005년 신인건축상으로 시작해, 2008년 젊은건축가상으로 개편되어 2018년까지 13해가 되었다. 지난 10월 열린 10주년 전시를 통해 보인 수상자들의 이후 작업은 그들이 건축계에 잘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허영심이 남긴 페허 2008년 10월 전 세계가 뉴욕 발 금융위기로 휘청 거릴 때 우리는 뉴욕에서 사무실을 열고 일을 시작했다. 우리 세대는 1997년 한국의 IMF와 2001년의 9·11 테러로 인한 미국의 경제위기를 거쳐,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 발 금융위기까지 근 10년 동안 무려 세 번에 걸친 경제위기를 경험했다. 그 10년 동안, 글로벌 금융자본의 크기는 1997년에 한 나라의 경제 규모를 망칠 정도에서 전 세계를 망칠 정도의 크기로 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