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큐레이팅이란 정다영 CAW 1기 프로그램이 오늘 ‘참고문헌 읽기’ 발표와 함께 끝났다. 지금 종합토론 시간은 전체 발표자분들을 모두 모시고 이번 워크숍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각자 ‘건축 큐레이팅’ 을 무엇으로 생각하시는지, 그리고 1기 워크숍이 끝난 지금 다시 한번 나누고 싶은 이슈가 있다면 무엇인지 듣고 싶다.
건축의 큐레이팅은 미술과 다르다. 건축이 온전히 예술로 수행되거나 연구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무엇이 다르고,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모아본 적이 없다. 건축 큐레이팅에 대해 건축계가 공유할 만한 공동의 연속성, 규율성, 전문성이 쌓이지 못한 채로 소모되고 휘발되기를 반복하고 있다. 건축의 기획(큐레이팅)을 실무로 삼고 씨름하는 사람이 부족한 상황 속에서 쏟아지는 수요에 휩쓸려 온 것이 아닌가 진단한다. 미술이 아닌 건축에서 ‘큐레이팅’ 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 행위일까. 건축에서 큐레이팅은 단지 전시를 만들고 올리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획’ 이라는 큰 범주 안에서 건축 큐레이팅은 건물을 짓는 일을 넘어선 건축의 다양한 실천적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작업이다. 건축계 내부에서 큐레이팅이라는 활동은 한국에서는 이제 막 진지한 논의를 얻는 시점에 놓여 있다. 이번 건축큐레이팅워크숍(이하 CAW)은 비평의 무대이자 작가와 대중을 매개하는 장소로서 전시, 자료를 발굴하고 그것을 축적하는 행위로서 아카이빙, 건축을 둘러싼 다양한 시각 매체를 읽고 그것을 배치하는 에디토리얼까지 큐레이팅을 둘러싼 내외부의 이야기들을 펼쳐보는 시간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논의들은 2010년 이후 한국 건축의 시간과 현장들을 엮는 키워드가 될 수 있다. 건축 큐레이팅은 앞으로 한국 건축을 둘러싼 여러 난제를 검토하고 도전해 볼 수 있는 영역이 될 것이다.
미술관에서 열리는 건축 전시가 역사적으로 아주 이례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건축이 미술의 관점에서 예술의 한 부문으로 규정되는 데 그치지 않고, 잠재적으로 미술을 재규정할 수 있는 이질적인 힘으로 언뜻언뜻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것은 건축이 미술에 대해 적극적인 공세를 펼친 결과라기보다, 오히려 그런 분과 간 경계가 느슨하게 유동하면서 미술과 건축의 여러 행위자들이 각자 자신이 처한 위치를 인식하고 대처 방안을 모색하는 가운데 일어난 변화다. 그래서 관객 입장에서는 건축 전시가 보여주려고 했던 내용보다 그것이 의도치 않게 노출하는 전시의 맥락이 좀더 흥미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 책의 표지에는 제목이 없다. 그저 거울처럼 둔하게 반짝이는 재질이 표지를 뒤덮고 있다. 이를테면 2006년 『타임』지가 ‘올해의 인물’로 ‘당신’을 선정했을 때, 표지를 유튜브 창이 열린 데스크탑 컴퓨터 이미지로 채우고 스크린 부분을 반짝이는 은박으로 코팅해서 맞은편 얼굴이 비치도록 했던 것을 떠올리면 된다. 당시 이 컴퓨터 모양의 거울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래요, 당신. 당신이 정보 시대를 통제합니다. 당신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하지만 정확히 십 년 후에 나온 『스스로 조직하기』(스티네 헤베르트, 안느 제페르 칼센 엮음, 박가희, 전효경, 조은비 옮김, 미디어버스 펴냄)의 표지에는 더 이상 컴퓨터 이미지도 없고 덧붙이는 말도 없다. 표지는 단순히 저해상도의 반사면이 되어 독자를 맞이한다. 이제 여기에 비치는 것은 당신뿐이다.
2015년 젊은 작가에게 필요한 것 작가들에게 필요한 무대는 어떤 모습일까? 공공미술관의 한 모퉁이일까? 아니면 자유롭고 자립적인 공간일까? 특히 자신만의 작업실마저 갖지 못하는 젊은 작가들에게, 습작과 실패작이 널려 있는 시행착오의 공간조차 없는 그들에게 필요한 전시공간은 어떤 모습일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청년 작가들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면 되는 것일까? 고독과 화해가 들어설 자리가 없는 한국 사회 속에서 청년 예술가들을 위한 활동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커먼센터 디렉터인 함영준과 시각문화 연구자 윤원화를 통해 들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