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시대: 한국 사회의 질곡, ‘40년건축’을 넘어서1편. ‘40년건축’으로 만든 나라 ②
‘노력’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애쓰는 과정으로, 결심과 같은 정신적 활동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에너지, 시간, 자원의 투입을 포함한다. 반면, ‘시도’는 특정 목표를 이루기 위한 행동으로, 이전의 노력이 실패했을 때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는 것을 의미하며, 성공 여부와는 관계없이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 이 글에서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과 실패를 감수하며 시도하는 행동을 구분해 논의하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과 시도가 포기되어서는 안 될 대상으로서 ‘더 나은 아파트’를 고민해보고자 한다.
공동주택의 사회적 현실 공동주택은 서울에서는 이미 80%가 넘는 주택 유형으로 공동주택에서 살지 않는 사람을 주변에서 찾기 어려운 환경이 되었다. 많은 사람이 공동주택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공동주택에 대한 개념이나 이웃에 대한 의미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한 건물에 살고 있지만 함께 사는 공동주택이라는 생각에서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물리적으로는 옆집이지만 전혀 대면이 없거나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함께 산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개별 주택에서 원하는 프라이버시는 점점 강화되고, 함께 사는 공동주택에서의 공동체성은 우리 삶에서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공동주택은 도시에서 필연적인 건물이자 필수적인 생활 공간이며, 분야와 계층을 가로질러 모두의 관심과 역할이 한데 쏠리는 사회의 공통 기반입니다. 마치 공기처럼 당연한 것이어서 누군가는 만들고,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사고팔면서, 커다란 환경이 계속 응축,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진지한 논의 테이블에서 점점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만큼 이전의 논의들이 이제는 보편적 수준에 다다랐다는 반증일 수도 있고, 시장과 자본의 논리가 주거의 조건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정림건축문화재단은 우리 공동주택의 현재 상황과 가까운 미래의 모습을 오랜만에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렸습니다. 2023년에 진행한 <공동주택연구> 포럼에서는 ‘공동주택의 흐름과 공동체성에 대하여’라는 주제 아래 공동주택을 크기에 따라 아파트, 공유주택, 다세대다가구로 구분해서 살펴봤습니다. 이 책은 그 논의의 기록입니다.1.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의 60% 이상이 아파트입니다. 전국에 지어진 아파트는 사회적 경제적 관점에서 우리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치며 매일매일 이야기되는 주택의 형태입니다. 규모가 점점 더 커지면서 그 폐쇄성에 따른 문제점도 커졌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새로운 제안과 시도에 대해 함께 이야기했습니다.2. 10여 년 전 셰어하우스라는 새로운 주거 형태가 국내에 등장했습니다. 치솟기 시작한 1인 주거와 때마침 시작된 공유경제 등의 새로운 사회적 도구들과 맞물려 붐업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셰어하우스는 무브먼트 차원에서 비즈니스 차원으로 포지션을 옮겼고, 최근에는 코리빙하우스라는 네이밍으로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새로운 실험적 유형이 기업화된 사업 모델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무엇이 달려졌는지, 무엇이 그 변화를 가능하게 이끌었는지 이야기했습니다.3. 다세대 다가구 주택은 많은 건축가들이 다양한 건축적 아이디어를 시도해온 공동주택 영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주택의 ‘공동성’과 공용공간에 대한 세심한 연구와 설계를 볼 수 있는 사례가 아직 많지 않습니다. 소규모 민간 주택이라는 이 영역에서 우리는 어떤 공동의 집을 원하고 있는지, 불특정 거주자 그룹 안에서 공용공간은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했습니다.
사회성의 공감대 지금은 건축가들 모두 각자의 미학이나 태도만 이야기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주제의식이 강하지 않다. 사회성과 공공성은 좀 다르다. 내가 이해하는 사회성은 ‘프라이빗’에서 ‘퍼블릭’으로 이어지는 선상에 있지만, 서로 중의적으로 겹쳐진다. 건축가의 ‘사회적’ 역할을 이야기할 때는 ‘공공성’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의 이야기일 것이다. 공공성은 사회성의 하위 영역으로 볼 수 있다. 내가 사회적 역할을 말할 때는 내가 하는 건축 자체가 주변과 어울린다거나 하는 작은 부분이다. 그걸 공공성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작업과 밀접하게 맞닿는 부분에서의 아주 작은 사회성이다. 그 정도 이야기는 의식적으로 하려고 한다.
허영심이 남긴 페허 2008년 10월 전 세계가 뉴욕 발 금융위기로 휘청 거릴 때 우리는 뉴욕에서 사무실을 열고 일을 시작했다. 우리 세대는 1997년 한국의 IMF와 2001년의 9·11 테러로 인한 미국의 경제위기를 거쳐,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 발 금융위기까지 근 10년 동안 무려 세 번에 걸친 경제위기를 경험했다. 그 10년 동안, 글로벌 금융자본의 크기는 1997년에 한 나라의 경제 규모를 망칠 정도에서 전 세계를 망칠 정도의 크기로 커져 있었다.
우리의 주거 공간은 4인 가족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바깥으로는 철저하게 닫힌 내부 지향적 구조다. 1인 가구의 주거는 이것보다 심한 단절을 겪고 있다. 사회적 분리는 물론, 공간도 허술하다 보니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을 넘나드는 경험은 부족할 수밖에 없다. 1인 가구가 급속하게 늘고 있지만, 이미 심화된 공간의 자본화로 마땅히 살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다. 대안으로 공유지를 갖는 ‘혼자 사는 우리 집’이 등장하고 있다. ‘통의동집’ 거주자인 건축가 조재원이 사회학자 노명우를 인터뷰하고, 사회학자 조은이 청년이 가져야만 하는 공유지에 대한 칼럼을 썼다.
집은 개인의 생활 거점이자 실존의 근거 흔하고 당연해져 버린 이 문장에서 읽어야 할 중요한 전제는 이때의 ‘개인’이 ‘사회적 관계 속의 개인’이라는 점이다. 생각해보라. 애당초 인간이 홀로 존재한다면 ‘개인의 생활 거점’이 무에 특별난 의미가 있겠는가. 어차피 혼자 사는 세상이라면 ‘혼자만의’ 공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말이다. 모든 개인은 다른 수많은 개인과 얽힌 관계망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 속 존재이기 때문에 애써 개인 실존 근거로서의 집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아파트, 공동주택에서 집합주택으로 최근 몇 년 새 아파트로 대표되는 공동주택에 관한 글들이 쏟아져 나온다. 『아파트』, 『아파트 한국사회』, 『콘크리트 유토피아』, 『아파트 게임』 등. 반백 년 아파트 생활을 두고 벌어지는 사회적, 문화적 분석과 비평의 시선이 새롭다. 이제 아파트는 공동주택의 한 가지 유형을 넘어서 우리 삶을 구성하고 구조화하는 하나의 문화적 정체성이 된 것 같다.
20~30대 독립생활자들에게 주거는 풀기 쉽지 않은 문제다. 고시원이나 반지하, 옥탑방 등은 안정적인 집의 대척점이자 이들의 불안한 삶을 상징한다. 게다가 그들이 지불가능한 주거공간은 점점 협소해지고 중심에서 멀어진다. 고시원을 연구한 사회학자 정민우의 인터뷰와 디자인연구자 박해천의 칼럼을 통해 ‘99%를 위한 주거’가 무엇인지 질문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