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 공모 과열 전연재(마니) 경기침체로 민간 프로젝트가 줄다 보니 설계 공모 시장이 과열되고 있다. 최근 노원구 자전거센터 공모에 등록한 팀이 400팀이 넘었는데, 실제로 출품한 팀도 60여 팀에 달했다. 설계 공모 시장이 과열되면, 이것이 공정하게 치러진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생긴다. 60팀이 한 공모에 도전한다고 할 때, 각 팀은 최소 1천만 원 이상의 비용을 치르게 된다. 당선 팀 이외 나머지 59개의 사무소가 수천만 원의 손실을 보는 것이다. 사회적 비용이 크고, 이는 결국 열악한 근무 환경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걱정스럽다.
높아진 기준 조세연(노말) 클라이언트의 보는 눈이 높아졌다. 특히 소셜미디어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건축이나 인테리어 지식을 습득하는 방법이 더 많아지기도 했고 정보에 접근하기가 더 쉬워졌다. 인스타그램처럼 이미지 위주로 소통하는 플랫폼이 가장 많이 쓰이는 매체가 됐기 때문에 상업공간을 설계할 경우에는 인스타그래머블한 장소, 한 샷을 만들어내기 위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진지함 30% 함량의 낀 세대 강승현(인로코) ‘앞세대’가 언제인지 누구인지 정의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대상을 좁혀 보면 일단 나의 선생님 세대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분들은 한국성이나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고, 우리나라 건축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짐이 있었을 것 같다. 그래서 건축가로서의 품위와 위상, 권위 등을 중시했고, 그게 태도에서도 드러났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런 한편, 건축을 지나치게 비즈니스로만 여긴 경우도 많았다. 일이 차고 넘쳤다던 1980~90년대에 그런 이들이 절대다수였기에 적절한 설계비 요율, 대가 기준을 만들 기회를 놓쳤다고 본다. 결국 건축가가 이 사회에서 받는 낮은 대우, 설계비 덤핑 같은 수십 년 묵은 문제는 사실 지나간 시기의 특별한 상황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각자 필요와 판단에 의한 선택이었겠지만 후배로서는 아쉬움이 크다.
퇴보한 설계 대가 10년쯤 지나면 건축주들도 혁신적으로 많이 바뀌리라 생각했고, 좋은 공간, 진정성 있는 공간, 건축가의 제안이 살아있는 공간에 대한 가치를 시장에서도 많이 인정해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국내 설계 시장, 비용 등이 확연히 나아졌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어떤 부분에서는 더 열악해졌다. 값싼 설계와 시공을 너무 선호하는 건축주들이 더 많아진 것 같다.
소규모 신축 수요 증가 이주한(피그건축) 우리가 처음 개소한 2015년만 해도 젊은 건축가들이 많이 독립해 사무소를 열었다. 당시 경제 상황을 돌아보면, 그때부터 금리가 매우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부동산에 돈이 많이 풀렸고, 민간 영역의 개인 건축주가 많이 생겼다. 우리도 이러한 시장 변화의 혜택을 받아 프로젝트를 여럿 했다. 작은 사무소, 젊은 건축가에게 차례가 올만큼 일이 넘쳤고, 덩달아 개인 건축주의 다세대주택 품질이 급격하게 올라갔다고 본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다. 정부 정책이나 사회 분위기가 부동산을 압박하다 보니 개인들이 쉽게 “건물 지어볼까?”하는 마음을 먹기 힘들어진 것 같다. 자연히 일 자체가 줄어든다는 느낌을 받는다.
일의 양보다는 종류가 많아졌다. 공공건축의 프로젝트가 늘고 개인 건축주들이 소규모 개발의 주체가 되었다. 건축가의 업역은 날이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주어진 과제를 잘 푸는 건축가보다 스스로 과제를 만들고 자기 일을 찾아가는 건축가가 필요한 세상이 되었다. 초대 건축가들과의 인터뷰 가운데 ‘체감하는 시장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한 건축가 여섯 팀의 이야기를 한데 모았다.
건축가라는 직업 앞에 ‘젊은’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은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젊은건축가상의 시작이 10년 전, 『공간』의 젊은 건축가 연재가 8년 전, 젊은건축가포럼코리아의 첫 파티가 7년 전이다. 2010년 전까지만 해도 새로운 건축가를 만나는 것은 뉴페이스를 찾는 일이 중요 임무인 건축잡지조차도 1년에 한두 명을 만나면 다행일 정도로 매우 드문 일이었다. (당시 『공간』이 이듬해 연재를 이어가지 못한 이유도 취재 대상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해서였다.) 개인 건축가로 독립하는 시기도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지금보다 긴 실무 경험을 쌓고 나서야 독립을 생각할 수 있었고, 독립 후에도 5년 정도가 흘러서야 매체의 레이더망에 잡혔고, 매체가 기사화하기까지는 몇 개의 관문을 더 거쳐야 했다. 저마다 신중을 기하다 보니 수도 적고 시기도 더뎠다. 신인 건축가의 수가 눈에 띄게 늘기 시작한 때는 대형 설계회사의 경영난으로 인해 건축가 엑소더스가 일어났던 5–6년 전부터였다. (해외에서도 1년 정도 앞서 대형 설계회사들의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있었다.) 대형 회사의 경영난이 촉매 작용을 했지만, 전조와 징후는 이미 곳곳에서 간헐적으로 나타나고 있었고, 충분한 조건들이 조용히 쌓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