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실로의 피난
강림, 겜돌이, 냥꾼, 닥터페퍼, 쪠, 채운, 천하장사
분량7,030자 / 14분
발행일2026년 10월 26일
유형대담
잡담회는 두 번째 읽을거리로 23호 『건축, 전시, 큐레이팅』을 골랐다. 이 책은 2019년 1월 시작된 건축 큐레이팅 워크숍을 기록하고 확장하는 취지에서 기획되어 같은 해 8월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절판된 이후 건축신문 웹에 아카이브되었고, 계속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대부분이 설계 실무자인 잡담회 멤버들은 이 책을 통해 건축계의 여러 업역에 관한 이해를 넓히고, 건축 전시와 출판, 건축의 범위에 관해 대화했다.
- 일시: 2026년 4월 17일 금요일 오후 8:00 – 10:30
- 장소: 셀스스터디룸 홍대점
- 참석: 강림, 천하장사, 겜돌이, 채운, 닥터페퍼, 쪠, 냥꾼
차례
- 건축 전시, 왜, 누가
- 매체와 재현
- 온실로의 피난
- 부서지고 헤매기
전시장의 건축이 더 순수할까?
강림: 이제까지는 좀 더 거시적이고 공통적인 이야기를 한 것 같으니, 본격적으로 읽었던 글들에 관해 이야기해볼까요? 각자 흥미롭게 읽은 부분이 다 다를 거예요. 어떤 글에 매료되었는지, 혹은 생각을 많이 하면서 읽었는지 공유해 보아요.
천하장사: 저는 김동신의 글이 인상 깊었어요. 그래픽 디자인과 건축의 유사성에 대한 이야기에도 많이 공감했어요. 그리고 박정현의 글을 읽었는데, 『건축은 무엇을 했는가: 발전 국가 시기 한국 현대 건축』을 읽었을 때의 기억이 많이 떠올랐어요. 그때도 느꼈었는데, 박정현의 문장이 너무 좋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쉽고 간단한 문장임에도 함축적이고 깊은 생각이 담겨 있는 문장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이런 문장은 도대체 어떻게 쓰는 걸까?’라는 생각을 이번에 많이 했어요. 의미를 많이 담으려고 하면 문장이 어려워지고, 반대로 문장을 쉽게 쓰려고 하면 의미가 얕아지는 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많이 사라졌어요.
겜돌이: 저는 배형민의 글, ‘전시 시대의 감각, 사유와 수행’이라는 글이 가장 흥미로웠어요. 제가 건축 전시를 보면서 떠올랐던 생각들을 한 번에 정리해주는 느낌이었어요. 이 글을 읽고 나니 더더욱 건축가가 스스로 주최하는 개인전이 싫어졌어요. 하나의 건축 전시가 의미가 있으려면 건축의 생산자가 아닌 타자의 시선이 필요하다고 봐요. 그리고 건축가는 그러한 타자의 시선에 계속 노출되고 스스로를 계속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큐레이터를 비롯한 독립적인 실천 체계를 가진 외부인이 호출되고, 건축물이 그런 사람들에 의하여 전시로 다시 한번 번역되는 과정이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건축 전문 큐레이터가 필요하고요. 전문 큐레이터가 만들어낸 전시를 건축가가 본다면 많은 공부가 될 것 같아요. 아, 물론 누군가는 싫어할 수도 있겠지만요. 어떤 건축가는 ‘내 의도는 저게 아니었는데 이 사람이 멋대로 곡해했다! 내 의도를 잘못 전달하고 있다!’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대부분 큐레이터에게 감사하겠죠. 아무튼 저는 다시 한번 번역하는 행위 자체가 주는 즐거움과, 그리고 그 번역으로 인한 의미 생산이 건축계에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한 건축가가 ‘저는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설계했습니다!’라고 했을 때, 제가 그 사람한테 가서 ‘당신 생각이 틀린 것 같은데요?’라고 하는 것은 뭔가 이상하잖아요?
강림: 왜 이상하죠? 말할 수 있죠. 누구도 틀렸다고 말할 수 없는 게 이상한 것 아닌가요?
겜돌이: …그래요? 그럼 이 의견은 철회하겠습니다. 결론은, 번역하는 과정은 즐겁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무언가가 어떤 다른 언어로 치환될 때 열리는 공간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고 재생산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생겨나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강림: 전시를 하기 위해서는 독립적인 전문 지식이 있어야 해요. 지금 선택한 이 행위가 결론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지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의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죠. 그런데 건축가들은 버릇이 있잖아요? “나는 그래픽 디자인도 할 수 있고 책도 만들 수 있고 전시도 할 수 있고 모든 디자인 영역을 다 할 수 있다”는 그 자신감 넘치는 버릇. (웃음) 겜돌이가 보기에는 건축가들이 그 독립적인 실천 영역을 침범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닐까요? 전문가를 고용하는 것이 옳다는 말로 들려서 흥미로웠어요. 저도 건축이 다른 매체들로 사이에서 번역되는 과정에서 생산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요. 아직은 건축가들이 그런 타자의 목소리, 외부에서 온 목소리, 번역하려는 목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것 같아요. 기회가 더 많이 생기면 좋겠어요. 저희도 노력해야 하고요. 다른 분들은 어떤 글이 흥미로웠나요?
냥꾼: 저는 (또 논란이 될 것 같긴 한데) 최춘웅의 글 ‘건축가의 실천: 전시와 건물 사이에서 변주되는 것들’을 읽고 삐딱한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이 글을 읽어보면 왠지 건축 전시를 통해서만 비로소 진정한 건축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건축이라는 것 자체가, 한 건축가가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모든 요소를 남김없이 표현할 수 있을 때에만 ‘진짜 건축’이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어쨌든 현실이라는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것이 건축이에요. 설령 짓는 과정에서 건축가가 생각지 못한 현실적인 제약들이 덧붙었다고 해도, 그 제약에 의해서, 그 제약과 함께 만들어진 그 결과물이 건축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 글에서는 현실의 제약을 벗어나서 건축가가 정말로 표현하고 싶은 것을 온전히 표현하는 것이 건축이며 그것은 건축 전시를 통해서 구현될 수 있다고 이야기해요. 현실은 없을 수 있다는 듯이.
또 들었던 생각은, 건축 전시 자체에 왜곡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에요. 건축 전시에서 보았을 때에는 감동적이었던 공간이 실제로 가보았을 때에는 실망스러울 수도 있어요. 만약 그렇다면, 전시되어서 감동을 주었던 그 공간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이러저러한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최춘웅의 글이 그랬던 것 같아요. “어쩌라고?” 싶은 느낌이었어요.
겜돌이: 오늘 굉장히 삐딱하네요! (웃음)
채운: 저도 최춘웅의 글을 가장 재밌게 읽었는데, 저도 처음에는 냥꾼처럼 화내면서 읽다가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건축과 전시를 동등하게 볼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나아갔어요. 학생 때나 지금이나, 일반 설계를 하든 현상 설계를 하든 실제로 지어지지 않게 된 아이디어, 무형의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 것들이 실제로 좋지 않기 때문에 버려지는 것은 아니에요. 실제로 지어진 아이디어만큼이나 의미가 있었던 것들이에요. 그런 선택 과정을, 폐기 과정을 좀 더 의미 있게, 유효하게 바꾸어주는 것이 건축 전시의 가능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건축가의 실천: 전시와 건물 사이에서 변주되는 것들’을 읽으면서 점점 공감이 갔어요.
그런데 냥꾼이 오기 전에 저희가 나누었던 이야기를 기반으로 했을 때에는, 건물과 전시가 동등할 수는 있지만, 서로 교환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건물 없이, 실체 없이, 현실 없이, 아이디어나 관념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건축을 정의하기란 어려운 것 같아요.
그리고 이 글들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이들은 어쩌다가 건축 문화에 이토록 커다란 애정을 갖게 되었을까?’가 궁금해질 정도로 열정이 느껴졌어요. 애정이 있는 만큼 시선은 날카롭다고 느꼈고요. 큐레이터만이 할 수 있는 말도 많았어요. 미술관 건축을 쇼핑 카탈로그에 비교하기도 하고요. 정다영의 글도 이런 이유로 인상 깊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냥꾼: 저도 채운의 관점에 동의해요. 저는 건물을 포함하는 건축 전체에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만약에 건축 전시가 없다면 저희는 정말로 지어진 건물만이 건축이라고 생각하겠죠. 한때 이 땅에 지어질 가능성이 있었던 어떠한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을 테고요.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전시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이미지나 글을 봄으로써 건축을 더 잘 이해하게 될 수도 있어요. 건축 전시가 가지는 의미는 많은 것 같아요. 그러나 제가 불편했던 점은 뭐였냐면, 오히려 전시 속의 건축이 원(原) 건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 지점이었어요. 더 ‘순수’한 건축이라는 거예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닥터페퍼: 저도 최춘웅의 글이 좋았지만, 채운이나 냥꾼의 의견에 어느 정도 공감해요. 이미지 중심의 건축을 보았을 때 제가 느끼는 거부감과 비슷해요. 실제로 현실에 존재하는 제약이 없는 셈 치고 원하는 부분만 도려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윤원화가 ‘건축과 미술 사이에서: 미술관 건축을 전시하기’에서 건축이 미술관을, 그러니까 전시를 일종의 피난처로 생각하고 있다고 짚었는데 바로 그런 피난이 가능하다는 생각으로부터 유래하는 오류라고 생각해요. 그 오류가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일 테고요.
냥꾼 말대로 전시는 분명히 다른 가치를, 의미를 생산해요. 그런데 현실을 제약으로 보고, 제약이 존재하지 않는 피난처로 미술관을, 건축 전시를 선택하는 것은 건축 전시의 의미와는 또다른 문제에요. 도망친 곳에 낙원은 있을 수 없어요. 언젠가는 허물어지게 될 거예요.
천하장사: 이야기들을 들어보니, 저도 파빌리온 건축가들을 보면서 왠지 모를 불만이 마음속에 있었어요. 뭐라고 해야 할까요, 보호받는 건축인 것이 싫었어요. 온실 속 건축이에요. 모든 현실 속 장애물을 미술관이 막아주고, 그 장애물들이 없는 상태에서만 가능한 건축을 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 같아요.
강림: 조금 더 관념적으로 이야기해보자면, ‘현실은 더럽다’는 인식이 있는 거예요. 건축가의 사상, 건축가의 의도, 건축가의 아이디어는 ‘순수’한데 이 더러운 현실에 의해 ‘오염’된다. 그 오염이 너무 싫다. 이런 태도가 미술관을, 건축 전시를 피난처로 여기는 태도와 공명해요. 저도 여러분과 같은 생각을 해요. 저도 그런 태도에 불만이 많아요. 위험하다고 봐요. 극복해야 하는 태도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요.
쪠: 저도 지금 여러분 말씀에 모두 공감해요.
전시를 건축하기
쪠: 저는 정다영의 ‘건축 큐레이터의 말하기’에 꽂혔어요. 앞부분에서 미술관 내 건축 소장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건축 소장품이 아주 적고, 그것이 미술관 내 건축이라는 분과 학문의 위치를 보여준다는 글이었어요.
강림: 여덟 점이죠.
쪠: 참… 반감이 들면서도 부정할 수는 없어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게 만들었던 글이었어요. 어떻게 보면 건축이라는 분야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소수만의 영역이에요. 그럼에도 건축이라는 것이 포섭하는 범위를 보자면 가장 넓은 영역이기도 해요. 소수만의 영역인데 가장 넓은 영역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간극이 있어요. 그 간극을 어떻게 메워야 할지를 다양한 방법으로 이야기해 주는 듯한 글이었어요. 그래서 ‘건축 큐레이터의 말하기’가 제게 개인적으로 의미 있었던 글인 것 같아요.
천하장사: 저는 정다영의 첫 글, ‘공동의 판을 만드는 일’에서 미국은 한국과는 상황이 다소 다르다는 문장을 보았어요. 그래서 무엇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궁금했어요. 미국의 건축 전시계에서는 또 다른 형식이 나타나고 있다는 의미일까요? 아니면 더 좋은 전시가 많이 나오고 있다는 의미일까요?
강림: 전시에 관한 문장이었다기보다는, 그 글의 뒷부분에 미국의 컬럼비아 대학원에는 건축 큐레이터가 될 수 있는 전문 과정이 있다는 정보가 나와요. 한국에서 건축 전문 큐레이터가 되는 공인된 길은 사실 없어요. 정해져 있는 루트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알고 있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분과 학문으로서의 커리큘럼이 있느냐는 것이겠죠. 어떤 대학에서 어떤 강의를 수강하면 건축 전시에 관한 직능을 얻을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직업으로 연결되어야 하는데, 건축 전문 큐레이터를 안정적으로 배출할 수 있는 커리큘럼이 존재하지 않아요. 다음 세대가 건축 큐레이터가 되려면, 정다영처럼 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데 한국에는 그 과정이, 교육과 제도를 거쳐 건축 큐레이터가 될 수 있는 전문 과정이 없다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그런 길이 없다 보니 오히려 『공간』 출신의 기자, 편집자들이 가장 큐레이터에 가까운 프로페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김상호의 글에서 읽어낼 수 있었고요. 그런 의미에서 건축 큐레이팅에 관한 대학원 커리큘럼이 있는 미국은 한국보다는 상황이 조금 낫다는 의미로 말씀하셨던 것 같아요.
천하장사: 네.
겜돌이: 저는 방금 강림이 말한 김상호의 글, ‘연산, 편집, 전송되는 건축’도 흥미로웠어요. 편집의 과정에 대하여 정리해 놓은 글이었는데, 편집 자체가 일종의 전시처럼 보이기도 했고, 건물을 설계하는 과정과 똑같아 보이기도 했어요. 글을 보면 편집은 기획, 정보 처리, 시각화, 검증 이렇게 4개의 엔진으로 구성된다고 하셨어요. 건축물을 설계하는 과정이랑 똑같지 않은가요? 전시의 과정, 편집의 과정, 설계의 과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강림: 정다영은 건축 전시를 가리켜 건축의 전시, 그러니까 건축을 전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전시의 건축, 그러니까 전시를 건축하는 일이기도 하다고 이야기하셨어요. 전시장을 채우는 과정은 분명 건축 설계의 일종이에요. 동선의 흐름을 어떤 방식으로 풀어낼지, 조명은 어디에 얼마나 있어야 하는지, 각종 매체들은 어느 밀도로 그리고 어느 순서로 분포해야 하는지를 모두 결정해야 해요. 건축가가 하는 일과 똑같아요. 하나의 전시를 기획할 때, 전시장에 던져놓아야 할 데이터들의 목록을 정리해요. 그것들이 일종의 프로그램처럼 보이기도 해요. 그리고 그 프로그램의 묶음에 따라 전시의 섹션을 구성해야 하는데, 그 섹션은 조닝처럼 보이기도 하죠. 그리고 개별 조닝에 어울리는 설계가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죠. 전시 방식, 전시 가구의 형태, 매체특정성, 전달해야 하는 분위기…. 그야말로 전시의 건축이죠.
저는 김상호의 글을 읽고 느꼈던 것은, 편집이라는 분야에 대하여 이렇게 체계적으로 정리된 진지한 생각을, 진지한 실천을 하는 분이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한 놀라움이 있었어요. 편집 또한 큐레이팅처럼 당연히 하나의 프로페셔널이라는 생각은 있었는데, 이렇게 직접 마주하게 되었을 때의 충격이 있었어요.
-계속-
잡담회
잡담회는 건축의 이름 아래에서 생산되는 텍스트들을 성의 있게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 후,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를 텍스트로 재생산하는 독서모임이다. 아홉 명의 정규 구성원이 함께하고 있으며, 한 달에 한 번 정도, 한 권의 건축책을 읽고 와서 두 시간 반 동안 이야기를 나눈다. (비건축적인 의미로) 늘 매너리즘에 허덕이고 있기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주실 손님을 환대한다. 잡담회 아카이브: 블로그 / 인스타그램
온실로의 피난
분량7,030자 / 14분
발행일2026년 10월 26일
유형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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