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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와 재현

강림, 겜돌이, 냥꾼, 닥터페퍼, 쪠, 채운, 천하장사

잡담회는 두 번째 읽을거리로 23호 『건축, 전시, 큐레이팅』을 골랐다. 이 책은 2019년 1월 시작된 건축 큐레이팅 워크숍을 기록하고 확장하는 취지에서 기획되어 같은 해 8월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절판된 이후 건축신문 웹에 아카이브되었고, 계속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대부분이 설계 실무자인 잡담회 멤버들은 이 책을 통해 건축계의 여러 업역에 관한 이해를 넓히고, 건축 전시와 출판, 건축의 범위에 관해 대화했다.

건축, 전시, 큐레이팅

  • 일시: 2026년 4월 17일 금요일 오후 8:00 – 10:30
  • 장소: 셀스스터디룸 홍대점
  • 참석: 강림, 천하장사, 겜돌이, 채운, 닥터페퍼, 쪠, 냥꾼

차례

  1. 건축 전시, 왜, 누가
  2. 매체와 재현
  3. 온실로의 피난
  4. 부서지고 헤매기

전시와 건축, 그리고 재현의 문제

강림: 여타 분야의 전시와 달리, 건축 전시에는 재현의 문제가 있어요. 건축 전시에 쓰이는 모든 매체, 그러니까 영상, 모형, 글, 도면 등은 모두 아우라가 없어요. 유일무이한 원본이 아니에요. 도면은 파일만 있으면 언제든지 무한히 출력해 낼 수 있어요. 스케치도 마찬가지고요. 렌더링이나 3D 프린팅은 말할 것도 없어요. 사람들이 미술관에서 겪기를 원하는 것 중 하나는 유일무이한 원본, 가까이 있지만 여전히 멀리 있는 감각을 주는 원본들을 보는 것인데, 건축 전시가 다루는 대상들은 모두 일종의 매체예요. 그리고 당연히, 건축물 자체를 전시할 수는 없고요. 여기에 건축 전시의 특정성이 있는 것 같아요. 흥미로운 가능성인 동시에 한계일 수 있는 지점이에요.

그런데 흥미롭게도, 건축 전시가 드러내 보이는 이러한 매체성을 건축이라는 업 자체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속성으로 보는 경우도 있어요. 예를 들어 르네상스 건축가 알베르티에 따르면, 건축가는 건물을 직접 짓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저희가 하는 일만 봐도 이해가 가는 말이죠. 건축가는 벽돌을 어떻게 쌓아야 한다는 정보를 담은 매체를 생산할 뿐, 벽돌을 나르지는 않잖아요? ‘포트폴리오와 다이어그램’을 생산하는 것이 건축가의 역할이에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건축이라는 업 자체가 본질적으로 직접적이지 않은 거예요. 간접적인 것이고, 다른 말로 매체적이죠. 이렇게 보면 건축을 ‘특정 목적을 위해 매체를 활용하는 업’으로까지 정의할 수 있어요. 건축가는 건물을 짓는 사람이 아니라, 매체, 그러니까 어도비 PDF와 오토캐드와 라이노를 통해서 건물에 관한 특정 정보를 담고 있는 물질을 생산하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이 정의의 함의가 무엇일까요? 오히려 건물은 건축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오히려 건물은 건축가의 업역 바깥에서 결과적으로 존재하게 되어버리는 어떤 것일 뿐이고, 건축은 도면이나 글이나 이미지나 모형이나 기타 등등의 매체 속에, 지시 체계나 투사 속에 깃든다는 것이에요. 더 너그럽게 보아도, 건물은 여러 가지 매체 중에 하나일 뿐이죠. 말하자면 건물의 위상이 격하되는 거예요.

이런 관점으로 건축을 보는 책이 정해욱이 공저한 『가상-건축 Architecture as Fabulated Reality』(이하 가상-건축)과 현명석이 편저한 『건축 표기 체계』예요. 이 학파(?)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는, 건축 전시뿐만 아니라 건축 자체도 일종의 간접성을, 매체성을 지니고 있어요. 이 관점을 인정한다면, 건축 매체의 매체특정성 문제가 두 영역 모두에서 중요하게 부상해요.

건축 전시에서 항상 느끼는 것인데, 원본이 아니라 매체인데 원본성이 있는 것처럼 대할 때 다소 재미있고 기이한 지점들이 생기는 것 같아요. 전시장 아크릴 박스 안에 담겨 조명을 받고 있는 건물 모형을 봤을 때 웃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저희가 일상적으로 만드는 것이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재생산할 수 있는데, 어느 시점에서 고정되어 아크릴 박스에 갇히는 순간 ‘작품’이 되잖아요? 사실 작품이 아닌 것을 전시한다, 이 지점에서 신기함을 느낀 적이 없나요? 소장님 책상 위에 있던 트레이싱지 스케치가 전시장 벽에 걸려 있고 그걸 사람들이 진지하게 바라보고 사진을 찍는다거나…. 재밌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미술품은 단단한 나무 상자에 정교하게 포장되어 비행기로 운송되고, 도착 후에는 관리자의 감시 아래에서 무진동 트럭에 실려서 미술관으로 오고, 흰색 장갑 낀 분들이 조심조심 옮겨서 벽에 걸잖아요? 그 모든 의례가 원본성을 기념해요. 그런데 건축 전시의 전시품들은, 직원들이 직전까지 본드 묻은 손으로 막 만들다가 갑자기 전시장으로 옮기는 순간 전시품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죠. 저는 그 과정이 흥미로워요.

닥터페퍼: 미술에서도 현대미술 쪽으로 올수록 바나나에 테이프 하나를 붙여 두는 등, 건축 전시의 성격과 유사해지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로댕의 조각도 오직 하나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판화 같은 경우에도 원본이 되는 판은 따로 있지만 그림은 여럿 찍어낼 수 있어요. 아, 물론 몇 번째인지도 중요하지만요. 이런 예시들을 생각해보면, 원본이 아니더라도 작품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맞아요. 문제는 원본으로서의 가치가 아닐 경우, 작품의 가치를 어디에서 찾을 것이냐 하는 것이죠. 미술에서는 어쨌든 찍어낸 작품이라도 그 수가 유한하니 몇 번째에 찍어낸 작품인지를 찾는 것 같아요. 건축 전시에는 또 다른 기준이 있지 않을까요?

강림: 그래서 오히려 다른 전시 분야에서보다 건축 전시에서 아카이브, 담론, 역사, 이론과 전시가 맺고 있는 관계가 더 특별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시품이 ‘건축적인’ 사물임을 전시 자체가 증명해야 하니까요. 건축 전시 속의 사물들은 말과 글의 힘에 의해 건축적인 것으로, 작품으로 공인되는 것 같아요. 사물을 둘러싼 그런 말의 힘이 없다면, 건축 전시 속 사물들은 그 자체로는 미술 작품과 동등한 가치를 갖기는 어려울 거예요.

겜돌이: 앞서 말한 것처럼 건물 자체를 전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저는 스케치나 모형 등이 건물에 대한 불완전한 재현이라고 보지는 않아요. 오히려 매체는, 건물 자체에 대한 바라봄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생겨나고, 건축 전시는 그 건축물을 만들어내는 아이디어가 발생한 지점을 다루려 한다고 보았어요. 스케치는 특히 ‘이 건축물을 만들어낸 근원’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잖아요? 이런 아이디어, 근원이 건축 전시가 중점적으로 다루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스케치는 그 아이디어의 기원을 한 명의 건축가에게 특정하기 때문에, 스케치를 작품으로서 전시하는 것이 건축가에게 작가성을 부여하려는 시도일 수도 있어요. 어찌 되었든 건축 전시에서는 한 건물을 탄생시키는 한 건축가의 생각을 밝히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요. 반면, 미술 전시에서는 작가의 아이디어를 전시하는 경우가 잘 없어요. 완성품 자체를 보여주죠. 건축 전시는 완성품보다는 과정에 집중하는데, 앞서 말했듯 완성품, 곧 건물을 있는 그대로 전시하지 못하는 필연적인 한계 때문일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방식을 주로 다루다 보니, 꼭 건축의 아카이브가 아니더라도, 어떤 아카이브를 다루는 데에는 오히려 건축 전시가 잘 어울리기도 하는 것 같아요.

강림: ‘건물’과 ‘건축’의 차이에 관하여 건축가 오스발트 마티아스 웅거스가 한 말인데, 건축물은 특정 아이디어의 아래에 있다는 거예요. 반면 건물에는 아이디어가 없다는 거죠. 이렇게 보면 ‘건축’은 건물보다는 ‘건물을 관통하고 있는 특정 아이디어’를 가리키는 말이에요. 아이디어라고는 하지만, 그리스어로 이데아, 에이도스예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질료와 형상(에이도스)을 나누었죠. 질료는 구성하는 물질, 에이도스는 응당 되어야 하는 형상이고요. 예를 들어 철공의 질료는 철, 에이도스는 공이에요. 플라톤에 따르면 철은 지상에, 현상계에 속한 것이고 공은 이데아계에 속한 것이어서 철공은 늘 불완전한 모방인데,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공이라는 형상은 이미 철이라는 질료에 내재되어 있어 가능성이 있어요. 물론 둘 다 서구의 이분법적인 구별이니 조심해야겠죠.

한편 건물이 아니라 ‘건축물’이 되려면 건물도 있어야 하고 아이디어도 있어야 한다는 말은, 다른 식으로 생각해보면 아이디어 없는 건물도 있다는 뜻이죠. 다른 식으로 보면 건물 없는 아이디어도 있다는 말이고, 그것을 건축으로 보는 거예요. 그리고 여기에서 루도프스키에 따르면 그 아이디어는 집단적일 수 있고, 올지아티에 따르면 그 아이디어는 철저히 한 명의 창작자의 것, 개인적인 것이에요.

겜돌이가 말했듯,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건축 전시에서 ‘아이디어’를 경험하는 것은 어쩌면 건물을 직접 체험하는 것보다도 더 건축의 본질을 경험하는 것에 가까울 수 있어요. 건축물은 현실에 구속되어 있지만 아이디어는 그렇지가 않다는 지점을 넘어서는 함의가 있어요. 이런 관점 속에는 ‘건축 = 아이디어는 건물 없이도 존재할 수 있으며 건축 전시는 그 아이디어를, 건축 자체를 전시할 수 있다’는, 건축 전시의 당위성까지 나아갈 수 있는 중요한 측면이 숨어 있어요.

겜돌이: 가끔 의심스러운 것은, 전시되고 있는 스케치 등이 과연 건물을 탄생시킨 최초의 아이디어로 그려진 것이 맞나 하는 지점이에요. 제가 존경하는 OOO 선생님도 전시를 준비하게 되면 갑자기 새로 스케치를 한다고 들었어요.

저는 그래서 오히려 건축가, 즉 작가의 손끝에서 탄생한 그런 스케치 같은 것보다는, 협업 과정 혹은 건축가가 흐려진 상태에서 발생한 부산물이 훨씬 흥미로워요. 그리고 그 협업 과정을 잘 돌보는 것이 건축가의 역할인 것 같기도 해요. 저는 건축가가 스스로를 큐레이팅하지 않은 전시가 더 재미있게 다가와요. 더 많은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천하장사: 저는 강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이 많아졌어요. 건축에 대한 관습적인 정의에서는, 건축의 영토가 건물을 짓는 일로 애써 좁혀졌어요. 그런데 요즈음에는 이 영토가 점점 넓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강림이 말한 그 관점에서 보면, 건축이라는 영토가 굉장히 넓어져요. 그리고 저는 그 넓어짐은 반겨야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반면, 김동신의 말처럼, 실질적으로 활용되지 않는, 현실에 발 딛지 않는, 떠다니는 생각, 아이디어 자체가 건축 혹은 디자인이라고 정의한다면, 그런 정의를 과연 곱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아이디어 자체가 건축이라면 건축이 엄청 많아질 거예요. 그것이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면, 예를 들어서 아이디어 자체가 건축으로 인정됨으로써 건축가 개인의 아이디어에 관한 전시들이, 건물 없이 매체만으로 하는 전시가 엄청나게 많아진다면, 그 상황이 건축에게 이로운 상황일까요?

강림: 동의해요. 제 생각에도 건축을 아이디어로서, 매체로서 정의하고자 하는 입장에 대해서 가장 의뭉스러운 부분이 그 지점인 것 같아요. 건축이 무엇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사람들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죠? 그리고 그렇게 정의하는 것이 공동체에, 정치체에 실질적으로 어떤 도움이 될까요? 건물을 자본에 헌납하고 건축가들끼리만 맴돌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건물을 잘 짓는 것’이 가지고 있는, 현실과의 자명한 상관과 공동체에 대한 분명한 기여를 어떻게 확장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보아야 하는 것 같아요.

한편 천하장사가 정확한 지점을 짚은 것 같은데, 저는 건축을 아이디어로 보는 관점일수록 건물이 아닌 건축 전시를 좋은 도구로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예를 들어, 어떤 건축가는 그 사람이 설계한 건물보다도 그 사람의 전시가 더 흥미로울 수도 있잖아요? 아키그램과 같은 경우가 그렇겠죠. 아키그램의 아이디어가 지어졌다면 어떻게 되었겠어요? (웃음) 큰일나죠. 작도가 흥미로운 경우인 것이잖아요? ‘건축가의 실천: 전시와 건물 사이에서 변주되는 것들’에서도 최춘웅이 레온 크리어의 의견을 소개하면서 건물이나 구축보다도 전시라는 형식을 훨씬 더 잘 다루는 건축가의 예시를 보여준 것 같아요.

채운: 저는 그 글 속에서 레온 크리어가 “내가 건물을 짓지 않은 이유는 내가 건축가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그 문장을 읽자마자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바로 화가 치밀었어요.

강림: 왜 화까지 내요! (웃음)

채운: 이번 『건축신문』 읽기를 통해서 제가 정말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절감했어요. 방금 강림이 말한 것, 그러니까 건축이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것이 아니고 간접적이고 관념적인 것일 수 있다는 주장이 어떤 말인지 방금 완전히 이해했는데, 그래서 지금 충격이 너무 커요. 저는 ‘나는 이 글들을 읽다 보니까 생각이 조금 바뀐 것 같아’라고 생각하면서 왔는데, 지금 강림의 말을 들으면서 점점 더 화가 났어요. 강림은 그런 주장을 아예 ‘학파’라는 단어까지 써가면서 정리했어요. 그분들이 진짜 어떤 학파를 이루고 있는 것인가요?

강림: 제가 혼자서 그렇게 불러 본 것이에요. 학파라기보다는 그분들이 공유하는 어떤 매체미학적 입장, 포지션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테고요.

채운: 그렇죠. 저도 미드데이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어요.

닥터페퍼: 그때도 화가 났나요?

채운: 생각이 저와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졸업 전시만 보아도 지어지지 않았는데 전시는 가능했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열린 태도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천하장사가 말한 것과 비슷한데, 한편으로는 ‘건물이 아닌 건축’을 말할 수 있는 다른 매체들, 이를테면 전시를 가리켜 누군가는 이것도 하나의 건축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있어요.

저는 현장에 있을 때 친구들한테 계속 놀러 오라고 말해요. 저는 그곳에 감동이 있다고 생각해요. 원본의 감동이죠. 거기서 하이바를 쓰고 있는 그 자체가 하나의 전시를 체험하고 있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친구들도 초대했던 것이고요. 그리고 그 경험은 미술관에서 건물 모형을 보는 것과 차이가 정말 커요. 그렇기에 정말 모든 매체를 동등하게 놓고 그 모든 것이 건축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늘 잡담회를 처음 시작할 때에는 ‘동등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고, 지금까지 제가 닫혀 있었던 것에 대해서 반성했는데, 지금은 되돌아가서 다시 의심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우리 회사의 소장님만 보아도 출판을 위해서, 혹은 전시하기 위해서 스케치들을 다시 그려요. 저는 그렇게 다시 그리는 것이 싫지는 않아요.

강림: 어떻게 보면 건축가들이 평소에 클라이언트와 만나서 발표하는 것, 학생이 교수님 앞에서 발표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전시이기도 해요. 건물을 직접 지어서 보이는 게 아니잖아요. 도면, 모형, 사진, 렌더링 등등 매체들의 배치죠. 그리고 저희가 하는 일은 건축 설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배치의 전략을 만드는 것으로 볼 수 있어요. 매체들을 전략에 따라 배치하는 것이 건축 전시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건축가들이 평소에 하는 행위가 사실 전시에 가까워요.

천하장사: 맞아요. 현상설계 보고서도 일종의 매체이고.

겜돌이: 제가 채운 이야기 듣고 들었던 생각이 있어요. 개인적으로 건축 전시가 가끔 따분하게 느껴지는 지점이 있다면, 건축 전시가 대단히 설명적이라는 점에서였어요. 건축 전시 자체가 일종의 아카이브의 성격을 띠기 쉬워요. 어떤 주제 아래에 있는 방대한 자료를 정리하는 것 자체부터가 어려운 일일 테고요. 정리한 자료들을 또 효과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설명적인 요소들이 많이 포함되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건축 전시가 굉장히 다양한 설명 수단들을, 매체들을 쓴다고 생각해요. 그 점이 때로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채운이 말한 것처럼, 건물에서만 느낄 수 있는 체험의 감각 자체를 전시하는 순간도 오고 있는 것 같아요. 윤원화의 글 ‘건축과 미술 사이에서: 미술관 건축을 전시하기’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어요. 오픈하우스 서울도 있고요. 어떤 공간, 건축물 자체를 전시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게 되었어요. 우리는 건축 전시를 건물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와 정보의 전달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만 오해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만약 건축 전시의 목적이 공동의 감각이나 사유의 토대를 만들기 위함이라고 한다면, 굳이 정보들이 설명적으로 전달될 필요는 없다고 봐요.

겜돌이: 정리하자면, 근래의 미술관 건축에서는 건축물 내의 관람 동선 자체를 일종의 전시적 경험으로 여겨요. 동선 설계를 통해 미술관 건축을 전시하는 것이죠. 안도 다다오도 마찬가지고요. 알바루 시자도 그렇고요. 성산동에 있는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도 그래요. 내부의 전시품을 관람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간 자체에서도 일종의 전시적 경험을 할 수 있어요. ‘공간 경험 전시’라고 불러야 할까요? 그런 시도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어요. 어떻게 보면 이런 방식이 대중들에게 조금 더 다가가기 쉬운 방식의 전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냥꾼, 뒤늦게 입장)

강림: 네. 냥꾼이 왔으니까 5분만 쉬었다 할까요? 냥꾼이 숨을 좀 돌려야 할 것 같아요.

모두: 좋아요.

건축 전시는 왜 필요할까?

강림: 다시 시작해 볼까요? 냥꾼은 이번 책을 어떻게 봤나요?

냥꾼: 솔직히 잘 읽히지 않았어요.

강림: 잘 읽지 않은 게 아니라요?

냥꾼: 아닛, 그럴 수도 있지만…. (웃음) 물론 그럴 수도 있어요. 그래도 이전의 키워드인 프리츠커상에 대한 글들은 재미있게 술술 읽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의 경우에는, 제가 ‘건축’, ‘전시’, ‘큐레이팅’ 이 세 단어와 모두 친하지 않아서 그런지….

강림: 네? (웃음) 건축이랑은 왜 친하지 않아요?!

냥꾼: 걔랑도 별로 안 친하고…. (웃음) 너무 헷갈리고 어려웠어요. 애초에 ‘건축 전시는 왜 있어야 하는 것이지?’라는 생각이 있어서 모든 글을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어요. 결국 다 읽고 나서 들었던 생각은, 건축 전시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 같고 건축 전시라는 말 자체가 이상한 것 같아요. 새로운 단어들이 많이 필요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건축 전시라고 하면 왠지 ‘건축을 전시한다’는 느낌일 텐데, 사실 건축 전시가 건축을 전시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강림: 건축 전시라는 이름으로 쉽게 묶을 수 없는 매우 많은 유형의 실천들을 한 번에 묶으려다 보니까 조금 삐그덕거리는 느낌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똑같이 건축 전시로 묶이지만, 서펜타인 파빌리온과 베니스 비엔날레는 너무 다르잖아요? 겜돌이가 지적했듯이 〈미래긍정: 노먼 포스터, 포스터 + 파트너스〉처럼 건축가의 개인전에 가까운 전시와 〈아키토피아의 실험〉처럼 담론적이고 역사적인 전시를 모두 건축 전시로 정리해버린다면 아주 이질적인 것들이 묶이게 되잖아요. 예를 들어 위 두 건축 전시 사이의 차이가 건축 전시와 미술 전시의 차이보다 클 수도 있어요. 관객들이 오해할 여지가 많아지고요. 저 역시도 새로운 단어들이 필요하다고 느껴요. 그런데 건축 전시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뭐였나요?

냥꾼: 지금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웃음) 처음에 그런 생각을 했던 이유는, 건축 전시 자체가 건축과는 다른 점이 많고, 실효성이 크게 없는 것 같았어요. 예를 들어서 공학과 같은 분과 학문에 대한 전시를 이렇게까지 할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건축은 어쨌든 사용되는 것이잖아요. 만약에 건축을 전시가 가능한 예술품으로 바라본다면 건축 전시가 의미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건축물은 그냥 쓰이는 물건이잖아요. 이런 관점에서는 건축 전시를 왜 해야 하는지 의문이에요.

닥터페퍼: 그런데 공학도 전시회와는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엑스포나 박람회 같은 형식으로 전시를 하지 않나요?

강림: 그러게요?

냥꾼: 그래서 제가 생각해보았을 때에는 건축 전시라는 부르는 것은 이상하고 오히려 건축 박람회라고 해야 하지 않나….

닥터페퍼: 건축 전시와는 구분되는 건축 박람회도 있잖아요?

강림: 그러게요?

냥꾼: 물론 그렇죠. 그런데 제가 말하는 의미 없는 전시는, 건축가의 개인전 같은 류들이에요. 건물 자체를 전시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물론 글들을 읽다 보니 마지막에 가서는 건축 전시에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강림: 어떤 의미가 있죠?

냥꾼: 음….

강림: (웃음) 왜 자꾸 주장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고 중간에 도망가려고 하세요! 솔직하게 해야죠!

냥꾼: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강림: 그럴게요. (웃음)

-계속-


잡담회

잡담회는 건축의 이름 아래에서 생산되는 텍스트들을 성의 있게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 후,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를 텍스트로 재생산하는 독서모임이다. 아홉 명의 정규 구성원이 함께하고 있으며, 한 달에 한 번 정도, 한 권의 건축책을 읽고 와서 두 시간 반 동안 이야기를 나눈다. (비건축적인 의미로) 늘 매너리즘에 허덕이고 있기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주실 손님을 환대한다. 잡담회 아카이브: 블로그 / 인스타그램

매체와 재현

분량9,999자 / 20분

발행일2026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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