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건축가인가? 나는 건축가인가?
강림, 겜돌이, 곰, 냥꾼, 닥터페퍼, 쪠, 채운, 천하장사
분량10,823자 / 22분
발행일2026년 10월 26일
유형대담
잡담회는 세 번째 읽을거리로 40호 『등장하는 건축가들 6』을 골랐다. 이 책은 2024년 7월 진행된 포럼 시리즈 ‘등장하는 건축가들: 구분되기와 구분짓기’의 기록으로, 이듬해 2월 발행되었다. 포럼의 내용은 발표를 원고로 정리한 강연록, 에세이, 영상 등 각 건축가에게 맞는 방식으로 담겼다. 잡담회는 (예비) 건축가의 관점에서 여섯 번째 시즌 건축가들의 생각을 유심히 살폈다. 멤버들은 건축가의 조건과 역할, 말과 글, 과정과 용기에 관해 잡담했다.
- 일시: 2026년 5월 25일 월요일 오후 2:30 – 오후 5:00
- 장소: 정림건축문화재단 라운지
- 참석: 강림, 닥터페퍼, 겜돌이, 곰, 쪠, 냥꾼, 천하장사, 채운
차례
- 누가 건축가인가? 나는 건축가인가?
- 두려움과 실재
- 자연과 실천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상에 남는 글
강림: 오늘은 『등장하는 건축가들 6』이라는 책 아래에서 한번 이야기를 나누어 볼게요. 평소에 인스타그램이나 강연, 포럼을 통해서 자주 보았던 젊은 건축가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분들의 글을 어딘가 다른 데에서 읽었던 경험이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한편으로는 저희가 잘 알지 못했던, 예를 들어 이윤석, 허성범처럼 비교적 접점이 없었던 건축가도 포함되어 있어요.
여러분의 글을 읽어보니 『등장하는 건축가들 6』이 『건축, 전시, 큐레이팅』보다 저희가 다루기에 더 어려웠던 책이었던 것 같아요. 첫 번째로는 저희가 동시대적인 차원에서 이분들만큼의 너비와 깊이를 갖추지 못한 채로 이야기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저희에게는 단편적인 관심사 혹은 지식만 있을 뿐, 이들의 이야기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시야가 상대적으로 아직 좁은 것 같아요. 두 번째로는 저희와 나이 차이가 비교적 적은 세대의 건축가라는 어려움이 있었을 거예요. 그런 측면에서 이들의 글을 완전 친근하게 읽기에는 약간 거리감이 느껴지고, 기성 건축가들의 글로 여기기에는 조금 가깝습니다. 어떻게 이 글들과 적절한 거리감을 확보할 수 있을지 혹은 어떤 위치에서 이 글들을 읽으면 좋을지를 스스로도 계속 고민해 보게 되었어요. 우선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글부터 하나씩 뽑으면서 간단하게 아이스 브레이킹을 하고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닥터페퍼부터 시작해 볼까요?
닥터페퍼: 저는 이윤석의 글이 인상 깊었어요. 『건축신문』을 읽으며 태도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었거든요. 건축을 대하는 태도 혹은 건축을 생각하는 태도에 대해서요. 그리고 태도가 중요하다고 느꼈어요. 그런 측면에서, 제가 이상적이라 믿었던 스타일인 것 같아요.
강림: 구체적으로 어떤 태도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닥터페퍼: 우아하지 않아도 된다, 진실된 태도라 할까요? 솔직함이죠.
겜돌이: 저는 정해욱의 글이 가장 재밌었어요. 제가 이미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는 너무 다른 글이었어요. 저는 종종 인스타그램에서 미드데이의 게시물을 보는데요, 그런 단편적인 글이 아니라 미드데이의 가치관을 제대로 담은 글을 읽어본 것은 처음이에요.
정해욱은 건물을 짓는 일, 건물을 디자인하는 일, 그리고 건축을 분리하고, 이 셋을 동등한 위계로 대해야 한다고 이야기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해욱의 관심의 근간이 되는 것은 건축이에요. 여기에서 ‘건축’은 물질이 아니라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개념적인 것으로, 표현되어야 하고 깃드는 무엇이에요. 따라서 실제로 지어져 있는 건물보다도 더 순수하게 건축적인 무언가를 표현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어요. 저와는 생각이 너무 달라요. 그래서 저는 정해욱의 생각이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쉽게 동의하기는 어렵지만요.
이 책에는 유독 이런 종류의 결을 지닌 건축가의 글이 모여 있는 듯해요. 모두 너무 재미있고 흥미로웠지만, 제가 과연 이 글에 정말로 공감할 수 있고, 동의할 수 있는지를 계속 되물을 수밖에 없었어요. 부정적인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한편으로는 제 생각이 그렇게 쉽게 부정적인 쪽으로 흘러가는 것을 경계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심 ‘그래서 어떻게 지을 건데? 무엇을 지어서 보여줄 건데?’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어요. 물론 관심사가 저와 다를 뿐이겠죠.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것일 테고요. 이들의 생각이나 사고 과정, 앞으로의 행보를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강림: 정해욱은 일상적인, 저희가 공감할 수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와서 건축에 결부시켜 흥미롭게 설명해요.
곰: 저는 그래도 재밌게 읽었다고 생각했던 것은 첫 번째 글인 이희준의 글이었어요. 글을 이 순서대로 놓은 이유도 있는 것 같아요. 전체 글 묶음의 시작을 담당하는 글인데, 아주 어울려요. 가장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았고요. “건축은 영희에게만 중요하다”, 맞는 말인 것 같아요. 내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정말 아무짝에 쓸모없는 것일 수도 있어요. 그리고 공통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도, 그 안에서도 또 지향하는 바가 다를 수 있어요. 그것을 글로 쓰신 것 같아 공감이 갔어요. 마지막 문장은 “지어지는 것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건축이 아니다”인데,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마무리였어요. 그러니까 어떤 것도 틀린 것은 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지어지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것인지.
하지만 정해욱의 글 이후에 배치된 글들에는 공감이 가지 않았어요. 제가 이해를 못 한 것일 수도 있어요. 그리고 공감받기 위해서 쓴 글도 아닌 것 같았고요. 이 글들도 어딘가에는 필요하겠거니, 얼추 맞겠거니 하면서 거리를 두고 읽었어요.
강림: 곰이 그동안 일관되게 고민해온 주제들 중 하나에 관해 이희준이 쓴 것으로 보여요. 각자의 의견, 각자가 생각하는 건축이 너무나 다를 때, 지나친 상이함으로 인하여 교환과 변화의 가능성조차 없을 때, 우리는 도대체 서로에게 왜 건축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에 관해서 곰이 여러 차례 이야기했는데, 그런 고민이 이 글과 연결되는 것 같아요.
쪠: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이희준의 글이 처음에 있었기에 전체적인 글들을 읽어나갈 때 흐름을 잡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곰과는 다르게 ‘내가 더더욱 영희가 되어야 하는구나, 내가 영희로서 어떤 말을 해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이 글을 먼저 읽으니 뒤에 이어지는 글들은 다양한 생각을 하는 영희의 글처럼 느껴졌고, 그 와중에 정해욱이 ‘건물과 건축 사이의 간극을 마치 놀이터처럼 여기며 건축을 탐색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죠. 사실 저희가 건축을 각자 정의하기에는 건축이라는 말이 너무 어렵고 넓잖아요? 놀이터가 무엇인지 정의하기보다는 놀이터 구석 어딘가에서 열심히 놀고 있으면 누군가는 알아봐 주지 않을까, 이런 상상을 하면서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냥꾼: 저도 이희준의 글을 읽으면서 공감을 많이 했어요. 평소에 제가 자주 떠올리던 생각과도 맞물려 있고요. 건축이라는 게 사실 뭔지 잘 모르겠어요. 건축에 대해서 서로 통하는 의견이 있다고 해도, 그 통하는 의견 안에서 또 다른 의견들이 있을 수 있는 거예요. 그 상황을 여러 인물을 보여주시면서 쓰셨던 것 같아요. 나머지 글들도 재미있게 잘 보았고요.
가장 감명 깊었던 글 중 하나는 서문이었어요.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읽어 보았는데, 인상에 오래 남았어요. 이 여덟 명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으려는 듯했어요. 다른 이에게 친구를 잘 소개해 보려는 듯한 느낌도 있었고요.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 이런 환경이 더 많아져야 더 많은 건축가가 등장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야 저희 건축의 토양 또한 더욱 비옥해질 수 있을 테고요.
천하장사: 저는 정해욱의 ‘건물을 떠난 여행의 시작’이 좋았어요. 다른 글들은 건축의 영역을 펼치려는 듯했어요. 펼쳐내는 것, 넓히는 것. 알겠는데, 결론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얻기가 어려웠어요. 그런데 정해욱은 건물을 짓는 일, 건물을 디자인하는 일, 건축 이렇게 세 가지의 정리된 개념을 사용해서, 배경을 잘 모르는 독자로서 반갑고 편했어요. 미니어처와 뒤샹의 샘이라는 예시도 적절했던 것 같아요. 생각해 볼거리가 많아서 좋았습니다. 이윤석의 ‘시도들’에서는, 자기를 설명하지 않는 우아한 건축물 대한 반감이 느껴졌어요. 저는 반대되는 입장에 서 있는 사람으로서 흥미롭게 읽었어요.
강림: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반대되는 입장이라 할 수 있을까요?
천하장사: 제게 아직 확실한 논리가 있지는 않지만, 애써 모든 존재와 대상이 자기를 굳이 설명하려고 해야 하는지 의문이에요. 타자의 관점에서 자신을 계속 보는 것이 아닐까요?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어떤 상태에 있는 존재일 수도 있을 테고요. 모든 것이 타인에게 설명되어야 하는, 타인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 존재여야 할까요? 우아한 혼자가 될 수는 없을지 고민했어요.
채운: 저는 허성범의 ‘우리는 결코 자연적이었던 적이 없다’가 가장 인상 깊었어요. 저도 처음에는 심미선과 이희준이 앞단에 쓴 글을 읽고, 모든 주장이 그 자체로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어요. 풀어주고 가는 느낌이었고, 제 공격성을 낮출 수 있었어요.
허성범의 글은, 현실이라는 시스템 안에서 실무를 하면서 불가분적으로 겪게 되는 제약들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거나 애정을 투사하는 것 같았어요. 저도 그런 것에 관심이 많아요. 개인의 막연한 관심 혹은 흥미를 어떻게 자신의 글로 표현할 수 있는지를 배웠어요. 실제 건물까지는 아직 아니더라도, 아니, 실제 건물이라고 하면 안 되겠죠.
강림: 지금 모두 정해욱 쇼크(?)를 겪은 탓에 건물이라는 단어를 굉장히 조심스럽게 쓰는 것 같아요!
채운: 엄청 조심스러워요. 식은땀이 나네…? (웃음) 아무튼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시선과 관점에 글을 입혀서 주장할 수 있는지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어요. 제 안에 흐트러져 있던 여러 생각들을 텍스트로, 언어로 바꾸어 준 듯한 글이었어요.
강림: 저도 허성범의 글을 가장 인상 깊게 읽었어요. 저는 건축 내적인 일, 아키텍처라는 기율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에도 흥미가 있지만, 그것만으로 건축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고 믿어요. 그리고 건축의 내부에서 건축을 정의하는 것만큼이나 건축의 외부에서 건축이 어떻게 정의당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건축사는 어떤 사회적인, 법적인 의미가 있을까. 건축가는 사회로부터 어떤 권리와 책임과 의무를 부여받고 있을까. 건축가가 한 사회에서 건물을 짓고, 공간과 사람을 배치하고, 도시의 일부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저는 이런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건축을 내적으로 생각해보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믿어요. 그런 점에서 허성범이 쓴 글은, 조금 더 넓은 관점에서 자연과 인공 환경 사이의 관계를 다루었다는 측면에서 흥미로웠어요. 건축을 테크네로 여기는 것이고, 저도 거기에 동의해요.
가장 예외적이었기도 하고, 그래서 인상 깊었던 글을 꼽는다면 사울 킴의 글이 아닐까 생각해요. 사울 킴의 인스타그램만 봤을 때는 그를 오해했던 것 같아요. 모델링 스페이스 안에서 사변적이고 조형적인 탐구를 하는 건축가로 여겼거든요. 그런데 글 속에서 그는 놀랍게도 건축가로서의 책임감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이미지의 시대임에도, 혹은 이미지의 시대이기 때문에 더더욱 좋은 건축과 나쁜 건축을 구별하는 눈을 스스로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며, 그 눈을 갖기 위해서는 레거시 미디어로부터 레퍼런스를 습득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해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사울 킴이 한 말이라고는 도저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내용이었어요. ‘이 사람은 참 건축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히려 가장 MZ스럽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요?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매체들을 철저하게 ‘도구’로 대하고 있었어요.
이들은 건축가인가?
강림: 이 책에 나오는 건축가들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준공된 건축물이 없다는 것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설계 스튜디오를 맡거나, 글이나 이미지를 비롯한 각종 매체를 통해서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어떤 건축적인 사유를 하고 있는지를 그야말로 꾸준히, 최소 5년 이상 계속해서 드러내고 있는 분들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건축가’로서 등장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건물이 없이도 말이나 글을 통해, 건물 외적인 매체를 통해 건축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이러한 상황이 저는 흥미로워요. 여러분 각자가 이러한 상황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궁금합니다.
겜돌이: 『건축, 전시, 큐레이팅』 모임 이후로 다들 생각이 바뀌었을 것 같아요. 건축이 단순히 건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커다란 어떤 추상적인 영역을 지칭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다들 동의하실 것으로 생각해요. 그래서 건물을 짓지 않아도 건축가로서 소개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동의하는 것은 아주 어렵지 않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건물을 짓지 않았으니 건축가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더 이상하죠. 『등장하는 건축가들 6』에 소개된 분들을 가리켜 건축 글 작가라 하거나 건축 비평가라 일컫는 것은 이상해요. 건축가라고 소개하는 게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건축의 다양한 양상들을 포섭하는 단어로서 건축가를 사용하는 것이죠. 그렇다고 저희가 관습적으로 건물 짓는 사람 혹은 건물을 설계하는 사람만을 건축가라고 불러왔던 것도 아니고요.
강림: 저는 이희준의 글을 읽으면서, “지어진 것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건축은 아니다”라는 표현과 그 앞에 있는 지우개 쌓기에 관한 내용을 연관시켜 보았을 때, 물론 그 글 자체가 열린 결말이기 때문에 해석이 다양하겠지만, 지우개 쌓기에 대한 생각이 달라서 지우개 쌓는 일의 중요성에 동의하는 사람들조차도 지우개를 어떻게 쌓아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면, ‘결국 지우개를 쌓음으로써 보여주는 수밖에는 없다’는 의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즉, 지어야 하는 것이죠.
건축이 내부적으로는 그렇게 폭넓게 정의될 수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지만, 아까 말했듯 건축은 외부에서도 정의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려 보았을 때, 건축가들은 건축을 일종의 관념으로 여길 수 있겠지만 과연 외적으로, 즉 그것이 법적·사회적으로 다른 이들을 설득해 낼 수 있는 정의인지에 관해서는 문제가 어려워지는 측면이 있다고 봐요. 그런 점에서도 이 책은 오히려 생각을 다소 복잡하게 하는 글 묶음이었어요.
곰: 저도 비슷하게 생각해요. ‘나는 건축가인가?’라는 의문이 저는 종종 들어요. 누군가에게 저 스스로를 소개할 때, ‘건축가 곰입니다’라고 소개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럼 여기에 소개된 이들과 저는 무엇이 크게 다를지 생각해보면, 건물을 지어본 적이 없는 것은 이들이나 저나 똑같아요. 처음에는 당연히 ‘이것도 건축이지, 저 사람도 건축가지’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마지막에는 다시 돌아왔던 것 같아요. 결국에는 건물을 지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고민이 더 많아진 것 같아요.
강림: ‘나는 건축가일 수 있는가, 나는 건축가로서 다른 사람 앞에 등장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죠.
곰: 그런 거죠. 제가 아까 공감할 만한 글이 몇 개 없었다고 이야기했던 것도, 한편으로는 제가 이분들을 건축가로서 인정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해요. ‘이들은 건축가인가?’ 왜냐하면 저도 저를 건축가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지어진 것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건축이 아니다.” 어쩌면 저는 이 문장 그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요.
겜돌이: 강림이 말한 법적·사회적인 인정의 문제, 책임의 문제, 외부에서 정의된 건축, 이런 논의들은 건축사와 건축가라는 단어의 용례 문제로 이어진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이 책은 ‘등장하는 건축가들’ 이지 ‘등장하는 건축사들’이 아니잖아요? 법적·사회적 책임을 감당할 수 있어야 건축가일까, 이건 사실 굉장히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해요. 외부의 시선을 끌고 와서 건축을 제약하는 조건으로 삼아야 하는지 의문이에요.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을 읽을 때 너무 힘들었어요. 제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너무 힘들었고요. 그래서 더욱 쉽게 삐딱하게 바라보게 되는 것 같아요. 아까 이야기했듯이 ‘그래서 어떻게 지어서 보여줄 겁니까?’라고 되물어보고 싶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한편으로, 저는 그런 말 자체가 건축가의 등장을 막는다고 생각해요.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것에 관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말해야지, 이들의 주장 바깥에 있는 무언가를 가져와 논의를 뭉개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괜찮을까요? 그런 비판도 완전히 거부될 수는 없겠지만요. 적어도 어느 정도 선까지는 외부 없이 이들의 이야기에 관해서만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이런 식의 읽기가 굉장히 어렵고 복잡한 일은 맞다고 생각합니다.
채운: 이들이 건물을 짓지 않았음에도 건축가라 불리고 인정되는 상황에 대해 생각해보면, 건축가는 나름대로 건축에 관하여 의도를 가지고 사고하고, 그 결과를 어떤 매체, 미디엄을 통해 표현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사람들이 건축가라 불리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그 매체가 건물, 즉 물리적인 형태였다면 지금은 여러 가지 이유로 다른 매체들이 많이 채택되고 있어요. 온라인 플랫폼이 발달했고, 건물을 짓기 어려운 현실적인 상황도 있고요. 그러다 보니 이들까지 건축가로서 등장하게 된 것 같아요. 의도를 표현하고 건축에 대해서 사고하는 사람이 건축가라고 생각해요. 이 범위에는 동의하는 것이죠.
한편으로는 저도 결국 여기서 소개된 분들의 웹사이트나 인스타그램 등에 들어가서 무엇을 지었는지 찾아보게 되었어요. 저도 모르게 그들의 말하는 의도와 사고가 실제 현실에서는 어떻게 드러나는지, 어떻게 검증할지를 확인하고 있더라고요. 그런 점에서는 헷갈리기도 했어요. 건축가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현실 속 사람들이 건물을 경험하게끔 하기 위해 많은 법적·사회적 제약을 통과할 수 있어야 해요. 혼자 순수한 건축을 한다면 오히려 예술가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아요.
여전히 헷갈리네요. 『건축, 전시, 큐레이팅』을 읽은 이후로 제가 갖고 있던 통념, 그러니까 실무 중심적인 건축만이 ‘건축’이라는 통념이 많이 부서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요.
닥터페퍼: 그러면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실제로 지은 건물은 없지만 언리얼 엔진 등을 사용해서 설계한 건물이 있다면, 그것은 건물을 짓는 행위와 얼마나 멀리 있는 것일까요?
채운: 저는 실재하는 몸이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여기에 또 역사적인 개념이 들어오면 복잡해질 텐데…. 가상에서의 공간 경험은 누구나 할 수 있잖아요?
닥터페퍼: “누구나 할 수 있잖아요”라는 말을 듣고 느낀 것은, 그게 바로 건축사와 건축가를 분리해서 생각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라는 것이에요. 건축사의 경우에는 법적인 책임이 따르기 때문에 의무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반면, 건축가의 경우에는 그 문턱을 낮추면 낮출수록 유입이 늘어나고, 풀이 넓어지고, 생각이 다양해지고, 발전할 수 있다고 봐요. 누구나 할 수 있을수록 중요한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곰의 말처럼, 왜 저희는 스스로를 건축가라고 부르지 못할까요? 어떤 의도를 갖고 건축에 대한 생각을 매체에 남기는 것이 건축가라면 저희도 지금은 건축가인 것일 텐데, 왜 스스로를 건축가라 부르지 못할까요? 건축가라는 명칭 자체의 권위에 영향받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자유로운 의견 공유를 위해서는 그 명칭에 부여된 권위를 낮춘 상태에서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강림: 지금 여러분이 나누고 있는 말씀은 정해욱의 글, ‘건물을 떠난 여행의 시작’과 이어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아요. 건축은 일종의 메타적 이데아이기에 사후에, 그러니까 나중에 부여되는 것이라는 표현을 떠올려봐야 해요.
예를 들어 저희는 의도를 갖고 건축에 대한 사고를 하며 그것을 매체에 표현하는 인플루언서인 공간교과서(@space.textbook)를 가리켜 건축가라고 하지는 않잖아요? 반면 하이퍼스팬드럴의 전재우는 당연히 건축가라 생각하지 않나요? 이런 사례들까지 따져보면 정해욱의 입장에서도 단순히 ‘의도가 있느냐, 사고를 하느냐, 표현을 하느냐’의 문제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에요. ‘그것이 건축적으로 유효한가’까지를 따져보아야 하는 거예요. 그리고 ‘건축적으로 유효한가’를 따져보려면 ‘건축이라는 메타적 이데아가 그 속에 깃들어 있는, 그 말이 건축적으로 의미가 있는 말이냐, 건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말인가’까지를 따져보아야 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잡담회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이 이야기가 정말로 건축적인지, 건축에 부합하는 메타적 이데아가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어요. 저희도 모르고요. 때문에 잡담회의 이야기가 어떤 매체에 실리더라도 저희가 스스로를 건축가로서 내보일 수 없을 수도 있어요. 반면 정해욱, 전재우의 글은 건축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그 글 자체가 기존에 있던 건축적 통념을 겨냥하고 있어요. 다시 말해, 기존에 있던 메타적 이데아를 부정하거나 계승하는 방식으로 가능해지는 글들을 쓰고 있어요. 이를테면 하이퍼스팬드럴이 기념품을 파는 이유를 따져보려면 많은 건축적 아이디어를 끌어 와야해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100% 이해하기에는 쉽지 않아요.
건축이 메타적으로 사후에 깃든다는 것은, 건축의 이론과 역사, 현대 건축의 전개 과정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이미 있어야 어떤 글, 행위가 타당한지를, 유효한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에요. ‘기존의 건축 서사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것은 건축이 맞다’고 사후적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거예요. 따라서 정해욱이나 전재우의 말을 따라가더라도 건축이 너무 넓어진다거나 건축의 문턱이 낮아진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아키텍처에 대한 이해를 더 요하게 될 거예요.
-계속-
잡담회
잡담회는 건축의 이름 아래에서 생산되는 텍스트들을 성의 있게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 후,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를 텍스트로 재생산하는 독서모임이다. 아홉 명의 정규 구성원이 함께하고 있으며, 한 달에 한 번 정도, 한 권의 건축책을 읽고 와서 두 시간 반 동안 이야기를 나눈다. (비건축적인 의미로) 늘 매너리즘에 허덕이고 있기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주실 손님을 환대한다. 잡담회 아카이브: 블로그 / 인스타그램
누가 건축가인가? 나는 건축가인가?
분량10,823자 / 22분
발행일2026년 10월 26일
유형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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