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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제도, 문화의 산물

김상호

제도는 문화의 산물이다. 한 사회 안에서 논의와 합의를 거쳐 하나 하나 세워지는 것이 제도다. 십계명처럼 하늘에서 누군가의 손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제도가 세워지기까지 사회적 합의 과정은 본래 길고 복잡하기 마련이고, 그것이 마땅하다. 많은 난관을 뚫고 살아남은 공동의 합의가 비로소 하나의 제도가 된다. 어떤 것은 관습이 쌓여 느리게 만들어지고, 또 어떤 것은 법을 통해 빠르게 만들어진다. 길든 짧든 주어진 시간 동안 제도는 그곳의 문화를 흡수하고 저장한다. 우리는 스스로, 함께 정한 제도를 바탕으로 공동의 삶을 꾸려나간다. 그렇게 제도는 다시 문화를 토대가 되고, 문화는 다시 제도를 낳는다.

공공건축 제도가 세워지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것은 무엇의 산물일까’ 생각했다. 공공건축 제도는 ‘제도적으로는’ 더 나은 건축문화 위에 시민의 삶의 질을 올려놓기 위해 제정된 건축기본법의 산물이다. 하지만 공공건축 제도를 두고 오가는 이야기 속에는 그런 정신은 별로 들리지 않는다. 온통 시스템 이야기다. 시스템이 곧 제도니, 결국 제도를 위한 제도, 조금 너그럽게 풀어쓰면 이념적 제도를 현실에 구현하기 위한 방법 차원의 제도를 둘러싼 말들이 돌고 돈다. 이야기 속 가장 중요한 주인공은 공정성, 무결성, 일관성, 효율성 들이다. 공공건축 제도 논의가 몰두하고 있는 구체적 대상은 공공업무 규약, 서류 양식, 검토 절차, 행정 구속력 같은 것들이다. 현실에서 제도가 잘 작동하도록 해주는 장치와 도구다. 잘만 만들면 시스템을 통해 수준 높은 건축문화와 삶의 질을 일궈낼지도 모른다. 공정하고 완전무결하고 일관된 하나의 통합 시스템, 그것만 있으면 우리에게 좋은 공공공간과 삶이 보장되는 것일까.

지난 2024년 공공건축지원센터 설립 10주년을 핑계 삼아 공공건축 제도를 둘러싼 여러 목소리를 들었다. 제도를 세우고 운영하는 이들의 고민을 요약하면, ‘시스템 개선’과 ‘피드백 내실화’였다. 형식과 내용을 갱신하고 둘 사이의 불일치를 손보는 것이었다. (현장에서 오간 말들을 그대로 옮겨 공유하고자 했으나 그건 ‘시스템상’ 불가했다.) 좋은 취지고 필요한 논의였다. 그러다 문득 마음 한구석에서 이 자체가 우리 문화라는 생각이 올라왔다. 법과 제도, 절차와 양식을 넘어설 수 없는 문화. 우리는 그런 종류의 문화 속에 우리 삶을 꾸리고 있는 것이다. 법과 제도로 규정할 수 있는 형태 이상을 논의할 수 없는, 자기 삶과 생활 양식조차도 제도의 틀에 맞춰보지 않고는 그릴 수 없는, 문서에 명시된 것 너머를 상상해서는 안 되는, 벽들로 둘러싸인 삭막하고 궁핍한 문화다.

옴짝달싹할 수 없이 꽉 짜인 제도의 틀 안에서 한 해에 1,000개가 넘는 공공건물이 새로 생긴다. 수도권에 대충 50%를, 나머지 50%를 광역자치단체 14곳에 나눠서 단순히 계산하면, 크고 작은 도시에도 해마다 30-40개, 수도권에는 300-400개의 공공건물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 숫자는 최근 크게 줄어든 것이고, 처음 공공건축 제도와 기관이 세워지던 2015년 무렵부터 세면 지금까지 대충 1만 개의 공공건물이 지어졌다. 내가 봐온 이런저런, 고만고만한 공공건물들이 우리 삶에 정말로 필요한 건물들일까? 거기에 쏟아부은 온갖 노력, 시간, 자원, 재원은 우리 삶을 정말 풍요롭게 만들고 있을까? 그렇다고 생각되는, 그럴 거라 믿고 싶은 당선작들을 초청했지만, 다른 수천 개의 사정은 알 길이 없다. 공공건축의 법과 제도의 초점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말 그대로 ‘스쳐 지나가는’ 주민 의견 수렴과 공청회를 요식행위로 지적하는 기사가 올라온다. 자문자답할 말은 여기 다시 적지 않아도 이미 차고 넘친다. 포럼을 시작한 2021년부터 2024년까지 우리가 나눠온 이야기 모두가 그 자답이다. 공공건축 당선작의 안녕을 이야기하기 전에, 공공건축 제도의 효율성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저 질문부터 해야 한다.

제도로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제도가 볼 수 있는 곳이 있고 볼 수 없는 곳이 있다. 어느 선까지는 제도의 손에 이끌려 다다를 수 있지만, 그 너머부터는 자율과 선택, 논의와 합의의 영역이 펼쳐진다. 다시 문화의 영역인 것이다. 그곳에서는 문화의 산물이었던 제도가 다시 분해되어 흙으로 돌아가고 (분해되진 않을 테니 주춧돌이라도 되어) 다음 문화가 싹트는 토양이 되어야 한다. 굳어져 변하지 않는 제도, 올라설 계단이 놓이지 않는 제도는 발목의 족쇄, 머리를 짓누르는 바윗덩이가 된다. 그러니 제도를 바꾸고 다듬는 것을 두려워하고 망설여서는 안 되며, 제도의 영향 아래 있는 삶의 양태를 살펴야 한다. 문화를 가꾸듯 제도도 가꾸는 것이다.

김상호 건축신문 편집자

에필로그: 제도, 문화의 산물

분량2,294자 / 4분

발행일2026년 4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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