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공동체를 다시 생각하기: 갈등적 공공성과 재귀적 대표성
홍철기
5,687자 / 10분 / 도판 2장
칼럼
실패한 것은 민주주의의 미래
우리는 이제 굳이 ‘정치적인 것’의 개념과 ‘경합주의’ 정치이론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공동체란 언제나 분열적이며 ‘공동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혹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이름에 걸맞게 둘, 혹은 그 이상으로 쪼개진다는 사실을 너무나 당연시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지난 대통령 선거 결과는 단순히 제도화된 정치의 장 안에서 경쟁하는 둘 혹은 그 이상의 정파 내지는 정당들 중에서 누가 더 상대적으로 많은 득표를 했는가의 문제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처럼 보였다. 선거의 결과는 공동체 전체의 분할 비율이 반영된 것이라는 인상을 승리한 측과 반대 측 모두에게 각인시켜주는 듯했다. 따라서 여전히 선거란 그 결과가 박빙의 불확정성에 열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기적 자유경쟁 선거를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보았던 절차적이고 이른바 ‘최소주의’적 관점 이론가들의 예측과 달리, 패자가 다음 기회에서의 승리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결과에 승복하는 아름다운 “민주주의의 기적”(아담 셰보르스키)을 더 이상 기대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선거의 결과란 더 이상 공동체를 분할하는 본원적인 갈등과 적대의 차원 (‘정치적인 것’ 혹은 친구와 적의 구별)을 다원주의적이고 제도적인 ‘정치’의 차원을 통해 완화한 상대적 결과라기보다는 바로 ‘정치적인 것’ 자체의 절대적 표현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대중정당의 쇠퇴와 함께 (하버마스의 말을 따르면) “거리의 압력”, 혹은 날 것의 사회적 갈등이 어떤 매개도 거치지 않고 완화되지 않은 형태로 제도 정치 안으로 유입되면서 정치와 정치적인 것 사이의 구분이 무너지는 상황에서는 심지어 패자만큼이나 승자 또한 선거의 결과에 승복하거나 그 정당성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드러나게 된다. ‘독재자의 딸’ 대통령 당선과 끝나지 않는 부정선거에 관한 논란은 분명 표면적으로 민주주의 실패와 유신 독재시대로의 회귀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외형적 유사성과 달리 본질적으로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은 바로 선거가 약속했던 민주주의의 이상에 대한 ‘탈주술화’와 실망이다. 실패한 것은 민주주의 자체라기보다는 주기적 자유경쟁 선거가 약속했던 민주주의의 미래였다. 이러한 실망은 보다 능동적인 증오로 발전하는데, 자크 랑시에르의 적절한 표현에 따라 이중적 의미에서의 “민주주의의 증오”, 즉 민주주의에 ‘의한’ 증오이자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가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