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물 없는 자본주의 기독의 신학에서 시간은 인간이 소유할 수 없다. 그래서 시간은 신의 선물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서유럽의 역사에서 소유할 수 없는 시간을 소유하여 시간의 흐름에 따라 돈을 받는 고리대금업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당연히 이들은 신학적 입장에서 배척 받았다. 그들은 유대인이었다. 민족의 삶을 영위할 영토가 없이 떠돌며, 항상 쫓겨날 각오를 하고 살았던 그들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시간이라는 황금이었다. 일정한 돈을 빌려주고 시간에 따라 이자를 받는 일은 건물이나 땅을 소유하는 것보다 비교적 안전한 일이었다. 서유럽의 기독교인들에게 유대인의 그런 행태는 신의 선물을 모독하는 것으로 비춰졌다. 서유럽의 유대인 박해는 이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유대인에 대한 악감정과 인종주의적 편견, 그리고 기독교 신학에 대한 입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결국 아우슈비츠의 비극은 히틀러의 광기만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모든 서유럽인들의 공모였다. 그러나 이미 서유럽의 금융업을 장악한 유대인들에게 양차세계대전은 새로운 국면을 준비하고 있었다. 세계자본주의를 금융자본주의로 재편하는 일이었다. 나는 지금 남한의 사회구성체를 ‘신자유주의 식민지 부동산자본주의’로 규정한다. 양차세계대전을 기회로 성장한 금융자본주의는 이제 전세계에서 현물없는 자본주의를 팽창시키고 있다.
당신 건축가 맞나? 10년도 더 전에 쿠알라룸푸르에서 일하던 때였다. 늘 하던 대로 외주업체들과의 공식미팅 자리였다. 나는 기계, 전기, 구조, 소방업체들에게 건축에서 원하는 사항들을 주욱 얘기했고, 그들의 의견을 듣고, 문제점들을 찾아 해결책을 궁리했다. 나는 내 아이디어를 얘기했고,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전문적인 얘기들은 점점 더 깊이를 더해갔다. 그러던 중에 한 업체의 대표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눈짓을 줬다. 그러자 그가 나에게 대뜸 하는 말이, “당신, 건축가 맞나?”였다. 나는 그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도 그걸 알았다. “당신은 설비의 문제에 있어 당신의 디자인과 관계된 얘기를 하면 된다. 그렇게 해서 생기는 문제는 우리가 해결하는 것이다”는 것이 그의 얘기의 골자였다. 그리고는 이어지는 얘기가, “당신은 건축가가 아니라 마치 설비 전문가나 구조 전문가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말에 좀 충격을 받았다. 한국에서 건축교육을 받을 때 나는 당연히 건축가는 그 모든 것에 정통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공부를 하고 경험을 쌓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한국에서는 꽤 유능한 건축가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마치 내가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결격을 가진 건축가처럼 얘기하는 것이었다.
김중업의 건축을 ‘표현주의적이다’라고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김중업의 건축은 ‘표현주의이다’라고 하는 것은 틀리다. 같은 흐름에서 김중업의 건축을 모더니즘 건축이라고 하는 말도 틀린 말이다. 그의 건축이 모던하게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