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발제 제목은 ‘한국미론의 실체’입니다. 그런데 나는 한국미론은 실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깡통 발제인 셈이지요.”
‘한국성’이란 개념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찌 보면 우리가 그만큼 타자화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강연 제목을 ‘한국’, ‘철학’ 그리고 ‘현대’라고 쓰고, 각 개념어에 따옴표 처리를 한 이유는 이 개념들 모두 20세기부터 사용된 용어로, 단 하나도 전통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개념, 또는 그런 틀을 사용하여 우리 것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고향을 향한 마음이 강렬해지는 것은 타향에 있을 때입니다.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 ‘한국다움’으로부터 상당히 멀리 있으므로 자꾸 한국다움을 이야기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 포럼을 준비하며 처음 심사위원 셋이 모였을 때를 떠올렸습니다. 한국성을 주제로 삼는 공모전의 제목을 정해야 하는데, 한국성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부담스러웠어요. 하지만 정면 돌파를 하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한국성을 다시 이야기한다면, 과거의 논의와는 달라야 한다는 데에 뜻을 모았습니다. 그런 공감대 안에서 ‘지금, 한국성’이라는 주제를 던졌습니다. 지난 시간에 민주식 교수님이 선언한 것처럼, 저도 한국성의 어떤 고유한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작성한 주제설명문은 ‘왜 지금 다시 한국성을 질문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우리가 마주한 상황을 이해하고, 한국성을 질문한다는 것은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위와 태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제 글은 졸문이므로, 다른 글을 빌어서 생각을 펼쳐보려고 합니다.
저는 한국성을 이야기하는 일이 굉장히 설레고,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으로 한국성이라는 게 쉽게 정리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도 하고, 제가 느끼는 것이 한국성인지도 모르겠어요. 그저 한국에서 활동하는 한 명의 건축가로서 제가 갖고 있는 태도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1. 한국미 담론의 의미 우리는 요즈음 ‘한국미’라는 말을 흔히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 실체가 과연 무엇이며 또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는지를 말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한국미라는 것은 이전부터 주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미에 대한 논의가 시작됨으로써 비로소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발단은 1920년대에 접어들어서이다. 초창기에는 비록 외국인 연구자들에 의해 행해졌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기고 있지만, 이후 이를 바탕으로 하여 오늘날까지 활발한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야나기 무네요시와 고유섭이 제시한 한국미론이 현재까지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는 주로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한국미를 조명하려 했으며, 나아가 90년대 이후 세계화를 맞이하며 글로벌 공동체라는 시야 속에서 한국미가 무엇인지를 고찰하려는 반성이 일기도 하였다. 우리는 한국미를 바라보는 시각이 이처럼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미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언제나 움직이며 변화하고 있으며, 또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한국성이 불거지는 조건 우선, 건축에서 한국성이 늘 문제가 되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을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성이란 이슈가 한국 사회 전반의 문제로 등장했던 것은 특정한 시대적 조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적인 예로 김수근 선생과 강병기 선생 등 일본 동경대학에서 유학하고 있던 대학원생들이 1959년에 국회의사당 현상설계에 참여했는데요. 현상설계 지침을 확인해보진 않았습니다만, 당선안으로 미루어보건대 우리나라 최초의 국회의사당 현상설계임에도 ‘한국성을 어떻게 구현하라’든가 ‘전통을 어떻게 표현하라’는 요구 조건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승만 대통령의 호를 딴 우남회관이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자리에 지어집니다. 이 역시 굉장히 기념비적인 건물이고, 타워 부분이 10층 정도 높이로 상당히 높은 건물이었죠. 광화문 앞 육조거리라는 장소성에도 불구하고 한국성을 어떻게 구현해내라는 이슈는 전혀 불거지지 않았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이 해방된 후, 기념비적 건축물은 규모가 크든 작든 하나둘 건립되었지만, 한국성이 문제 되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1940~50년대는 한국이 미국 주도 아래 재편되는 전후 국제 사회 속에 어떻게 자리를 잡을 수 있느냐가 더 큰 문제였습니다. 한국 국가 예산의 90% 이상이 미국의 국가 원조로 이루어지던 시절에는 한국성이란 문제가 크게 불거지지 않았다는 것이죠.
본 대담은 ‘뉴 셸터스: 난민을 위한 건축적 제안들’ 전시와 연계해 개최한 ‘난민 포럼’ 중 사회운동가 겸 언론인 홍세화의 ‘세계 난민의 현실과 한국을 찾은 난민들’과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의 ‘난민, 사회적 존재, 그리고 인권’ 강연에 이은 대담 및 관객과의 대화를 녹취·정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