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온 곳들을 위한 송가
임흥순
10,143자 / 20분 / 도판 10장
작업설명
1959년, 서울 창신동의 봄
1959년 봄, 쌍꺼풀이 큰 눈에 얼굴은 통통하고 두 갈래 댕기머리를 하고 있는 17살의 내가 있다. 동대문이라 불리는 흥인문에서 멀지 않은 이곳은 내가 처음으로 밟은 서울 땅, 창신동이다. 서울에 올라온 지 1년이 채 안 되어 둘째 동생은 고열로 사경을 헤매다 보름 만에 죽었다. 아버지는 병원비가 아까워서인지 집에서 치료를 해도 나을 거라고 했다. 그렇게 버티다 죽은 동생의 나이가 겨우 10살이었다. 10년 후 막내 동생도 시름시름 앓다가 둘째처럼 이 세상과 인연을 끊어야 했다. 막내의 나이 17살. 내가 서울에 올라왔을 때와 같은 나이였다. 서울의 공기가 동생들과 맞지 않았나 보다 생각했다. 가끔 동생들이 아들이었어도 병원에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슬픔이었지만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것은 아마도 고지식하고 말이 없던 아버지가 동생들의 죽음보다 무서웠던 탓도 컷을 것이다. 서울은 생각보다 훨씬 춥고 서늘했다. 한 남자가 집으로 자주 찾아와 아버지에게 술대접을 했다. 술을 좋아하는 아버지는 남자의 술대접에 무척 행복해했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던 남자는 두 갈래의 내 머리에 반했다고, 딸을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시골 사람이라 서울에 와서도 몇 년간 머리카락을 자르지 못하게 했는데, 그게 내 미래를 염두에 둔 것이었을까? 얼마 후 그 남자와 결혼을 하고 창신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답십리로 이사를 했다. 남편의 누나이자 내겐 형님이 되는 어른께서 집을 장만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곳에서 첫째 아들을 낳았다. 월세, 전세 개념이 없던 어린 나는 결혼생활을 내 집에서 시작한다는 것이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몰랐다. 결혼 4년 째 되는 해, 착한 사람이지만 술 좋아하고 귀 얇은 남편이 사기 아닌 사기를 당했다. 남편은 “돈 많이 벌어서 다시 살 수 있다. 더 크고 넓은 2층 집으로 가자”고 말했다. 우린 젊으니까 또 집을 장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집이 처음이자 마지막 내 집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