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하는 건축가, 건축하는 디자이너
천경환
5,171자 / 10분 / 도판 3장
오피니언
명함을 디자인하는 건축가
건축가라 자처하며 여러 해를 보냈지만, 아직 의뢰가 많지 않아 시간이 남을 때가 있다. 이런저런 것들을 궁리하고 디자인하는 것을 좋아해서 가구나 명함과 같은, 건축설계가 아닌 다른 분야의 디자인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명함 디자인의 경우는 ‘개인 명함 캠페인’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인 정체성이 아닌 스스로가 부여한 개인의 정체성을 건축가와 의뢰인이 함께 탐색한다는 명분을 겸하고 있다. 영문명이나 직장명 등을 표기하는 관습 하나하나를 의심하면서 반드시 드러내고 싶은 것들만을 골라낸다든지, 여백의 개념에 구애받지 않고 지면 전체를 활용하여 정보를 배열한다든지, 명함의 앞 뒷면을 두 개의 분리된 평면이 아닌 서로 간섭하고 관통하는 두 공간의 경계로 해석한다든지, 글자가 의미가 아닌 형상으로 드러나는 순간에 주목한다는 것 등이 내가 세운 나름의 명함 디자인 방법론이다. 이런 과정에서 건축가로서의 기질이나 스타일이 은연중에 배어 나오길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늘 의식하는 것은, ‘그래픽 디자이너가 아닌 건축가로서 명함을 디자인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라는 질문이다. 이런 물음에 기대하는 답변이 나올 때도 가끔은 있다. “이유를 콕 짚어 말하기 힘들지만, 왠지 건축가가 디자인한 명함답다”라는 식의 반응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