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끄러지는 공공성 공공건축과 공공성은 비슷하지만, 별개의 문제다. 공공건축 시스템 내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면 공공의 돈으로 공공을 위한 프로젝트를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누구의 돈인지 모를 돈으로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느낀다. 또한, 지금 상황에서는 건축가가 너무 많은 희생을 하면서 일을 해야 한다. 일단 건축가와 발주처가 생각하는 좋은 공공공간이 너무 다르다. 건축가들은 공공에 개방된 공간을 설계하는데, 관에서는 안전 때문에 그렇게 하지 말자고 했다는 이야기는 너무 많다. 다음으로는 공공건축 작업에 책임 없이 한마디씩 얹는 플레이어들이 너무 많다. 심의를 말하는 게 아니다. 다양한 유관 부서의 요청이 잘 관리되어 전달되지 않고 산발적으로 내려오는데, 공모전을 통해 당선된 건축가가 그것을 다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비일비재하다. 이런 이유로 굳이 공공 작업을 안 해도 된다면 그 고생을 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더 힘이 생겨서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전까지는 관심 없다.
약간 건축가 건축가로서 만들고 싶은 궁극의 건축, 그런 것은 없다. 다만 도전은 항상 좋아한다. 궁극적으로 생각해보면, 이 일을 하는 변하지 않는 이유 단 하나가 남들이 안 해본 것, 아직 세상이 보지 못한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다. 조각이건, 굉장히 독특한 디테일이건, 희한한 형태이건, 벽돌 붙이는 방법이건 간에 역사상 없었던 것을 만드는 게 언제나 좋다.
분열된 사회 정체성 공공건축가 시스템이 만들어진 뒤 많은 건축가가 공공건축 설계에 참여하고 좋은 건물을 만들어갈 기회가 마련된 것은 분명하다. 특히 지방에 이 제도가 도입되며 공공건축물을 짓는 과정이 많이 개선됐다. 그러나 여전히 공공건축의 열악한 조건으로 인해 건축 자체의 퀄리티는 하향평준화 되어가는 느낌이 든다. 또 건축가가 전문가로서 사회에 이바지한다는 마음으로 이런 일에 참여하기는 하지만, 작은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희생을 강요당하는 면도 있다.
대항하는 정체성 사회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자아 혹은 집단이나 조직의 아이덴티티이다. 아이덴티티는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하는 사람이고, 어떻게 사는 사람인지를 나타낸다. 만약 이것이 지속적이지 않고 매 순간 바뀐다면 그것을 정체성이라 볼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정체성이 항상 동일하고 반복적일 필요는 없다. 정체성이란 상황과 사건을 통해 조정되고 교섭되면서도 지속성이라는 틀을 유지하는 자기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이 정체성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지되고 변화하는지가 사회학이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한국 건축에서 ‘지역성’ 논의는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시대에 따라 의미가 다르게 사용되기도 했고, 입장에 따라 그 해석도 달랐다. 이 시점에서 다시 지역성을 이야기한다면, 개인이 중심이 된 열린 개념일 것이다. 10월 8일 이화여대에서 김광수, 황두진, 배형민, 김일현, 임근준 씨가 모여 “건축의 지역성을 다시 생각한다”란 주제로 열띠고 사방으로 튄 토론회를 가졌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