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재난’이란 우리 시대가 당면한 가장 거대한 부정성negativity이다. 우리는 말한다. ‘재난을 극복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지하철 배기판에서부터 세월호까지, 쓰나미에서 원자력 누출까지, 재난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지만, 우리는 언제나 재난을 극복해야 할 어떤 것으로 호명한다. 마치 우리가 목욕을 하면 때를 벗겨낼 수 있는 것처럼. 마치 우리가 돈을 벌면 반지하 방을 떠날 수 있는 것처럼. 한 번 벗겨내고 떠나면 그만인 것일까. 한 번 극복하고 나면 다시는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재난은?
건축과 재난은 불가분의 관계다. 재난이 건축을 부르고, 건축이 재난을 부른다. 건축과 재난은 출발점을 공유한다. 둘 다 폭력(적)이다. 건축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폭력이며, 재난은 건축(과 인간)에 대한 폭력이다. 또한 재난은, 건축도 다르지 않은데, 근본적으로 인간의 한계 지점에서 출현한다. 그리고 한계의 출처는 예측과 대비와 ‘인간적인 것’이다. 예측과 대비는 이미 발생해왔던 것에 기반을 두면서, 안전과 경제성 간의 타협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어떤 구조물도 경제적 이유로 최악을 상정하지 않는다). 건축과 재난은 또한 윤리의 한계와 맞물린다. 한국의 재난은 모조리 사리사욕과 부정부패가 씨앗이다. 그래서 재난은 윤리를 추궁한다. 게다가 일상을, 지금여기를 단절시켜 삶을 전면적으로 문제화한다. 크로노스가 중단되고 아이온이 열린다. 아이온은 삶 바깥에서 도래하는 시간, 곧 하늘의 시간이다. 삶의 기분을 전적으로 다른 차원으로 옮긴다.
파국 서사와 비평을 둘러싼 오해와 진실 K가 종말기상관측소에 근무한 지도 어느덧 8년이 되었다. 종말기상관측소는 위기, 재난, 파국, 종말, 묵시와 같은 가족유사성을 지닌 어휘들이 한국사회의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자주 출현하기 시작한 정세적인 종합국면을 면밀히 탐구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처리하기 위해 설립된 민간자치단체다. 재난을 통제하기보다는 조장하는 정부와 재난으로 막대한 이윤을 남기는 기업의 지원은 일절 받지 않는다. 종말기상관측소에 구비된 디지털 휴대장비와 시설은 따라서 대단히 낙후될 수밖에 없겠다. 그래도 낡은 풍향계는 상서롭지 않게 불어오는 비바람, 낙뢰와 태풍을 품고 있는 구름의 종류를 기록하고 있다. 기상관측소이긴 하지만 미진微震을 일찌감치 눈치채는 설치류齧齒類 등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지진계도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태 직후에 구비했다. 최근 1~2년 사이에는 바다에서 전해오는 조난신호가 심상치 않아 모스부호 해독 기구를 마련해 사용하고 있다. 업무량이 증가했지만 뜻을 함께하는 동료도 한둘씩 늘었다. 풍향계와 지진계, 모스부호 해독 기구에는 공통 업무가 하나 있다. 그것은 물론 하늘과 땅, 바다에서 전해져오는 파국과 묵시의 전조와 예감, 징후를 포착하고 그와 관련된 기록일지를 작성하는 것이다. K는 때때로 그 기록일지를 위기crisis와 어원을 공유하는 비평criticism으로 부른다. 요즘 들어 신뢰성이 급격히 추락하는 어휘이긴 하지만 딱히 대안이 있을 리도 만무하겠다.
출처: 레베카 솔닛, <폐허 속의 문>, 『이 폐허를 응시하라: 대재난 속에서 피어나는 혁명적 공동체에 대한 정치사회적 탐사』, 정해영 옮김, 펜타그램, 2012, pp. 453~458.
1 재난. 이 말 하나를 곰곰이 살펴보고 싶다.
고통을 받는 자와 고통을 주는 자 최근 건물주의 일방적인 통고로 쫓겨날 위기에 처한 예술/ 카페공간 ‘테이크아웃드로잉’에서 포럼이 있었다. 발표자와 토론자들은 하나같이 ‘빚’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떤 공간을 운영할 때 빚은 시종일관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테이크아웃드로잉 뿐만 아니라 다수의 상가세입자들은 입주 시 내부공사, 권리금 등에 초기투자를 할 수밖에 없고 이 비용은 많은 부분 빚으로 충당되기 일쑤다. 이런 상황에서 건물주의 일방적인 퇴출통보는 초기투자비용을 회수하고 빚을 갚을 기회 자체를 박탈하는 최악의 상황을 세입자에게 강요하게 된다.
공유재의 비극? ‘공유재의 비극’이란 개념은 ‘공유’나 ‘공동체’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아킬레스의 건’ 같은 사례로 즐겨 언급된다. 특히 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개개인의 이기적 본성의 가정 위에서 사유재산과 시장에 의한 조정이 무슨 자연법칙이라도 되는 양 생각한다. 그러나 그 개념은 1968년 학술지 『사이언스』에 실렸던 개릿 하딘의 논문 <공유재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1968)에서 연유한 것으로, 하딘은 열렬한 생태학자로서 공유재인 생태계를 지키고 되살리기 위해서는 중앙집권적 정부의 강력한 명령과 통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공유물의 자유로운 이용은 모두에게 파멸을 안겨”주는데, “혼잡한 세상에서 파멸을 피하려면 사람들은 각자의 마음 밖에 있는 강압적 힘, 다시 말해 토마스 홉스의 표현을 빌자면 ‘리바이어던Leviathan’에 호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가 사적인 재산에 대한 사용권마저 제한했던 박정희 정권의 그린벨트 정책을 알았다면 필경 강하게 지지하지 않았을까?
동일본 대지진 이후 삶은 다각도에서 변화를 가지게 되었다. 대지진, 원전 사고 그리고 또 다른 재난으로서 신자유주의 이후 경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나 언제나 문제가 생기고 나서야, 비로소 몸과 마음을 앓고 나서야 진정으로 배우게 된다. 본 지면에서는 너무 빠르지 않게 우리의 일상에서 재난에 대한 사고가 증발되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대답하는 과정들을 가진 건축가, 예술가들의 작업들을 모았다. 해체된 커뮤니티를 다시 회복시키고, 건축가 또는 예술가로서 재난 이후 변화한 환경에서 어떤 실천들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한다. 이러한 질문들은 오늘날 미디어를 통해 변화된 재난에 반응하는 감각체계에 주목하는 것까지 연장되었다. 여전히 재난을 바라보고 읽는 것은 고통을 동반한다. 그러나 이들을 포함한 많은 건축가와 예술가들은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의식적으로 직시하려 노력하고 있다. 역사적, 문화적 문맥 안에서 충실한 이들의 작업 이후 역시 계속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재난 이후 : 동일본 대지진과 일본 영화의 질문 자연적, 사회적 재난의 파고가 높은 시대, ‘수퍼 스톰’ 샌디가 미국 맨해튼과 월스트리트를 강타하고 전기와 인터넷을 끊어버린다. 트위터의 새처럼 지저귀면서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을 살던 사람들은 재난의 고독에 빠진다. 페이스북에서 사회적 네트워크를 만들던 사람들은 이 자연의 재난 앞에서 다시 아날로그라는 원치 않는 상황에 처한다. 우리는 이미 재난 이후, 즉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상상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다.
“골키퍼가 공도 없이, 그러나 공을 기다리면서 이리저리 뛰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요.”― 페터 한트케,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현대는 그 완성의 과도함으로 인해 다른 세상이 되었다.”― 장 보드리야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