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공공건축의 오래된 미래
조성룡 × 구본준
10,020자 / 20분 / 도판 4장
인터뷰
2011년 홍성에 들어선 미술공간 <이응노의 집> 이후로 조성룡 성균관대 교수는 활동이 뜸한 것처럼 보였다. 간담상조肝膽相照했던 평생의 지기 정기용 건축가가 2011년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상심이 어떠했을 지는 굳이 가늠할 필요조차 없어보였다. 그럼에도 새로운 일을 쉬지 않고 해온 조 교수의 스타일을 생각하면 그의 에너지가 식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동시대 건축가들 중에서 조성룡 교수보다 더 유명한 이는 늘 있었다. 그러나 그처럼 꾸준하게 건축을 해온 이는 드물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건축계에서 그의 존재감은 점점 더 커져갔다. 그의 위상을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은 언론을 통해 간간이 발표되는 각종 설문조사들이다. 2011년 <조선일보>가 국내 건축가와 건축학과 교수 등 전문가 2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물’ 설문에서 조 교수의 대표작 한강 <선유도공원>은 1위에 올랐다. 건축을 베스트나 워스트로 순위를 매기는 것이 옳은 것인지는 차치하더라도, 2000년대 이후 꽃을 피운 그의 건축이 한국을 대표하는 반열에 오른 것만큼은 분명할 것이다.그리고 올해 초 ‘SPACE’와 <동아일보>가 함께 발표한 ‘건축가 100인이 꼽은 한국 현대건축 베스트’ 조사 결과는 조 교수의 비중을 더욱 분명하게 확인시켜준 소식이었다. 최고 건축물 20개 안에 조 교수의 작품은 <선유도공원>(조성룡 +정영선, 2002)이 3위, 어린이대공원의 <꿈마루 >(2011)가 14위, <의재미술관>(조성룡+김종규, 2001)이 17위에 올랐다. 세 개의 작품이 한국 현대건축 베스트에 꼽힌 건축가는 그가 유일했다. 세 작품 모두 2000년대 이후의 것이란 점, 그리고 모두 공공성이 강한 건축이란 점은 더욱 의미심장했다.어느새 조 교수는 한국 건축계 최고 윗세대가 됐다. 1940년대 생 건축가들 중에 지금껏 일선에서 활동하는 이는 이제 그 외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같은 세대 중진 건축가들 중에서 그처럼 아들뻘인 후배들과 지속적으로 만나며 호흡하는 이도 없다.10년 전, 그의 회갑을 맞아 후배 22명이 글을 써 헌정한 책, 『건축 사이로 넘나들다』(2004) 의 서문에는 조 교수를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이 있다. “60이 된 조성룡은 여전히 호기심 어려 있고, 여전히 끊임없이 일을 벌이고 있으며, 여전히 실무 건축인의 부지런함을 그대로 안고 있으며, 여전히 자신의 손과 발로 그 무엇을 만드는 일을 즐기는 모습도 그러하다. 여전히 영화와 음악과 책과 회의와 현장을 쉴 새 없이 오간다. 여전히 어떠한 질문에도 소박한 답을 하면서도, 여전히 고집스럽게 심지 굳다.”10년이 지나 그가 칠순을 맞은 지금도 이 구절은 유효하다. 발표하는 작품 소식은 줄어든 듯해도 그는 여전히 무언가를 하고 있다. ‘젊은건축가상’ 을 비롯한 여러 심사에서 그의 이름을 볼 수 있고, 여러 건축계 행사장에서 그의 얼굴을 직접 마주칠 수 있었고, 페이스북에 올리는 사진을 통해 자주 근황을 접할 수 있다.전화와 웹으로 안부를 전해오다가 《건축신문》 의 인터뷰 원고 요청으로 조 교수의 <지앤아트 갤러리>(경기도 용인)에서 모처럼 여유롭게 그를 만났다. 조성룡 건축을 보면서 성장한 후배 건축가들이자 ‘파워건축블로거’들이 부담 없이 만나는 자리에 끼어들어 담소와 술자리로 인터뷰를 대신했다. 6시에 시작한 모임은 밤 11시에나 끝이 났을 정도로 오래 이어졌고, 그는 진지하면서도 무겁지 않게 여러 이야기를 풀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