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1967년 서울시는 한강 개발의 일환인 윤중제 건설(1968년 2월 준공)로 확보한 여의도 부지의 개발계획을 김수근에게 위임했다. 남산 국회의사당 현상설계(1959) 당선으로 건축계에 데뷔한 이래 김수근은 자유센터(1963), 부여박물관(1967) 등 전후 한국의 대표적 상징물들을 설계하며 ‘국가 건축가’로 부상하고 있었다. 정계와의 긴밀한 인맥을 바탕으로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설립을 주도하고 종로3가 재개발 프로젝트(1967) 같은 대규모 도시계획을 이끌어온 그가 여의도 개발계획을 맡게 된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미래의 부검: 여의도 1968 – 2018〉은 현실과 상상, 소설과 역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지극히 익숙하면서도 낯선, 다양한 주체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이들의 기억은 ‘여의도’라는 거대한 시대적 실험으로 엮여 있으나, 이야기를 주도하거나 이야기에 끌려가는 자 없이 평행선을 그리며 진행된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여의도는 실체적 장소라기보다 은유적인 허상으로 존재한다. 때로 면적의 비교 단위로 호명되는 여의도의 거대함, 광활한 평평함, 그리고 구석이 존재하지 않는 어색함은 곧 실현될 유토피아로서 여의도의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유지시킨다. 아스팔트 광장에 모여 기도하고 노래하고 농성했던 수백 만의 기억과, 매년 가을 여의도 하늘 위에 펼쳐지는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모이는 군중들, 그리고 봄마다 벚꽃 아래 윤중제를 걷는 시민들에게 여의도는 지금도 가까운 유토피아다. 여의도에서 우리는 이상적인 미래를 꿈꾸고, 그 꿈의 예언적 개념으로서의 운명은 국가 정체성의 견고함과 맞물려 있다. 사회적이며 미학적인 실험 대상으로서 여의도는 여전히 한국 아방가르드 건축의 성지다.
형식 따위에는 관심도 없을 법한 뻔뻔한 표정으로 갈색 나팔바지와 깃 넓은 빨간 셔츠를 풀어헤쳐 입던 여느 때와 달리 얌전하게 차려 입은 정장 옷깃 위에 큰 꽃을 달고 단상에 올라 누군가 대신 써둔 듯한 개회사를 열심히 읽고 있는 김수근의 모습은, 그가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KECC,이하 기공)의 2대 사장이던 1968년 10월 ‘고속도로건설기술심포지움’이라는 공식 행사를 기록한 사진 속에 담겨 있다. 아직 30대 후반이던 젊은 김수근이 기공의 사장으로 부임한 것은 1968년 4월이었으나, 그는 이미 1966년부터 기공 내에 설립된 도시계획부에 자신과 함께 일했던 윤승중 이하 젊은 건축가들을 모두 불러모았고, 사실상 설립부터 기공의 최고 책임자 역할을 담당했다. 김수근 팀과 기공의 어색한 공생은 1969년 그가 인간환경연구소를 만들며 독립할 때까지 3년 동안 지속됐고, 그 숨 가빴던 3년간 김수근 팀이 만들어낸 다수의 설계도와 보고서들은 한국 현대건축의 초기에 활동을 시작한 젊은 건축가들의 야심 찬 실험들이었다.
2016년 정림학생건축상의 주제인 ‘재난건축’은 응모자들에게 난감함을 주었을 법하다. ‘재난’과 ‘건축’이라는 단어의 결합 자체가 모순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재난’의 속성이 ‘파괴, 소멸, 망가짐’이라면, ‘건축’의 속성은 ‘구성, 제작, 생성’이기 때문이다. ‘재난건축’은 그래서 다양한 의미의 결합을 그 안에 담고 있다. ‘재난 (이후의) 건축’일 수도 있고, ‘재난 (속의) 건축’일 수도 있으며, ‘재난 (앞에서의) 건축’일 수도 있다. 어떤 결합을 택할지, 혹은 어떻게 새로운 의미 결합을 만들어낼지는 온전히 응모 학생들이 재난과 건축을 바라보는 인식과 상상력에 달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