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주의의 폭력성 다수결의 원칙에서라면 당연히 다수가 승리한다. 소수는 지는 편, 승자의 배경이다. 배경이 된 인간에게는 목소리나 인간성이 주어지지 않는다. 한 사회의 규범과 상식, 도덕을 곧 자신의 일상적 에토스의 기반으로 전유하는 이들에게 다수성은 그 자체로 선이고 정의이다. 사회의 안전과 안정은 곧 다수의 원칙이 관철되고 있는가 혹은 관철될 수 있는가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소수를 위한 정책은 ‘예외적’으로, 크나큰 시혜로서만 존재한다. 부르주아 자유주의를 따르는 근대적 국가는 많은 사람을 ‘우리=선량한’ 시민들로 호명하면서 아직 충분히 선량하지 못한 시민들을 훈육, 통제하는 장치들을 체계화했다. 소수자 ―한국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해 여성, 어린이, 청년, 장애인, 동성애자들로 한정한다면― 는 선량한 사람으로 자신을 조직화하고 동화시켜야 할 임무가 주어진다. 가령 ‘장애인도 사람이다’와 같은 구호는 기존의 ‘인간(성)’의 정의(定義)에 스스로를 꿰어맞추는, 기존의 인간 규범에 편입되려는 소수자 편의 제스처를 가시화한다. 소수자의 소수자성(타자성!)을 희생하는 대신 주류의 인간성으로 이전하려는 이와 같은 동화주의(assimilationism)는 먼저 국민이나 인간으로 진입한 이들의 궤적을 소수자들이 또 반복하고 강화하는 움직임을 뜻한다. ‘미래’는 현재 선량한 시민들 다음에 자신들을 좋은 이름으로 부를 시간, 공간의 은유이다. 그렇게 다수결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는 서구화, 근대화, 인간화, 국가화, 정상화를 함께 끌고 앞으로 전진하는 체제이고 이데올로기이다. 안전과 안정에 대한 문화적인 희구는 양순한 신민들(subjects)로서의 인간 주체의 조율 혹은 출현, 혹은 인간 삶의 억압을 알린다.
지독한 혹은 따뜻한 위로 _ <위로공단>은 지난 50여 년에 걸친 우리 산업화와 압축발전의 시간을 여성 노동자들의 공간을 통해 보여준다. 그들의 억압적 삶을 단순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공간으로 성찰한다. “선택할 것이 있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바람처럼 가족을 위해 자신을 삶을 바친 여성 노동자들의 현장은 임흥순의 즉흥적이고 따뜻한 시선의 비판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의 폭압성과 더불어 여성적 위로를 떠올리게 한다. 미학자 양효실의 인터뷰와 사회학자 조은의 크리틱을 통해 임흥순의 세계를 다각적으로 살펴본다.
소수자로서의 차이에 대한 강박 누구나 직업적, 전문가적, 오타쿠적 강박을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나의 강박은 비슷한 것들에서도 차이를 찾으려는 것이고, 개념을 교란하는 감각의 산란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칸트의 용어로 말한다면 유사성을 찾고 범주화하고 원리나 개념을 끌어내는 규정적 판단이 아닌, 반성적 판단, 오직 하나의 경험에 풍덩 빠지는 훈련을 오랜 시간 해와서 일 것이다. 미학자로서, 미적인 것the aesthetic에서 윤리적, 정치적 가능성을 찾는 동시대 담론들의 맥락 안에서, 극단적 차이로서의 작품을 보호하고 작가의 생존법을 세속의 평균적 감수성에 전달한다. 예술은 번역불가능한 지방어vernacular에 대한 것이고, 표준어와의 환원불가능한 거리로 존재근거를 정당화한다. 너무 일찍 태어난 저주받은 작가에서 살아생전 명성과 부를 쌓는 작가에 이르기까지, 진저리나는 가난에서 무욕한 방탕에 이르기까지, 무병장수에서 자살에 이르기까지, 예술가들이 만들어내는 무늬는 넓고 가지각색이다. 미학자로서 특히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그/그녀가 자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시대와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자유를 쟁취하고 시대를 확장시켰는가에 있다. 따라서 내게 작가는 사회의 맹점이고, 사회의 미래이다. 그렇지 않은 작가들, 이미 충분한 해석을 거친 작가들마저도 그런 상태로 되돌리려고 애쓴다. 무엇보다 내가 즐기는 것이고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