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덜 느껴지겠지만, 노르웨이에서 살면서 계속 느끼는 것은, 요즘 ‘난민’이라는 단어가 전 사회에 하나의 핵심어가 됐다는 것이다. 일면으로는 다소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 비록 유럽을 향한 작년의 피난민 행렬은 역사적으로 그 전례를 찾기가 힘들 정도이긴 했지만, 유럽연합 전체의 인구에 비해서 피난민 수가 그렇게까지 압도적이지는 않았다. 2015년에 피난민 지위를 유럽연합에 신청한 비非유럽연합 출신들은 약 120만 명에 달했지만, 이는 유럽연합의 총인구 (약 5억 명)의 0.2%에 불과하다. 즉, 신청자 모두에게 설령 체류 허가를 주어도 유럽연합의 인구 구성은 본질상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일면으로는, 숫자 그 자체를 넘어서 이번의 ‘피난민 위기’는 후기 자본주의 체제의 어떤 심각한 약점들을 노출했음이 틀림없다. 결국 이런 ‘약점의 노출’이야말로 숫자와 비교해 훨씬 더 과민한 이번 사태에 대한 유럽 주류의 반응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강연은 공저 『정치의 임계, 공공성의 모험』(혜안, 2014) 중 「글로벌 빈곤의 퇴마사들-국가,자본,그리고 여기 가난한 청년들」에 토대를 둔 것이다. (강연: 2014년 7월 2일)
삶의 대부분이 상품화·시스템화되는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예술과 정치는 어떤 공통의 지평을 보여줄 수 있을까. 우리는 공동체 안에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을까. 괴물이 되어가는 미디어 속에서 우리 스스로 책임 있는 가치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이들이 일상으로의 복귀를 주저하는 동안, 정치학자 박상훈과 예술가 임민욱이 만나 이러한 질문들을 나눴다.
개발 혹은 발전은 무엇인가 개발을 하기에 앞서 개발이라는 말의 다의성을 빼놓을 수 없다. 물질적으로 더욱 풍요로워진다는 의미의 경제개발이 있으며, 도시개발, 주택개발, 지역개발 등 낙후된 것을 현대적이고 새로운 어떤 것으로 대체함으로써 그것의 가치를 높이는 의미도 있다. 후자는 건설, 토건, 공사 등의 이미지와 동반되곤 한다. 발전이라는 말도 흔히 사용되는데, 개발의 의미를 담고 있으면서도 그것의 물질적인 의미를 넘어서는 어떤 차원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같다. 개발 혹은 발전의 개념을 제거하고 현대인의 삶, 현대 사회의 각종 문제, 현대 국가의 존립목적을 생각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근대 이후 수백 년 간인간의 삶 자체가 개발을 중심으로 돌고 돈 역사 위에 형성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형체가 없었으므로, 그것은 사고하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감각이 없었으므로, 그것은 영혼이 없었으므로, 그것의 단 한 부분도 물질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이 모든 부재 때문에, 이 모든 불멸성 때문에, 무덤은 아직도 안식처이며 잠식되는 시간은 그 친구인 것이오”1
한국의 민주화와 소비자민주주의 오해와 달리, 1970년대 박정희 체제는 자본주의에 친화적인 것 같지만 생산력이라는 점에서 그랬을 뿐, 소비주의 측면에서 보면 상당히 금욕적이었다. 특히 부유한 계층을 압박해서 너무 많은 재화를 독점하지 못하게 했다. 특권층의 과소비에 대한 단속은 이 체제가 소비주의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1987년 이후 한국에서 전개된 민주화 과정은 신자유주의적인 개혁을 포함해서 소비주의의 확장을 초래했고, 산업역군을 소비자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외식문화가 창궐하고 대중문화에 관심이 폭증하게 되었다.
멈포드와 거대 기계 루이스 멈포드Lewis Mumford는 저서 『예술과 기술』에서 인간과 자연의 교호 작용이라 할 ‘테크네techn ’를 다시 ‘테크놀로지’와 ‘아트’로 나누었다. 아주 거칠게 단순화하자면, 전자는 일정한 결과를 얻기 위한 정해진 과정과 동작을 반복하는 것과 관련이 되어 있으며 후자는 인간 존재 스스로 변화 발전을 목표로 하는 다양한 자발적 활동과 관련되어 있다. 멈포드는 태고 이래의 인간 문명사를 이 두 가지 행동 양식이 어떻게 발전하고 어우러지고 또 서로를 교란하였는가로 설명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