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끄러지는 공공성 공공건축과 공공성은 비슷하지만, 별개의 문제다. 공공건축 시스템 내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면 공공의 돈으로 공공을 위한 프로젝트를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누구의 돈인지 모를 돈으로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느낀다. 또한, 지금 상황에서는 건축가가 너무 많은 희생을 하면서 일을 해야 한다. 일단 건축가와 발주처가 생각하는 좋은 공공공간이 너무 다르다. 건축가들은 공공에 개방된 공간을 설계하는데, 관에서는 안전 때문에 그렇게 하지 말자고 했다는 이야기는 너무 많다. 다음으로는 공공건축 작업에 책임 없이 한마디씩 얹는 플레이어들이 너무 많다. 심의를 말하는 게 아니다. 다양한 유관 부서의 요청이 잘 관리되어 전달되지 않고 산발적으로 내려오는데, 공모전을 통해 당선된 건축가가 그것을 다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비일비재하다. 이런 이유로 굳이 공공 작업을 안 해도 된다면 그 고생을 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더 힘이 생겨서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전까지는 관심 없다.
한국에서 건축 전시가 이토록 빈번한 때가 언제 있었을까.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건축 전시를 보는 것도 흔한 일이 되었다. 2014년 겨울에는 서울에서만 크고 작은 건축 전시가 15개나 열리기도 했다. 2014년은 베니스건축비엔날레에서 한국관이 황금사자상을 받은 해다. 2017년에는 제1회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가 개막하고 UIA서울세계건축대회가 열렸고, 그해 가을 한국을 대표하는 국공립미술관인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은 대형 건축 전시를 열었다. 2018년에는 서울도시건축센터가 문을 열었고, 올해에는 구 국세청 별관 부지에 서울도시건축전시관이 개관했다. 이러한 행사에 대한 피로도가 쌓일 때쯤 건축 전시에 대한 비평적 검토가 제기되었다. 이제 전시를 만드는 것을 넘어서 결과에 대한 냉정한 분석을 요청하고 있다. 실제 건물을 가지고 올 수 없는 건축 전시는 왜 하는가? 무엇 때문에 건축 전시는 이토록 설명적인가? 건축 전시는 아카이브 전시 이상을 넘어설 수 없을까? 모형과 도면, 사진 외에 보여줄 수 있는 전시 매체는 무엇일까? 등 여러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 글은 이러한 질문들의 출발점을 생각하고, 대답하기 위해 들어가는 여러 입구에 대한 이야기다.
전 세계가 전시의 시대에 돌입했다. 21세기 전후를 기점으로 관광 시장이 폭발적으로 팽창하면서 대형 박물관과 미술관의 관객 수가 급성장했다. 대영박물관, 미국의 스미스소니언과 메트로폴리탄뮤지엄, 대만의 고궁박물관과 같이 역사, 유물, 과학 박물관이 관광객의 주 방문지이지만 테이트, MoMA, 퐁피두센터와 같은 근현대 미술관도 매년 400만 명 전후의 관람객 수를 유치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국립현대미술관이 서울관 개관과 서울시립미술관의 지속적인 확장으로 백만 명 이상의 관람객을 끌어들이는 관객 동원력을 보여주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동시대 미술 전시가 글로벌 현상으로 확장되면서 비엔날레의 촉진제가 되었고 현재 200개 이상의 비엔날레가 전 세계에서 개최되고 있다. 건축은 확장된 전시 시장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시의 붐을 함께 탔다. 이탈리아 국립21세기미술관(MAXXI )이 탄생하고, 프랑스 국립건축박물관이 재정비되고, 미국 현대 건축의 탄생지 시카고에서 건축비엔날레가 출범한 것은 건축 전시의 성장을 알리는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지방 정부들이 앞다투어 비엔날레를 창설했고,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와 광주디자인비엔날레 등에서 건축이 일정한 역할을 해왔다. 시행착오와 기복도 물론 있다. 광주디자인비엔날레가 디자인 박람회로 바뀌었지만, 서울시가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를 창설했다. 건축 설계 시장이 축소되고 있는 상황에서 건축 문화 시장이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건축 문화 시장의 규모는 아주 작지만,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맥락에서 한국 건축에 대한 인식과 담론의 향방, 건축 아카이브와 컬렉션의 지속성이 달려 있는 중요한 시장이다.
참여 디자인으로 만든 어린이 공간 테즈카 건축(Tezuka Architects)에서 설계한 도쿄 다치카와의 후지유치원은 전 세계에서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10대 유치원으로 뽑힌 곳이다. 2007년에 개원한 이 유치원은 울창한 숲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 자연 속에서 배우고 노는 아이들 모습에서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하자센터부터 청년허브까지 1999년 하자센터를 맡으면서 청소년 문제와 마주하게 되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나와서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청소년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했는데, 처음에는 그들의 사고나 행동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을 두고 보니 특정한 맥락에서 아이들이 다르게 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커먼즈 ‘커먼즈(commons)’라는 단어가 최근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커먼즈는 공유지, 공유재, 공유 자원 등으로 조금씩 다르게 해석되는데, 데이비드 볼리어1의 『공유인으로 사고하라』를 보면, 커먼즈를 공동의 가치와 정체성을 보존하는 자원을 장기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사회적 시스템, 공동체가 시장이나 국가에 의존하지 않거나 최소로 의존하며 관리하는 자기 조직적 시스템으로 정의한다. 또, 우리가 물려받거나 함께 생산하여 더 발전시키거나 줄어들지 않은 상태로 자손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부, 곧 자연의 선물, 시민 인프라, 문화 작품, 전통, 지식 등으로 정의한다.
우리 도시의 현주소 우리는 그동안 너무 양에 집착해서 빨리빨리를 외쳤고 질을 등한시 했다. 질이라고 하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지난 선거 과정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공정한 사회, 정의로운 사회에 대해 이야기했다. 국민들이 주인 의식을 갖도록 뒷받침하겠다고 했고, 전라도와 경상도, 야당과 여당, 좌우와 같은 이념적 대립을 탈피해 국민 통합을 이루겠다고 했다. 피폐한 경제 상황에서의 일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했다. 언급된 여러 가지 이야기 중에 나는 주거 공간을 만드는 국민 주권과 통합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국민 주권 시대에 방법론을 이야기할 때 가장 핵심적인 이야기다.
뉴타운 키즈와 DDP 서울은 도시 공동의 장소의 기억을 삭제하는 것을 너머 그러한 공간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도시이다. DDP가 원래 동대문운동장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20대는 거의 없다. 청계천이 원래 고가도로였다는 사실을, 한강이 백사장이 있고 물이 맑아 수영할 수 있는 강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도 거의 없다. 문제는 한강변이나 청계천이 콘크리트여서 불편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별로 없다는 점이다. 콘크리트 건물에서 태어나 아파트 단지 내 조경을 자연 삼아 자란 세대에게 도시의 과거와 자연을 기억하자는 일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600년 된 도시의 역사를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우리 세대나 다음 세대는 동대문운동장이 어떤 공간이었는지, 청계천이 어떤 공간이었는지 기억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재개발 도시를 움직이는 주체는 무엇일까? 도시를 움직이는 두 ‘시장’이 있다. 하나는 mayor이고, 다른 하나는 market이다. 도시에서 어느 쪽이 더 주인 역할을 할까? 시장(Mayor)이 많은 권한을 갖고 있지만, 마켓의 힘에 휘둘릴 때가 많다. 도시에서 자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재개발이다.
대항하는 정체성 사회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자아 혹은 집단이나 조직의 아이덴티티이다. 아이덴티티는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하는 사람이고, 어떻게 사는 사람인지를 나타낸다. 만약 이것이 지속적이지 않고 매 순간 바뀐다면 그것을 정체성이라 볼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정체성이 항상 동일하고 반복적일 필요는 없다. 정체성이란 상황과 사건을 통해 조정되고 교섭되면서도 지속성이라는 틀을 유지하는 자기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이 정체성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지되고 변화하는지가 사회학이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도시 정치 ‘도시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말이 있다. 중세 시대 신분제에 얽매여 있던 농노라도 도시로 들어가서 1년이 지나면 자유인으로 살 수 있었다. 신분제가 있던 딱딱한 사회에서 도시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공간이었다. 이렇듯 과거의 도시는 자유의 공간이었다. 그렇다면 현대의 도시는 어떨까? 여전히 자유를 주는 공간일까?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자유를 주는 공간이지만 때로는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주기도 한다. 한 예로, 미국 디트로이트시에서는 자동차 산업으로 대기오염이 심각해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병에 걸렸다. 도시가 자유가 아니라 죽음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도시 패러다임은 전환기를 맞고 있다. 고도 성장기의 중앙집권적 방식으로는 지금 도시 문제의 해결책을 찾기가 어렵다고 한다. 새로운 출구를 찾아야 하나, 주택과 토지 그리고 자본은 점점 소수에게 집중되고 있고, 이에 따른 불평등은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여전히 시민 사회의 창의성은 억압되고 지역적 다양성은 간과되며 전통적인 토착적인 지식은 무시되고 있다. 생각만큼 도시의 삶에서 시민 주도, 공정과 평등으로의 변화를 경험하기 어렵다. 서울의 도시정책도 시민 다수를, 특히 힘없고 가난한 시민들을 서울 밖으로, 살던 지역 밖으로 내모는 데 개발 사업과 마찬가지로 도시재생 사업도 일조하고 있다. 세상이 바뀌어도 축출되거나 배제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도시가 서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