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끄러지는 공공성 공공건축과 공공성은 비슷하지만, 별개의 문제다. 공공건축 시스템 내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면 공공의 돈으로 공공을 위한 프로젝트를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누구의 돈인지 모를 돈으로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느낀다. 또한, 지금 상황에서는 건축가가 너무 많은 희생을 하면서 일을 해야 한다. 일단 건축가와 발주처가 생각하는 좋은 공공공간이 너무 다르다. 건축가들은 공공에 개방된 공간을 설계하는데, 관에서는 안전 때문에 그렇게 하지 말자고 했다는 이야기는 너무 많다. 다음으로는 공공건축 작업에 책임 없이 한마디씩 얹는 플레이어들이 너무 많다. 심의를 말하는 게 아니다. 다양한 유관 부서의 요청이 잘 관리되어 전달되지 않고 산발적으로 내려오는데, 공모전을 통해 당선된 건축가가 그것을 다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비일비재하다. 이런 이유로 굳이 공공 작업을 안 해도 된다면 그 고생을 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더 힘이 생겨서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전까지는 관심 없다.
건축가로서의 매력 김경도 대학교 3학년 때 설계스튜디오 선생님이 허서구 교수님이었다. 졸업할 즈음 교수님께서 “취직했니? 갈 데 없으면 그냥 우리 사무실로 와라” 말씀하셨고, 그렇게 첫 사무소에 들어갔다. 거기에서 3년 4개월 정도 일했는데, 함께 일했던 김재경 한양대학교 교수가 유학 준비를 하며 내게도 유학을 떠나라고 계속 권했고, 나도 마음을 굳힌 뒤 유학 준비를 해서 스위스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ETH)으로 갔다. 어학연수 1년을 포함해 3년 정도 공부하다가 여러 사정으로 졸업하지 않고 2011년에 귀국한 뒤 바로 사무소를 시작하게 되었다.
건축하는 법 강현석 유학 기간 중과 졸업 이후에 헤르조그 & 드 뫼롱(Herzog & de Meuron)에서 3년 넘게 실무를 했다. 학교에서는 상황과 맥락을 보고, 읽고, 생각하는 방식을 배웠고, 사무실에서는 구체적인 생각들을 건축 어휘를 사용해 완결된 물리적인 문장으로 치환하는 법을 배웠다. 자크(Jacques)와 피에르(Pierre)는 항상 부연 설명 없이도 즉각적으로 발현하는 반-재현적인 건축을 강조했는데, 프로젝트의 초기 단계에서 두 사람의 생각이 무수한 시행착오와 부산물들을 거쳐 하나의 구축물로 귀결되는 과정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 때의 과정들을 떠올리면서 설계한다. 물론 당시 함께 일했던 소중한 동료들과 여행에서의 경험들은 현재까지도 큰 자산이 되고 있다.
건축 행위의 목표가 지식 생산이라면 건축적 지식이 가장 순수하게 전달될 수 있는 통로는 아이디어가 건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전시 속의 건축적 상황이 아닐까? 1980년 처음 개최된 베니스건축비엔날레에서 <스트라다 노비시마(Strada Novissima)>라는 거대한 설치 작업에 포함된 건축가 중 한 명인 레온 크리어는 “내가 건물을 짓지 않는 이유는 내가 건축가이기 때문” 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자신이 건물을 짓지 않는 것이 저항적이고 대안적인 선택임을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건축 이론을 책과 전시라는 대안적 매체를 통해 실현하는 것을 선호했다. 답사를 통해 얻는 지식과 전시를 통해 얻는 지식은 동일한 영역 속에 존재하며 표현 수단이 다를 뿐이라고 가정한다면, 건축가의 의도가 최대한 간섭받지 않고 존중되며 외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전시 공간 속에서 건축가의 작업은 더 온전히 구현될 수 있다. 물론 건물의 배경이 되는 지형과 주변 환경의 맥락 속에 품길 때 느낄 수 있는 신체적 또는 현상적 경험은 있다. 그러나 답사를 통해 기억되는 경험이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감상적인 반면, 책이나 그림, 설치 등 전시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지식은 한결 집중된 주제 의식과 더불어 시대와 사회적 관념 속에서 편집된 명료하고 생산적인 지식일 수 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이 최근 건축 전시의 수와 규모가 전 세계적으로 늘고 있으며, 이를 통한 건축의 지적 세력이 무서운 속도로 확장되고 있는 것 같다. 건물보다 전시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지면서 누가 다음, 어느 비엔날레의 큐레이터로 선정될 것인가에 대한 루머와 추측들이 건축계의 뉴스거리가 된 것이 사실이다.
전 세계가 전시의 시대에 돌입했다. 21세기 전후를 기점으로 관광 시장이 폭발적으로 팽창하면서 대형 박물관과 미술관의 관객 수가 급성장했다. 대영박물관, 미국의 스미스소니언과 메트로폴리탄뮤지엄, 대만의 고궁박물관과 같이 역사, 유물, 과학 박물관이 관광객의 주 방문지이지만 테이트, MoMA, 퐁피두센터와 같은 근현대 미술관도 매년 400만 명 전후의 관람객 수를 유치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국립현대미술관이 서울관 개관과 서울시립미술관의 지속적인 확장으로 백만 명 이상의 관람객을 끌어들이는 관객 동원력을 보여주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동시대 미술 전시가 글로벌 현상으로 확장되면서 비엔날레의 촉진제가 되었고 현재 200개 이상의 비엔날레가 전 세계에서 개최되고 있다. 건축은 확장된 전시 시장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시의 붐을 함께 탔다. 이탈리아 국립21세기미술관(MAXXI )이 탄생하고, 프랑스 국립건축박물관이 재정비되고, 미국 현대 건축의 탄생지 시카고에서 건축비엔날레가 출범한 것은 건축 전시의 성장을 알리는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지방 정부들이 앞다투어 비엔날레를 창설했고,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와 광주디자인비엔날레 등에서 건축이 일정한 역할을 해왔다. 시행착오와 기복도 물론 있다. 광주디자인비엔날레가 디자인 박람회로 바뀌었지만, 서울시가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를 창설했다. 건축 설계 시장이 축소되고 있는 상황에서 건축 문화 시장이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건축 문화 시장의 규모는 아주 작지만,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맥락에서 한국 건축에 대한 인식과 담론의 향방, 건축 아카이브와 컬렉션의 지속성이 달려 있는 중요한 시장이다.
예술감독 박성태는 정림건축문화재단 상임이사로 『건축신문』을 발간하고, 건축학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프로젝트원’ ‘원맨원북’ 등의 포럼 시리즈와 〈협력적 주거 공동체〉(2014), 〈파빌리온씨〉(2015), 〈뉴 셸터스: 난민을 위한 건축적 제안들〉(2016) 등의 건축 전시를 기획했다. 『월간 미술』 『인서울매거진』 『공간』에서 예술 건축 관련 저널리스트로 일하면서 〈페차쿠차 나잇 서울〉(2007 – 2008), 〈테드 × 서울〉(2008 – 2009)의 큐레이터로 활동한 바 있다.
한
양코 씨가 서울에 온 건 1968년 11월 10일이었다. 나이는 스물일곱, 키는 중간보다 조금 작은 정도였고 호리호리하고 허리가 짧고 팔다리가 길어 중간보다 조금 커 보이지 않아?라고 했지만 태순은 아니라고 했다. 왜냐하면 나보다 작으니까, 작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건 없지만 작은 건 작은 거지. 양코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건 작은 거, 작은 건 좋은 거지? 그는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억양으로 말했고 태순은 왜 작은 게 좋은 건지 생각했다. 작은 건 나쁜 거 아닌가. 그녀는 1968년 이화여대 영문과에 입학해 서울에 올라왔고 그전까지 영천에서 살았으며 대구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왔다. 서울에서는 수업을 듣거나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풍경만 보고 살았다. 명동에서 종로까지 걸으며 유리와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신축 빌딩과 아케이드 안으로 사라지는 사람들, 바스러질 것 같은 구한말의 집들과 일제시대에 지어진 백화점의 벽을 손으로 더듬었고 건물 사이를 들고 나는 바람과 사람들의 차림, 버스가 새로 개통한 고가도로를 올라가는 풍경을 보았다. 양코 씨는 자신이 바로 그렇다고, 나와 똑같다라고 말했다. 도쿄에서 태어나 동경대에서 중국어를 전공하고 연세대 대학원에 입학한 양코 씨는 1박에 520원인 신당동의 싸구려 여관에 자리 잡았다. 잠깐 있다가 집을 구한다는 게 어쩌다 보니 세 끼 식사 합쳐 한 달에 1만1000원이라는 주인 아줌마의 제안에 넘어가 1년이 넘도록 방을 떠나지 않았고 일본에도 가지 않았으며 수업이 없을 때는 방에 누워 이태준과 박태원, 김동인 따위의 소설을 번역했고 삼학소주에 김치를 곁들여 먹으며 글을 쓰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정처 없이 서울 시내를 떠돌며 풍경만 보고 지냈다. 수업을 듣거나 공부를 하고 다른 학생들과 교류하는 것에는 왠지 게으름을 부렸고 명동에서 헌책방을 히야카시 하거나 사보이호텔 뒷골목에 기어들어가 도쿄 삿포로야 라면을 먹었지만 딱히 도쿄가 그리워서는 아닙니다, 한번은 반외팔이 같은 사내에게 꼬여 오양빌딩의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고 커다란 연탄난로가 있는 주점에서 낙지와 야채와 고춧가루를 듬뿍 넣고 끓인 안주에 막걸리를 마시기도 했지요. 사내는 더블브레스티드 양복에 하얀 목도리, 베이지색 코트를 걸친 행색으로 어딘지 모르게 무서우면서도 웃긴 모양이었고 솔직한지 무례한지 구분이 가지 않는 태도로 쪽바리놈아 돈을 내놔!라고 윽박질렀다가 곧 하하 웃으며 겁먹지 말라고 어깨를 치곤 했습니다. 양코 씨는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했지만 그게 서울이지요,라고 말하며 사람과 바람, 서울은 이 둘,이라는 식의 같잖은 각운을 맞추며 슬며시 웃었다. 양코 씨는 행색이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더럽거나 가벼워 보이지 않았고 왠지 모르게 품이 큰 윗도리와 팬츠가 썩 잘 어울리는 사내로 여타 한국 남자들처럼 목소리가 크거나 알 수 없는 이유로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며 애정과 복종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그게 일본인으로서의 자격지심 때문인지 원래 생겨먹은 성격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신중하고 예의 발랐으며 때때로 웃겨서 좋았지만 태순은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웃기면 웃으면 되는 거다, 하는 식으로 되뇌었고 나도 웃길 수 있는데 생각했지만 태순아, 여자가 웃긴 건 미덕이 아니야 하는 큰오빠의 말이 떠올랐다. 웃기고 있네, 웃기지도 않은 주제에. 태순은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생각난 걸 말하지 않고 속으로 말하다 보니 어느 순간 말하지 않는 게 편해졌고 받아칠 타이밍도 잊어버렸고 난 더 이상 웃기지 않나봐 생각이 들어 우울하기도 했지만 내가 나를 웃기니 그걸로 됐어, 웃기는 사람들을 가만히 지켜보거나 생각하고 집에 들어가 오늘 있었던 일을 쓰고 내일 있을 것 같은 일을 쓰고 더 기분이 좋을 때는 10년 후에, 30년 후의 일에 대해 일기를 쓰는 걸로 시간을 보냈다. 30년 후에는 마음대로 해도 된다, 그때는 나도 오십이 넘고 손녀 손자에 볼 장 다 봤을 나이고 텔레커뮤니케이션으로 외국인들과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는 세기말이니까 여자가 웃긴다고 지랄할 사람은 없겠지, 안 그래, 양코 씨? 하고 태순은 생각했다. 양코 씨는 자기가 뭘 실수했나 당황하는 표정을 지으며 태순을 봤다. 태순의 눈이 뭔가 말하고 있었고 입꼬리가 실룩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태순은 가끔 그랬고 말하고 싶은 게 잔뜩 있지만 말하지 않는다는 걸 온몸으로 말했는데 그건 나도 그래, 너랑은 다르지만 나도 그래, 68혁명이 일어나고 야스다 강당이 해방되고 멕시코 올림픽에서 검은 장갑 시위대가 행진하고 기동대가 투입되고 박살 난 동경대생들이 질질 끌려 나오는데 나는 여기서 뭐하지, 반도호텔과 삼성빌딩 사이에 서서 골목을 돌아 나오는 바람, 서울 시내의 골목을 휘젓고 튀어나온 젤리 같은 부드럽고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감상에 젖기나 하다니, 그렇지만 내가 서울에 살기로 한 것도 이 바람 때문인데, 베를린과 도쿄를 본뜬 서울의 건물들 사이를 거닐며 액화되는 공기의 흐름을 느끼면 안 되냐고 양코 씨는 생각했고 이쪽으로 가요, 오늘은 남산으로 가요,라고 말했다. 양코 씨와 태순 모두 서울에 산 지 1년 넘도록 변변한 친구가 없었고 친구를 사귈 생각도 없었다. 이르게 죽음을 맞은 망자처럼 서울의 남은 시간을 보기 위해 끊임없이 걸었고 그렇게 오래 혼자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길을 걸으며 누구와도 부딪치거나 마주치지 않으면 점점 얼굴이 흐릿해지고 몸의 가장자리가 천천히 깜박거리는 거 같은 느낌이 들지요, 양코 씨를 만난 건 그렇게 망각이 일상화되고 내가 서울의 풍경을 비추는 외벽유리처럼 느껴지던 때였습니다,라고 태순은 말했다. 양코 씨가 왜 양코 씨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의 본명은 쵸 쇼키치, 한문으로는 장장길(長璋吉). 하지만 모두 양코 씨라고 불렀다. 모두라고 해봤자 태순을 포함해 두어 명밖에 없지만 모두 양코 내지는 양코 씨라고 했고 그런데 별명에 씨를 붙이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그렇다고 양코라고 하기는 좀 그렇죠. 태순은 말했다. 양코라고 할 만큼 친하지 않고 쵸짱, 쵸쿤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양코 씨는 아무렇게나 불러요,라고 했고 이름에 대한 문제는 그걸로 일단락, 후에도 이름에 대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생각했다.
김경태 중앙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스위스 로잔예술대학교 대학원에서 아트디렉션 과정을 마쳤다. 주로 크고 작은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과 이미지화하는 방식에 관심을 두고 탐구하며, 종종 다양한 분야의 작업자 또는 기획자와 협업한다. 〈그래픽 디자인, 2005 – 2015, 서울〉(2016),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2016), 〈종이와 콘크리트: 한국 현대건축 운동 1987 – 1997〉(2017) 등의 전시에 참여했고, 『On The Rocks』(2013), 『Cathédrale de Lausanne 1505 – 2022』(2014), 『Angles』(2016) 등의 사진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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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콜로지란 사람들이 함께 잘살아갈 수 있는 물리적, 사회적 서식지(habitats)에 관한 학문으로, 그러한 삶을 조성하거나 좌절시키는 것을 인식하는(knowing) 방식, 그것을 통해 이 다층적으로 실현이 가능한 목적을 달성하게 하거나 혹은 이루지 못하게 가로막는 지식, 행위, 관습, 사회적 구조, 창조적이고 규범적 원칙들을 수립하는 에토스(ethos)와 아비투스(habitus)에 관한 학문이다.— 로레인 코드, 『에콜로지적 사고(Ecological Thinking)』, p. 25.
상처 도시: 〈환상 도시〉를 만들면서 자생적으로 근대국가를 구축할 기회를 만들지 못한 한국인에게 ‘모더니즘’이란 결코 단순한 단어가 아니다. 제16회 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 전시 준비를 시작할 무렵은 세월호의 트라우마가 ‘국가’에 대한 재고를 절박하게 요구하고 있을 때였고, 1960년으로부터 소환하는 위태롭고도 화려한 총체적 에너지는 오늘에 대한 거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들어가며: 한국과 독일 그리고 일본 한국과 독일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두 나라의 현대사를 아는 사람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나라가 분할되면서 수십 년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체제가 첨예하게 대결했던 분단국가이자 냉전의 최전선이었다는 (정치적)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두 나라가 분단된 이유는 다르다. 독일은 전범국가였기에 분단이 처벌의 의미를 가졌지만, 한국의 경우 일본제국주의의 명백한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후 미국(자본주의)과 소련(사회주의)의 대결구도 속에 억울하게 분단된 경우였다.
11 “그것이 나에겐 부럽습니다. 국가 건설의 시기 한국에서 건축을 한다는 것은 개인보다 국가나 민족이 앞으로 나오게 됩니다.”2 1985년 11월 도쿄의 한 호텔에서 진행된 대담에서 김수근은 이소자키 아라타(磯崎新)에게 이처럼 부러움을 드러냈다. 이소자키가 자신은 단게 겐조나 김수근처럼 “국가의 건축”을 고민하기보다 “국가를 등지고” 건축을 시작했다는 언급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이소자키의 언급은 김수근의 건축 이력을 정확하게 요약한 듯 보인다. 1959년 도쿄예대 대학원 동료들과 함께 남산 국회의사당 설계공모 당선으로 화려하게 데뷔하고, 1984년 서울올림픽 주경기장의 감격스러운 완공을 보았던 김수근의 이력은 많은 면에서 일본의 국가 건축가와 닮아 있었다. 그러나 존경의 대상이기도 했던 단게와 함께 자신을 위치 지은 이소자키의 언급에, 김수근은 긍지보다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리고 아마도 단게가 있었기에 그런 책임으로부터 놓여나 있던 같은 나이의 일본인 친구에게 오히려 부러움을 표했다. 뒤이어 “이 점에 있어서 이소자키 씨는 자유롭게 (건축을) 했습니다. 자유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지요”라고 덧붙였다.
들어가며 1967년 서울시는 한강 개발의 일환인 윤중제 건설(1968년 2월 준공)로 확보한 여의도 부지의 개발계획을 김수근에게 위임했다. 남산 국회의사당 현상설계(1959) 당선으로 건축계에 데뷔한 이래 김수근은 자유센터(1963), 부여박물관(1967) 등 전후 한국의 대표적 상징물들을 설계하며 ‘국가 건축가’로 부상하고 있었다. 정계와의 긴밀한 인맥을 바탕으로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설립을 주도하고 종로3가 재개발 프로젝트(1967) 같은 대규모 도시계획을 이끌어온 그가 여의도 개발계획을 맡게 된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미래의 부검: 여의도 1968 – 2018〉은 현실과 상상, 소설과 역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지극히 익숙하면서도 낯선, 다양한 주체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이들의 기억은 ‘여의도’라는 거대한 시대적 실험으로 엮여 있으나, 이야기를 주도하거나 이야기에 끌려가는 자 없이 평행선을 그리며 진행된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여의도는 실체적 장소라기보다 은유적인 허상으로 존재한다. 때로 면적의 비교 단위로 호명되는 여의도의 거대함, 광활한 평평함, 그리고 구석이 존재하지 않는 어색함은 곧 실현될 유토피아로서 여의도의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유지시킨다. 아스팔트 광장에 모여 기도하고 노래하고 농성했던 수백 만의 기억과, 매년 가을 여의도 하늘 위에 펼쳐지는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모이는 군중들, 그리고 봄마다 벚꽃 아래 윤중제를 걷는 시민들에게 여의도는 지금도 가까운 유토피아다. 여의도에서 우리는 이상적인 미래를 꿈꾸고, 그 꿈의 예언적 개념으로서의 운명은 국가 정체성의 견고함과 맞물려 있다. 사회적이며 미학적인 실험 대상으로서 여의도는 여전히 한국 아방가르드 건축의 성지다.
혁명 이후 영년(1960년)의 SF 4 · 19혁명으로 독재자를 쫓아내긴 했지만 사회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미운 놈 하나 물러나게 했다고 분단과 냉전이 끝나는 것도 아니었고, 가난과 피폐로 얼룩진 인민의 일상 또한 여전했다. 곧이어 들어선 민주당 정권은 무능하고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었다. 이들은 이듬해 닥칠 쿠데타와 그 후 18년간이나 이어질 박정희의 시간을 예감케 하는 전조에 불과했다.
“6만 평을 자유롭게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주 건물 10동의 위치는 물론 도로도 확정되어 있어 전시회를 위해서 어떻게 이것을 마스터플랜에 수정하느냐, 즉 박람회 분위기 가미만을 요구했기 때문에 큰 고충으로 어려운 과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 그 과정과 성과」, 『공간』 24호(1968년 10월)
발전국가와 메가스트럭처 2차 세계대전 후 전쟁의 상흔이 남은 여러 도시들의 한편에서는 시민들이 삶을 이어가기 위해 소형 필지에 새로이 비공식적 주거를 지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행정가 · 정치가 · 기업가들이 필지를 대형화해가며 도시 재건을 꿈꿨다. 이러한 전후 도시의 상황은 아방가르드 건축가가 권위와 획일성에 대항해 시민을 위한 변화, 다양성, 자유의 문제를 재고하는 폭발적인 계기가 됐다. 특히 1960년대 메가스트럭처(megastructure)는 전후 프로젝트에서 공유된 대안적인 도시계획의 개념이자 특권적인 초국가적 건축의 흐름으로 평가돼왔다. 이는 영국 아방가르드 네오 퓨처리스트에게 ‘인간환경의 통합적인 디자인으로 거시적 레벨에서 (건축가의) 통제와 질서가 강조되는 반면 미시적 레벨에서는 (시민에게) 소비 · 여가 · 무질서의 자유가 제공되는 것’1이었으며, 일본의 메타볼리스트(metabolist)도 서구 건축가의 작업과 더불어 그 지구적 상황을 함께한 사회운동으로 중요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아시아의 발전국가 프로젝트를 메가스트럭처로 규정하는 것은 조금 더 복잡하다. 그 건축은 ‘서구에 보내는 메시지’2로 다소 압축되거나 오리엔탈리즘의 열망을 추구한 ‘파생적인 모더니티’로 다뤄지는 경향이 있다.
1966년,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는 종묘에서 남산까지 서울 시내 총 8개의 블록을 근대적 도시로 탈바꿈시키는 재개발 계획을 맡았다. 이듬해, 세운상가는 오래된 도심 한가운데를 날카롭게 가로지르며 등장했다. 이후 이 거대 구조물은 주변의 사용자들에게 서서히 잠식당하며 도심 영세 산업의 숙주로써 개발 압력에 버티며 50년간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2018년 현재, 세운상가를 활용한 공공영역의 재구축 시도가 새롭게 진행되고 있으며, 동시에 세운상가 주변 블록에 대한 재개발 압력 또한 커지고 있다.
형식 따위에는 관심도 없을 법한 뻔뻔한 표정으로 갈색 나팔바지와 깃 넓은 빨간 셔츠를 풀어헤쳐 입던 여느 때와 달리 얌전하게 차려 입은 정장 옷깃 위에 큰 꽃을 달고 단상에 올라 누군가 대신 써둔 듯한 개회사를 열심히 읽고 있는 김수근의 모습은, 그가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KECC,이하 기공)의 2대 사장이던 1968년 10월 ‘고속도로건설기술심포지움’이라는 공식 행사를 기록한 사진 속에 담겨 있다. 아직 30대 후반이던 젊은 김수근이 기공의 사장으로 부임한 것은 1968년 4월이었으나, 그는 이미 1966년부터 기공 내에 설립된 도시계획부에 자신과 함께 일했던 윤승중 이하 젊은 건축가들을 모두 불러모았고, 사실상 설립부터 기공의 최고 책임자 역할을 담당했다. 김수근 팀과 기공의 어색한 공생은 1969년 그가 인간환경연구소를 만들며 독립할 때까지 3년 동안 지속됐고, 그 숨 가빴던 3년간 김수근 팀이 만들어낸 다수의 설계도와 보고서들은 한국 현대건축의 초기에 활동을 시작한 젊은 건축가들의 야심 찬 실험들이었다.
1 ‘아방가르드’(Avant-garde)는 20세기 예술사에서 가장 남용된 단어 가운데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아방가르드’를 설정해보려는 이 글은, 결국 아방가르드에 대한 최소한의 논의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현대건축을 이해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친 베니스의 역사학자 만프레도 타푸리(Manfredo Tafuri)는 아방가르드의 역할을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가 야기하는 충격을 피할 수 없는 존재 조건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아방가르드는 근대가 불러온 전대미문의 충격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예방접종 같은 것이었다.
1 2018년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 공동감독을 맡은 이본 파렐(Yvonne Farrell)과 셸리 맥나마라(Shelley McNamara)는 관대함과 인류애, 두 가지를 건축의 핵심과제로 규정하면서 ‘Free Space’(자유공간)라는 주제를 발표했다. ‘자유공간’을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기회와 민주화의 장이 되는 불확정적 도시 공간으로 정의한 두 사람은, 공적 공간 – 사적 공간의 교차와 공간의 공유를 통해 집단의 정치적 잠재력을 일깨우며, 사람과 장소 사이에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건축의 역할이라고 밝혔다. 이에 71명의 건축가와 63개의 각 국가관은 ‘자유공간’에 대해 저마다의 해석을 내놓았다.
2018년 베니스비엔날레 제16회 국제건축전 한국관 전시 〈국가 아방가르드의 유령〉의 한국어판 도록이 나오게 되어 매우 기쁜 마음입니다. 더불어 해외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한국관 전시를 아르코미술관에서의 귀국보고전을 통해 국내에도 보여드리게 되어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번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의 한국관 큐레이터는 김성홍 예술감독을 비롯해 5명의 공동 큐레이터로 구성됐다. 이들은 수평적 구조 속에서 《용적률 게임: 창의성을 촉발하는 제약》(이하 ‘용적률 게임’)이라는 전시 타이틀을 통해 한국 건축의 주요 생성 원리를 탐구했다. 총감독 알레한드로 아라베나가 ‘전선에서 알리다(Reporting from the Front)’란 주제를 제시함으로써 건축가의 사회적 실천을 보고자 했다면, ‘용적률 게임’은 시장원리에 충실한 한국 건축의 단면을 드러낸다. 한국관 공동 큐레이터들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현장 인터뷰를 통해 들어봤다.1
양혜규는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조각을 전공했고, 지금은 서울과 베를린을 주요 거주지로 삼아 작업 활동을 하며, 미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여러 국경을 넘나드는 그의 삶은 이렇다: 하루는 서울작업실에서 선후배 동료 작가들과 미술 팟캐스트를 준비하고, 다른 날은 스웨덴 말뫼에 있는 학교에 출근한다. 2주간의 학교 업무일정이 끝나면 다시 여러 명의 어시스턴트가 일하는 베를린 작업실로 귀가한다. 뉴욕현대미술관MoMA이 초기작 <무명 학생 작가의 흔적>(2001)과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서 선보인 <살림>(2009), 그리고 최근에는 <향신월香辛月>(2013) 등을 소장할 만큼 양혜규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 주류 현대 미술계의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를 ‘비판적 생각을 하고 감각이 예민한 젊은 작가’ 이상으로 미술계에 각인시킨 전시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당시 같은 30대였던 기획자 김현진과 만들어낸 《사동 30번지》(2006)라 할 수 있다. 미술관이나 화랑 등의 제도화된 공간에서 벗어난, 작가 외할머니의 인천 옛집에서 가졌던 《사동 30번지》는 이른바 ‘자가-조직적self- organized’이라고 번역되는 형식이 두드러진 전시이자 작업 그 자체이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양혜규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한국 행사(2005) 조직위의 현지 사무실에서 일하기도 하는 등 ‘작업만’ 하지는 않는다. 인터뷰는 2월 8일 서울 연건동의 양혜규 작업실에서 진행했고 이 글을 정리하는 필자 김진주는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 코디네이터로 일하며 그를 처음 대면했다. 당시 작가 양혜규에게서 받은 첫인상은 개념적으로도 맥락적으로도 대규모의 작업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힘이 있으면서, 손이 많이 가는 살림살이의 역할과 기능을 중히 여기고 이에 헌신하고자 노력한다는 점이었다.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 《응결: 양혜규》를 하나의 기점으로 양혜규는 이후 ‘세계적 한국 작가’의 타이틀을 얻고 그에 걸맞게 활동해왔다. 한국 미술계도 이런 작가의 활약을 반기는 듯 이듬해 아트선재센터에서는 작가의 첫 기관 개인 초대전 《셋을 위한 목소리》(2010)를 열었고, 삼성미술관 리움은 올해 또 다른 개인전 《코끼리를 쏘다 象 코끼리를 생각하다》를 개최했다 (2015년 2월 10일~5월 10일). 현재 작가는 샤르자 비엔날레 12에서도 신작 <불투명 바람>을 전시 중이다.1
건축 저널리즘은 생기를 잃을 것이고, 건축 저널리스트는 곧 역사의 뒤편으로 퇴장할 것으로 전망되어 왔다. 이러한 격랑 속에서 『와이드AR』, 『공간』, 『다큐멘텀』 등 국내의 건축 저널은 자신만의 차별성을 유지하며 거센 바람에 맞서고 있다. 해외발 건축 프로젝트 소개 웹사이트의 붐 속에서도 종이 잡지의 생명력을 잃지 않고,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고군분투하는 이들 매체의 편집장을 초대해 현재 건축 저널의 상황과 고민, 그리고 한국 건축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지난 한해를 돌아봤다.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한국관은 원래 남북 공동전시가 플랜 A였다. 하지만 지금 전시 중인 《한반도 오감도Crow’s Eye View: The Korean Peninsula》는 만일을 대비한 플랜 B이다. 이상의 <오감도烏瞰圖>에서 착안한 이 전시는 건축가, 사진가, 컬렉터, 화가, 디자이너, 비디오 작가 등 다양한 작업을 통해 지난 100년의 한국 건축을 조망했다. 특히 분단 이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각자의 길을 걷고 있는 남북의 건축과 도시의 공통점을 건축가의 상상력으로 탐구하여 “훌륭하게 이상하다wonderfully bizarre”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결핍되어 더 간절한 우리 건축의 공통체 공통체……. 참 아름답고, 늘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이유는 진정한 ‘살이/존재’의 틀이기 때문이고, 간절히 바라는 이유는 우리 건축 현실에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통체’라는 말은 내게 몇 가지를 즉각 떠올리게 한다. ‘공통 지반Common Ground’이라는 제목으로 열렸던, 우리 건축 내부의 비난이 가장 드셌던, 김병윤이 한국관 전시 지휘를 맡았던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 전시회(2012), 그리고 슬라보예 지젝이 조직한 국제 심포지엄1의 이름이자 그로써 유럽 지식인들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른 ‘코뮤니즘’ 문화현상(2009), 마지막으로 얼마 전 우리말 번역본으로 출간된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공통체』(2014) 등이 그것이다.
균열된 토대 위에서의 건축 건축전시는 이미 지어진 건축물을 가져올 수도 없고 이를 그대로 재현할 수도 없다. 베니스비엔날레 조직위원장인 파올로 바라타 Paolo Baratta가 2008년에 지적했듯, 오로지 도면과 모형, 그리고 다양한 표현방식으로 건축의 프로세스와 개념을 전달할 뿐이다. 작품을 통해 작가의 세계관을 드러내고 이를 세상에 직접적으로 던져내는 비엔날레 미술전과 달리, 비엔날레 건축전은 언제나 건축에 대한 아이디어, 건물을 짓는 행위, 실제 건물에 대해 간접적인 이야기를 할 뿐이다. 그렇다면 일종의 재현일 뿐인 전시가 우리에게 왜 필요할까.
동일본 대지진 이후 삶은 다각도에서 변화를 가지게 되었다. 대지진, 원전 사고 그리고 또 다른 재난으로서 신자유주의 이후 경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나 언제나 문제가 생기고 나서야, 비로소 몸과 마음을 앓고 나서야 진정으로 배우게 된다. 본 지면에서는 너무 빠르지 않게 우리의 일상에서 재난에 대한 사고가 증발되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대답하는 과정들을 가진 건축가, 예술가들의 작업들을 모았다. 해체된 커뮤니티를 다시 회복시키고, 건축가 또는 예술가로서 재난 이후 변화한 환경에서 어떤 실천들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한다. 이러한 질문들은 오늘날 미디어를 통해 변화된 재난에 반응하는 감각체계에 주목하는 것까지 연장되었다. 여전히 재난을 바라보고 읽는 것은 고통을 동반한다. 그러나 이들을 포함한 많은 건축가와 예술가들은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의식적으로 직시하려 노력하고 있다. 역사적, 문화적 문맥 안에서 충실한 이들의 작업 이후 역시 계속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의 한국관이 시작부터 심각한 비판을 받고 있다. 한 국가관이 명확한 메시지를 보여주지 못하고 대형 건축 설계 사무소의 홍보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김일현 교수가 논란이 시작될 때 보내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