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행복, 평화와 안전, 헌법과 질서, 민주주의. 2024년 12월 우리 몸과 마음에 매일매일 새겨넣은 한마디 한마디다. 국회의사당, 국민의힘 당사, 헌법재판소를 에워싸고 밤낮 울려 퍼진 시민들의 맹렬한 외침은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했던 것들이 어쩌면 그렇게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그저 공기처럼 주어진 것이 아니라 힘겹게 쟁취해낸 것이었다는 각성과 깨달음이 우리로 하여금 뉴스창을 수시로 새로고침하게 하고 종일의 피곤을 짊어지고 광장으로 나가게 만들었다.
현물 없는 자본주의 기독의 신학에서 시간은 인간이 소유할 수 없다. 그래서 시간은 신의 선물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서유럽의 역사에서 소유할 수 없는 시간을 소유하여 시간의 흐름에 따라 돈을 받는 고리대금업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당연히 이들은 신학적 입장에서 배척 받았다. 그들은 유대인이었다. 민족의 삶을 영위할 영토가 없이 떠돌며, 항상 쫓겨날 각오를 하고 살았던 그들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시간이라는 황금이었다. 일정한 돈을 빌려주고 시간에 따라 이자를 받는 일은 건물이나 땅을 소유하는 것보다 비교적 안전한 일이었다. 서유럽의 기독교인들에게 유대인의 그런 행태는 신의 선물을 모독하는 것으로 비춰졌다. 서유럽의 유대인 박해는 이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유대인에 대한 악감정과 인종주의적 편견, 그리고 기독교 신학에 대한 입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결국 아우슈비츠의 비극은 히틀러의 광기만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모든 서유럽인들의 공모였다. 그러나 이미 서유럽의 금융업을 장악한 유대인들에게 양차세계대전은 새로운 국면을 준비하고 있었다. 세계자본주의를 금융자본주의로 재편하는 일이었다. 나는 지금 남한의 사회구성체를 ‘신자유주의 식민지 부동산자본주의’로 규정한다. 양차세계대전을 기회로 성장한 금융자본주의는 이제 전세계에서 현물없는 자본주의를 팽창시키고 있다.
삶의 대부분이 상품화·시스템화되는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예술과 정치는 어떤 공통의 지평을 보여줄 수 있을까. 우리는 공동체 안에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을까. 괴물이 되어가는 미디어 속에서 우리 스스로 책임 있는 가치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이들이 일상으로의 복귀를 주저하는 동안, 정치학자 박상훈과 예술가 임민욱이 만나 이러한 질문들을 나눴다.
실패한 것은 민주주의의 미래 우리는 이제 굳이 ‘정치적인 것’의 개념과 ‘경합주의’ 정치이론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공동체란 언제나 분열적이며 ‘공동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혹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이름에 걸맞게 둘, 혹은 그 이상으로 쪼개진다는 사실을 너무나 당연시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지난 대통령 선거 결과는 단순히 제도화된 정치의 장 안에서 경쟁하는 둘 혹은 그 이상의 정파 내지는 정당들 중에서 누가 더 상대적으로 많은 득표를 했는가의 문제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처럼 보였다. 선거의 결과는 공동체 전체의 분할 비율이 반영된 것이라는 인상을 승리한 측과 반대 측 모두에게 각인시켜주는 듯했다. 따라서 여전히 선거란 그 결과가 박빙의 불확정성에 열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기적 자유경쟁 선거를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보았던 절차적이고 이른바 ‘최소주의’적 관점 이론가들의 예측과 달리, 패자가 다음 기회에서의 승리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결과에 승복하는 아름다운 “민주주의의 기적”(아담 셰보르스키)을 더 이상 기대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선거의 결과란 더 이상 공동체를 분할하는 본원적인 갈등과 적대의 차원 (‘정치적인 것’ 혹은 친구와 적의 구별)을 다원주의적이고 제도적인 ‘정치’의 차원을 통해 완화한 상대적 결과라기보다는 바로 ‘정치적인 것’ 자체의 절대적 표현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대중정당의 쇠퇴와 함께 (하버마스의 말을 따르면) “거리의 압력”, 혹은 날 것의 사회적 갈등이 어떤 매개도 거치지 않고 완화되지 않은 형태로 제도 정치 안으로 유입되면서 정치와 정치적인 것 사이의 구분이 무너지는 상황에서는 심지어 패자만큼이나 승자 또한 선거의 결과에 승복하거나 그 정당성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드러나게 된다. ‘독재자의 딸’ 대통령 당선과 끝나지 않는 부정선거에 관한 논란은 분명 표면적으로 민주주의 실패와 유신 독재시대로의 회귀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외형적 유사성과 달리 본질적으로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은 바로 선거가 약속했던 민주주의의 이상에 대한 ‘탈주술화’와 실망이다. 실패한 것은 민주주의 자체라기보다는 주기적 자유경쟁 선거가 약속했던 민주주의의 미래였다. 이러한 실망은 보다 능동적인 증오로 발전하는데, 자크 랑시에르의 적절한 표현에 따라 이중적 의미에서의 “민주주의의 증오”, 즉 민주주의에 ‘의한’ 증오이자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가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