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혹은 따뜻한 위로 _ <위로공단>은 지난 50여 년에 걸친 우리 산업화와 압축발전의 시간을 여성 노동자들의 공간을 통해 보여준다. 그들의 억압적 삶을 단순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공간으로 성찰한다. “선택할 것이 있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바람처럼 가족을 위해 자신을 삶을 바친 여성 노동자들의 현장은 임흥순의 즉흥적이고 따뜻한 시선의 비판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의 폭압성과 더불어 여성적 위로를 떠올리게 한다. 미학자 양효실의 인터뷰와 사회학자 조은의 크리틱을 통해 임흥순의 세계를 다각적으로 살펴본다.
시나리오: PaTI·장영철 2014.06.14 날씨: 맑음, 아직 약간 쌀쌀함.
“친구들이 ‘굿 보러 가자’고 해서 따라갔더니 활동사진을 상영하고 있었다.” – 화가 천경자, 1930년대
1959년, 서울 창신동의 봄 1959년 봄, 쌍꺼풀이 큰 눈에 얼굴은 통통하고 두 갈래 댕기머리를 하고 있는 17살의 내가 있다. 동대문이라 불리는 흥인문에서 멀지 않은 이곳은 내가 처음으로 밟은 서울 땅, 창신동이다. 서울에 올라온 지 1년이 채 안 되어 둘째 동생은 고열로 사경을 헤매다 보름 만에 죽었다. 아버지는 병원비가 아까워서인지 집에서 치료를 해도 나을 거라고 했다. 그렇게 버티다 죽은 동생의 나이가 겨우 10살이었다. 10년 후 막내 동생도 시름시름 앓다가 둘째처럼 이 세상과 인연을 끊어야 했다. 막내의 나이 17살. 내가 서울에 올라왔을 때와 같은 나이였다. 서울의 공기가 동생들과 맞지 않았나 보다 생각했다. 가끔 동생들이 아들이었어도 병원에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슬픔이었지만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것은 아마도 고지식하고 말이 없던 아버지가 동생들의 죽음보다 무서웠던 탓도 컷을 것이다. 서울은 생각보다 훨씬 춥고 서늘했다. 한 남자가 집으로 자주 찾아와 아버지에게 술대접을 했다. 술을 좋아하는 아버지는 남자의 술대접에 무척 행복해했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던 남자는 두 갈래의 내 머리에 반했다고, 딸을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시골 사람이라 서울에 와서도 몇 년간 머리카락을 자르지 못하게 했는데, 그게 내 미래를 염두에 둔 것이었을까? 얼마 후 그 남자와 결혼을 하고 창신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답십리로 이사를 했다. 남편의 누나이자 내겐 형님이 되는 어른께서 집을 장만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곳에서 첫째 아들을 낳았다. 월세, 전세 개념이 없던 어린 나는 결혼생활을 내 집에서 시작한다는 것이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몰랐다. 결혼 4년 째 되는 해, 착한 사람이지만 술 좋아하고 귀 얇은 남편이 사기 아닌 사기를 당했다. 남편은 “돈 많이 벌어서 다시 살 수 있다. 더 크고 넓은 2층 집으로 가자”고 말했다. 우린 젊으니까 또 집을 장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집이 처음이자 마지막 내 집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공간은 가난한 삶을 가장 강하게 구조화, 재구조화한다. 빈곤층의 아이들은 그 공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찍 가출하고, 일찍 동거한다. 그리고 가난은 재생산된다. <건축신문> 4호에서는 지난 25년간 사당동 재개발 지역에서 만난 가족의 삶을 통해 우리 사회의 공간의 빈곤성을 주목해온 사회학자 조은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았다. 이어서 김홍중 교수가 사회학자로서 조은의 소명의식을 조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