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결에 똥침을, 소수결의 쾌락을!
양효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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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동화주의의 폭력성
다수결의 원칙에서라면 당연히 다수가 승리한다. 소수는 지는 편, 승자의 배경이다. 배경이 된 인간에게는 목소리나 인간성이 주어지지 않는다. 한 사회의 규범과 상식, 도덕을 곧 자신의 일상적 에토스의 기반으로 전유하는 이들에게 다수성은 그 자체로 선이고 정의이다. 사회의 안전과 안정은 곧 다수의 원칙이 관철되고 있는가 혹은 관철될 수 있는가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소수를 위한 정책은 ‘예외적’으로, 크나큰 시혜로서만 존재한다. 부르주아 자유주의를 따르는 근대적 국가는 많은 사람을 ‘우리=선량한’ 시민들로 호명하면서 아직 충분히 선량하지 못한 시민들을 훈육, 통제하는 장치들을 체계화했다. 소수자 ―한국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해 여성, 어린이, 청년, 장애인, 동성애자들로 한정한다면― 는 선량한 사람으로 자신을 조직화하고 동화시켜야 할 임무가 주어진다. 가령 ‘장애인도 사람이다’와 같은 구호는 기존의 ‘인간(성)’의 정의(定義)에 스스로를 꿰어맞추는, 기존의 인간 규범에 편입되려는 소수자 편의 제스처를 가시화한다. 소수자의 소수자성(타자성!)을 희생하는 대신 주류의 인간성으로 이전하려는 이와 같은 동화주의(assimilationism)는 먼저 국민이나 인간으로 진입한 이들의 궤적을 소수자들이 또 반복하고 강화하는 움직임을 뜻한다. ‘미래’는 현재 선량한 시민들 다음에 자신들을 좋은 이름으로 부를 시간, 공간의 은유이다. 그렇게 다수결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는 서구화, 근대화, 인간화, 국가화, 정상화를 함께 끌고 앞으로 전진하는 체제이고 이데올로기이다. 안전과 안정에 대한 문화적인 희구는 양순한 신민들(subjects)로서의 인간 주체의 조율 혹은 출현, 혹은 인간 삶의 억압을 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