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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한국과 독일 그리고 일본 한국과 독일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두 나라의 현대사를 아는 사람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나라가 분할되면서 수십 년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체제가 첨예하게 대결했던 분단국가이자 냉전의 최전선이었다는 (정치적)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두 나라가 분단된 이유는 다르다. 독일은 전범국가였기에 분단이 처벌의 의미를 가졌지만, 한국의 경우 일본제국주의의 명백한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후 미국(자본주의)과 소련(사회주의)의 대결구도 속에 억울하게 분단된 경우였다.
11 “그것이 나에겐 부럽습니다. 국가 건설의 시기 한국에서 건축을 한다는 것은 개인보다 국가나 민족이 앞으로 나오게 됩니다.”2 1985년 11월 도쿄의 한 호텔에서 진행된 대담에서 김수근은 이소자키 아라타(磯崎新)에게 이처럼 부러움을 드러냈다. 이소자키가 자신은 단게 겐조나 김수근처럼 “국가의 건축”을 고민하기보다 “국가를 등지고” 건축을 시작했다는 언급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이소자키의 언급은 김수근의 건축 이력을 정확하게 요약한 듯 보인다. 1959년 도쿄예대 대학원 동료들과 함께 남산 국회의사당 설계공모 당선으로 화려하게 데뷔하고, 1984년 서울올림픽 주경기장의 감격스러운 완공을 보았던 김수근의 이력은 많은 면에서 일본의 국가 건축가와 닮아 있었다. 그러나 존경의 대상이기도 했던 단게와 함께 자신을 위치 지은 이소자키의 언급에, 김수근은 긍지보다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리고 아마도 단게가 있었기에 그런 책임으로부터 놓여나 있던 같은 나이의 일본인 친구에게 오히려 부러움을 표했다. 뒤이어 “이 점에 있어서 이소자키 씨는 자유롭게 (건축을) 했습니다. 자유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지요”라고 덧붙였다.
들어가며 1967년 서울시는 한강 개발의 일환인 윤중제 건설(1968년 2월 준공)로 확보한 여의도 부지의 개발계획을 김수근에게 위임했다. 남산 국회의사당 현상설계(1959) 당선으로 건축계에 데뷔한 이래 김수근은 자유센터(1963), 부여박물관(1967) 등 전후 한국의 대표적 상징물들을 설계하며 ‘국가 건축가’로 부상하고 있었다. 정계와의 긴밀한 인맥을 바탕으로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설립을 주도하고 종로3가 재개발 프로젝트(1967) 같은 대규모 도시계획을 이끌어온 그가 여의도 개발계획을 맡게 된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6만 평을 자유롭게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주 건물 10동의 위치는 물론 도로도 확정되어 있어 전시회를 위해서 어떻게 이것을 마스터플랜에 수정하느냐, 즉 박람회 분위기 가미만을 요구했기 때문에 큰 고충으로 어려운 과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 그 과정과 성과」, 『공간』 24호(1968년 10월)
현대식 교량을 건널 때마다 나는 갑자기 회고주의자가 된다이것이 얼마나 죄가 많은 다리인 줄 모르고식민지의 곤충들이 24시간을자기의 다리처럼 건너다닌다나이 어린 사람들은 어째서 이 다리가 부자연스러운지를 모른다그러니까 이 다리를 건너갈 때마다나는 나의 심장을 기계처럼 중지시킨다(이런 연습을 나는 무수히 해왔다)— 김수영, 「현대식 교량」(1964)에서
발전국가와 메가스트럭처 2차 세계대전 후 전쟁의 상흔이 남은 여러 도시들의 한편에서는 시민들이 삶을 이어가기 위해 소형 필지에 새로이 비공식적 주거를 지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행정가 · 정치가 · 기업가들이 필지를 대형화해가며 도시 재건을 꿈꿨다. 이러한 전후 도시의 상황은 아방가르드 건축가가 권위와 획일성에 대항해 시민을 위한 변화, 다양성, 자유의 문제를 재고하는 폭발적인 계기가 됐다. 특히 1960년대 메가스트럭처(megastructure)는 전후 프로젝트에서 공유된 대안적인 도시계획의 개념이자 특권적인 초국가적 건축의 흐름으로 평가돼왔다. 이는 영국 아방가르드 네오 퓨처리스트에게 ‘인간환경의 통합적인 디자인으로 거시적 레벨에서 (건축가의) 통제와 질서가 강조되는 반면 미시적 레벨에서는 (시민에게) 소비 · 여가 · 무질서의 자유가 제공되는 것’1이었으며, 일본의 메타볼리스트(metabolist)도 서구 건축가의 작업과 더불어 그 지구적 상황을 함께한 사회운동으로 중요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아시아의 발전국가 프로젝트를 메가스트럭처로 규정하는 것은 조금 더 복잡하다. 그 건축은 ‘서구에 보내는 메시지’2로 다소 압축되거나 오리엔탈리즘의 열망을 추구한 ‘파생적인 모더니티’로 다뤄지는 경향이 있다.
1966년,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는 종묘에서 남산까지 서울 시내 총 8개의 블록을 근대적 도시로 탈바꿈시키는 재개발 계획을 맡았다. 이듬해, 세운상가는 오래된 도심 한가운데를 날카롭게 가로지르며 등장했다. 이후 이 거대 구조물은 주변의 사용자들에게 서서히 잠식당하며 도심 영세 산업의 숙주로써 개발 압력에 버티며 50년간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2018년 현재, 세운상가를 활용한 공공영역의 재구축 시도가 새롭게 진행되고 있으며, 동시에 세운상가 주변 블록에 대한 재개발 압력 또한 커지고 있다.
형식 따위에는 관심도 없을 법한 뻔뻔한 표정으로 갈색 나팔바지와 깃 넓은 빨간 셔츠를 풀어헤쳐 입던 여느 때와 달리 얌전하게 차려 입은 정장 옷깃 위에 큰 꽃을 달고 단상에 올라 누군가 대신 써둔 듯한 개회사를 열심히 읽고 있는 김수근의 모습은, 그가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KECC,이하 기공)의 2대 사장이던 1968년 10월 ‘고속도로건설기술심포지움’이라는 공식 행사를 기록한 사진 속에 담겨 있다. 아직 30대 후반이던 젊은 김수근이 기공의 사장으로 부임한 것은 1968년 4월이었으나, 그는 이미 1966년부터 기공 내에 설립된 도시계획부에 자신과 함께 일했던 윤승중 이하 젊은 건축가들을 모두 불러모았고, 사실상 설립부터 기공의 최고 책임자 역할을 담당했다. 김수근 팀과 기공의 어색한 공생은 1969년 그가 인간환경연구소를 만들며 독립할 때까지 3년 동안 지속됐고, 그 숨 가빴던 3년간 김수근 팀이 만들어낸 다수의 설계도와 보고서들은 한국 현대건축의 초기에 활동을 시작한 젊은 건축가들의 야심 찬 실험들이었다.
전시의 설정 〈국가 아방가르드의 유령〉은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김수근 (1931 – 1986)이 2대 사장으로 몸담았던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의 흔적을 찾는 것에서 출발했다. 김수근은 1966년에 창간된 한국 최초의 문화예술지 『공간』을 만든 건축사무소 공간의 대표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기공 재임시절(1965 – 1969)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가 공간 소속의 건축가 중심으로 꾸린 도시계획부는 기공 안에서도 몹시 예외적인 조직이었다. 기공은 ‘한국종합기술’이라는 이름으로 현존하지만 현재의 기공에 당시 기록은 전무하다. 특히 건축 사업은 기공 역사에서 매우 주변적인 프로젝트이기도 했거니와, 이제는 한국의 원로 건축가가 된 당시 도시계획부 소속 건축가들 역시 오늘날의 기공에 영향을 미치고 있지는 않다.
1 ‘아방가르드’(Avant-garde)는 20세기 예술사에서 가장 남용된 단어 가운데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아방가르드’를 설정해보려는 이 글은, 결국 아방가르드에 대한 최소한의 논의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현대건축을 이해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친 베니스의 역사학자 만프레도 타푸리(Manfredo Tafuri)는 아방가르드의 역할을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가 야기하는 충격을 피할 수 없는 존재 조건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아방가르드는 근대가 불러온 전대미문의 충격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예방접종 같은 것이었다.
한국의 동시대 건축이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국제적 인프라의 부실이다. 국제 규모의 행사에서 건축가의 역할이 큰 맥락의 기획자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과 현대건축 선배 세대의 건축 유전자를 재평가하고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끌어내려는 노력이 미흡한 것이 주요 원인이다. 건축가 임재용은 내년 서울세계건축대회를 통해 한국의 근대건축가를 재조명하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고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