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적 이미지의 지지체를 은유적으로 ‘몸’이라 표현하며, 오늘날의 범 시각예술에 대한 글쓰기 워크숍을 진행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운영팀의 아주 사소한 커뮤니케이션 실수는 ‘몸’을 ‘모험’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어쩌면, 함께 글을 쓰고, 서로 피드백을 격렬히 주고받고, 그 결과를 출판물로 남기고 알리는 동료를 찾는 모험이 더 시급해서 의도적으로 오독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비평적 글쓰기 모임의 운영자와 글쓰기의 고독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을 들어본다.
나 이외의 모든 것, 아니 심지어 나 자신에게도 소홀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회의감은, 사사롭다고 스쳐버린 것들이 품은 우주와 고유성에 놀라고 집착하는 것으로 전이된다. 한 젊은 과학기자는 ‘관계와 관계맺음’을 물음으로 생명의 존재 원인과 생태의 연결고리를 다양한 분야를 둘러 질문한다. 그것도 이제는 멸종된 편지의 형식으로. 우리나라에서 과학 전문기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또 그는 한때는 철학이었으나 지금은 과학으로 전문화된 분야의 눈으로 어떤 질문을 던질까. 이러한 물음으로 『과학동아』의 윤신영 편집장을 만났다.
억지로 읽기 말과 글은 오해를 피할 수 없지만 오해받으면 누구나 억울한 법이다. ‘오해’의 역사는 깊다. 분서갱유나 중세시대 파문破門은 오독이란 결국 권력 행위이며 당사자에게는 생사의 문제였음을 보여준다. 현행 국가보안법은 북한이나 이데올로기 관련 사안처럼 보이지만, 앎에 대한 사법적인 동시에 무의식적인 통제라는 점에서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이슈다. 책과 관련된 의도된 오독과 정치적 사건들을 상기하면, ‘읽기’가 호모 사피엔스임을 뽐내는 인간의 대표적 행위 같지만, 실상 인간은 그다지 ‘사피엔스’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독서가 언제나 마음의 양식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