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홍성에 들어선 미술공간 <이응노의 집> 이후로 조성룡 성균관대 교수는 활동이 뜸한 것처럼 보였다. 간담상조肝膽相照했던 평생의 지기 정기용 건축가가 2011년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상심이 어떠했을 지는 굳이 가늠할 필요조차 없어보였다. 그럼에도 새로운 일을 쉬지 않고 해온 조 교수의 스타일을 생각하면 그의 에너지가 식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동시대 건축가들 중에서 조성룡 교수보다 더 유명한 이는 늘 있었다. 그러나 그처럼 꾸준하게 건축을 해온 이는 드물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건축계에서 그의 존재감은 점점 더 커져갔다. 그의 위상을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은 언론을 통해 간간이 발표되는 각종 설문조사들이다. 2011년 <조선일보>가 국내 건축가와 건축학과 교수 등 전문가 2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물’ 설문에서 조 교수의 대표작 한강 <선유도공원>은 1위에 올랐다. 건축을 베스트나 워스트로 순위를 매기는 것이 옳은 것인지는 차치하더라도, 2000년대 이후 꽃을 피운 그의 건축이 한국을 대표하는 반열에 오른 것만큼은 분명할 것이다.그리고 올해 초 ‘SPACE’와 <동아일보>가 함께 발표한 ‘건축가 100인이 꼽은 한국 현대건축 베스트’ 조사 결과는 조 교수의 비중을 더욱 분명하게 확인시켜준 소식이었다. 최고 건축물 20개 안에 조 교수의 작품은 <선유도공원>(조성룡 +정영선, 2002)이 3위, 어린이대공원의 <꿈마루 >(2011)가 14위, <의재미술관>(조성룡+김종규, 2001)이 17위에 올랐다. 세 개의 작품이 한국 현대건축 베스트에 꼽힌 건축가는 그가 유일했다. 세 작품 모두 2000년대 이후의 것이란 점, 그리고 모두 공공성이 강한 건축이란 점은 더욱 의미심장했다.어느새 조 교수는 한국 건축계 최고 윗세대가 됐다. 1940년대 생 건축가들 중에 지금껏 일선에서 활동하는 이는 이제 그 외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같은 세대 중진 건축가들 중에서 그처럼 아들뻘인 후배들과 지속적으로 만나며 호흡하는 이도 없다.10년 전, 그의 회갑을 맞아 후배 22명이 글을 써 헌정한 책, 『건축 사이로 넘나들다』(2004) 의 서문에는 조 교수를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이 있다. “60이 된 조성룡은 여전히 호기심 어려 있고, 여전히 끊임없이 일을 벌이고 있으며, 여전히 실무 건축인의 부지런함을 그대로 안고 있으며, 여전히 자신의 손과 발로 그 무엇을 만드는 일을 즐기는 모습도 그러하다. 여전히 영화와 음악과 책과 회의와 현장을 쉴 새 없이 오간다. 여전히 어떠한 질문에도 소박한 답을 하면서도, 여전히 고집스럽게 심지 굳다.”10년이 지나 그가 칠순을 맞은 지금도 이 구절은 유효하다. 발표하는 작품 소식은 줄어든 듯해도 그는 여전히 무언가를 하고 있다. ‘젊은건축가상’ 을 비롯한 여러 심사에서 그의 이름을 볼 수 있고, 여러 건축계 행사장에서 그의 얼굴을 직접 마주칠 수 있었고, 페이스북에 올리는 사진을 통해 자주 근황을 접할 수 있다.전화와 웹으로 안부를 전해오다가 《건축신문》 의 인터뷰 원고 요청으로 조 교수의 <지앤아트 갤러리>(경기도 용인)에서 모처럼 여유롭게 그를 만났다. 조성룡 건축을 보면서 성장한 후배 건축가들이자 ‘파워건축블로거’들이 부담 없이 만나는 자리에 끼어들어 담소와 술자리로 인터뷰를 대신했다. 6시에 시작한 모임은 밤 11시에나 끝이 났을 정도로 오래 이어졌고, 그는 진지하면서도 무겁지 않게 여러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공간』지가 공간건축의 지원 중단으로 폐간 위기에 몰렸다고 한다. 진위 여부를 떠나 건축과 디자인 전문지의 상황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어려운 경제ㆍ사회 여건에서 건축과 디자인 콘텐츠는 앞으로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가?’란 의문을 갖게 된다. 전문지와 신문에서 건축과 디자인 콘텐츠를 만드는 김광철 『그래픽』 발행인 겸 편집장, 이은주 「중앙일보」 기자, 정귀원 『와이드AR』 편집장, 구본준 「한겨레신문」 기자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