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먼즈 ‘커먼즈(commons)’라는 단어가 최근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커먼즈는 공유지, 공유재, 공유 자원 등으로 조금씩 다르게 해석되는데, 데이비드 볼리어1의 『공유인으로 사고하라』를 보면, 커먼즈를 공동의 가치와 정체성을 보존하는 자원을 장기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사회적 시스템, 공동체가 시장이나 국가에 의존하지 않거나 최소로 의존하며 관리하는 자기 조직적 시스템으로 정의한다. 또, 우리가 물려받거나 함께 생산하여 더 발전시키거나 줄어들지 않은 상태로 자손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부, 곧 자연의 선물, 시민 인프라, 문화 작품, 전통, 지식 등으로 정의한다.
공유재의 비극? ‘공유재의 비극’이란 개념은 ‘공유’나 ‘공동체’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아킬레스의 건’ 같은 사례로 즐겨 언급된다. 특히 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개개인의 이기적 본성의 가정 위에서 사유재산과 시장에 의한 조정이 무슨 자연법칙이라도 되는 양 생각한다. 그러나 그 개념은 1968년 학술지 『사이언스』에 실렸던 개릿 하딘의 논문 <공유재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1968)에서 연유한 것으로, 하딘은 열렬한 생태학자로서 공유재인 생태계를 지키고 되살리기 위해서는 중앙집권적 정부의 강력한 명령과 통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공유물의 자유로운 이용은 모두에게 파멸을 안겨”주는데, “혼잡한 세상에서 파멸을 피하려면 사람들은 각자의 마음 밖에 있는 강압적 힘, 다시 말해 토마스 홉스의 표현을 빌자면 ‘리바이어던Leviathan’에 호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가 사적인 재산에 대한 사용권마저 제한했던 박정희 정권의 그린벨트 정책을 알았다면 필경 강하게 지지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