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선 주상복합 서울의 한 대형 주상복합에 사는 한 지인이 자신은 우주선 속에서 살고 있는 듯하다고 얘기한다. 쇼핑부터 카페, 식당을 다니며 건물 안에서 지내다 보면 일주일은 너끈히 땅에 ‘착륙’하지 않고 생활한다는 그의 거주환경이 일반적이지는 않을 듯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가 거리를 걷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고 해서 주상복합 우주선에서 사는 그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그 거리가 삶의 활력과 우연한 만남의 현장이 되지 않는 이상, 우리도 살균된 우주선 속에서 지내는 것과 다름없다. 거리나 외부공간이 마크 오제가 공항 같은 공간을 정의하기 위해 명명한 ‘비장소(non-place)’처럼 이동 통로로만 사용된다면, 역사적인 의미도 상징도 없이 소비되는 공간으로 축소되어 버린다. 이런 공간에는 소위 공공의 경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공공공간은 공항 같은 준공유공간이 가지고 있는 보호막과 청결함이 결여된 더 추한 공간으로 전락하고 만다. 우리는 더 이상 도시의 산책자로서 사는 것이 쉽지 않다.
공공공간에서 나 자신의 신체는 어떻게 모습을 드러내는가. 그리고 그 신체는 어떻게 신자유주의와 가부장제 자본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주체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인가. 누구의 소유물도 아닌 이 땅은 그 신체의 면적이나 생활 공간에 의해 점거될 수밖에 없다. 홈리스는 도로에서 지낸다. 살아있는 신체를 존재시키기 위해 그들은 그곳을 점하고 있다. 생존 앞에서 공과 사를 나누는 것은 사실상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홈리스는 ‘공공장소 점거’라는 이유로 생존에서도 배제 대상이 된다. 배제나 비판이 없는, 담보된 개별 존재의 생활공간은 권위를 띠고 있어서, 사람들은 그곳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쉬는가 하는 것에 스스로를 묶는 힘도 있다고 기대한다. 사적 영역으로 여겨지는 공간도 문화나 테크놀로지 같은 정치권력에 의해 구성되고, 다양한 생활을 하면서 내면화, 신체화되어, 동일화되는 것이다.
초기 개념미술과 미디어아트의 개척자인 안토니 문타다스는 번역, 공공공간, 도시에 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토탈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번 전시에서 그는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의 건축가, 리서처, 큐레이터들과 함께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각 도시의 유사점과 차이점, 충돌의 지점을 이미지와 코드를 통해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