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의식 이다미(플로라앤파우나) 세대 감각과 관련해서는 나이가 달라도 디자인툴이나 디자인 방식, 작업을 다루는 관점이 비슷하면 동시대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다. 출생연도 기준으로 윗세대와 느끼는 차이점은 윤리의식이다. 자신이 설계공모에서 어떤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말하는 윗세대를 본 적이 있는데,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것도 슬프지만 공개적으로 발언할 수 있다니 끔찍하고 의아하다. 여전히 인맥과 같은 영향이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특혜와 로비가 자랑은 아닌 시대 아닌가. 또 우리 세대는 어떤 건축가의 제자도 아니고 어떤 건축가의 정신도 이어받지 않는 것 같다. 어떤 건축적 맥을 이어가겠다는 태도보다는, 했을 때 내가 행복할 만한 작업을 하려는 느낌이다.
돌돌돌 얼마 전 트위터에서 떠내려오는 이미지들 사이로 성당 앞에 걸린 “모든 돌은 천국에 갑니다”라는 문장을 보았다. 모든 돌이 천국에 간다니 천국이 있기는 한 지 내가 천국에서 기다릴 수 있을지 돌에게도 영혼이 있는지 죽음도 있는지 모든 돌이 착한지 신은 이름 없는 돌을 무엇이라 부를지 천국에도 중력이 여전해서 돌이 언제나처럼 가장 아래에 자리 잡을 것인지 신중히 따져봐야 할 문제들이 산적하지만 여기는 건축신문이니 세부적인 논의는 잠시 미뤄 놓겠다. 나는 이 문장이 마음에 들었다. 모든 돌,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것들에 나름의 생기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 그것들이 주고받는 생기 사이로 공명하고 싶다는 소망, 이 모두의 영원한 안녕을 바라는 불가능한 사랑의 마음, 그리고 세상에서 비인간적인 건 인간밖에 없다는 인간화 된 자연에의 각성 말이다.
ATELIER KHJ는 이제 막 5년을 넘겼다. 아직 호기심이 많고 여러모로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우당탕거리는 과정 속에 크고 작은 일들을 진행했다. 일의 규모와 상관없이 무엇이든 쉽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런 마음가짐이 좋은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독립부터 현재 _ 작가 아틀리에, 중규모 외국계 사무실, 대형 종합건축사무소를 두루 거치고 독립했다. 내 작업을 하겠다는 욕망보다는 자신의 호흡으로 삶을 꾸려가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진지함 30% 함량의 낀 세대 강승현(인로코) ‘앞세대’가 언제인지 누구인지 정의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대상을 좁혀 보면 일단 나의 선생님 세대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분들은 한국성이나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고, 우리나라 건축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짐이 있었을 것 같다. 그래서 건축가로서의 품위와 위상, 권위 등을 중시했고, 그게 태도에서도 드러났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런 한편, 건축을 지나치게 비즈니스로만 여긴 경우도 많았다. 일이 차고 넘쳤다던 1980~90년대에 그런 이들이 절대다수였기에 적절한 설계비 요율, 대가 기준을 만들 기회를 놓쳤다고 본다. 결국 건축가가 이 사회에서 받는 낮은 대우, 설계비 덤핑 같은 수십 년 묵은 문제는 사실 지나간 시기의 특별한 상황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각자 필요와 판단에 의한 선택이었겠지만 후배로서는 아쉬움이 크다.
과연 세대를 나눌 수 있을까? 김건호(설계회사) 귀국한 뒤 우연히 한국 건축가 1세대, 2세대와 관련된 프로젝트에 많이 참여했다. 그때 관심있게 봤던 자료나 작업 내용을 떠올리면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건축가의 처지가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또 최근에 1950~60년대 건축가, 1960~70년대 건축가가 재조명되며 그 분들이 했던 이야기나 지은 건물들을 접하게 됐는데, 들여다보면 주어진 제약과 상황 안에서 시대적 요구와 개인의 창작 욕구, 이 두 가지 생각을 오가며 갈등하고 분투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동시대 선진국의 건축을 국내에 하루 빨리 이식해야 하는 와중에 건축가로서 하고 싶은 작업은 따로 있지만 국가에선 못하게 막았다.
첫 독립, OMR 조성학 대학 졸업하자마자 뭐든 해보자고 마음 먹고 우리 둘과 바이아키텍쳐의 이병엽 소장까지 함께 창업해 무작정 일을 하나 받았었다. 그런데 실무 경험이 없다 보니까 너무 막막했고, 결국에는 그 일이 잘 안 됐다. 6개월 정도 지나서야 건축사사무소에 들어가 일을 배워야겠구나, 깨달았다. 그때 팀 이름은 OMR이었다.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김세진 처음 취업해 일을 시작할 때는 생산자이자 소비자였던 것 같다. 일을 통해 회사에 기여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동시에 스스로 깨닫거나 배우는 것도 많았다. 설계라는 직능에 있어 기여와 배움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고, 생산과 소비가 순환되는 기간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혼자 처리할 수 있는 업무의 비중이 높아지고 배움보다는 기여가, 소비보다는 생산이 주를 이루었다.
건축가로서의 매력 김경도 대학교 3학년 때 설계스튜디오 선생님이 허서구 교수님이었다. 졸업할 즈음 교수님께서 “취직했니? 갈 데 없으면 그냥 우리 사무실로 와라” 말씀하셨고, 그렇게 첫 사무소에 들어갔다. 거기에서 3년 4개월 정도 일했는데, 함께 일했던 김재경 한양대학교 교수가 유학 준비를 하며 내게도 유학을 떠나라고 계속 권했고, 나도 마음을 굳힌 뒤 유학 준비를 해서 스위스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ETH)으로 갔다. 어학연수 1년을 포함해 3년 정도 공부하다가 여러 사정으로 졸업하지 않고 2011년에 귀국한 뒤 바로 사무소를 시작하게 되었다.
초대 건축가들과의 인터뷰 가운데 ‘현재 건축 교육’에 대해 이야기해준 여덟 팀의 말을 한데 모았다. 선배로서, 선생으로서 마주한 건축학과 학생들을 통해 한국 건축 교육을 진단한다. 건축학과의 5년제 커리큘럼이 보편화되면서 교육 환경은 나아졌지만 자율성은 떨어졌다. 실무자의 시각으로 학생들에게 필요한 건축 교육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야기를 만드는 것처럼 산보를 좋아한다. 걷는 것을 통해서 마을을 느낀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건축을 시작한다. 책상 위에 모형을 두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도시 전체를 한눈에 바라보는 시점이 아닌, 그 안에서 걸으며 마을을 알아가는 시점에서부터 건축을 생각한다.
건축가라는 직업 앞에 ‘젊은’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은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젊은건축가상의 시작이 10년 전, 『공간』의 젊은 건축가 연재가 8년 전, 젊은건축가포럼코리아의 첫 파티가 7년 전이다. 2010년 전까지만 해도 새로운 건축가를 만나는 것은 뉴페이스를 찾는 일이 중요 임무인 건축잡지조차도 1년에 한두 명을 만나면 다행일 정도로 매우 드문 일이었다. (당시 『공간』이 이듬해 연재를 이어가지 못한 이유도 취재 대상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해서였다.) 개인 건축가로 독립하는 시기도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지금보다 긴 실무 경험을 쌓고 나서야 독립을 생각할 수 있었고, 독립 후에도 5년 정도가 흘러서야 매체의 레이더망에 잡혔고, 매체가 기사화하기까지는 몇 개의 관문을 더 거쳐야 했다. 저마다 신중을 기하다 보니 수도 적고 시기도 더뎠다. 신인 건축가의 수가 눈에 띄게 늘기 시작한 때는 대형 설계회사의 경영난으로 인해 건축가 엑소더스가 일어났던 5–6년 전부터였다. (해외에서도 1년 정도 앞서 대형 설계회사들의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있었다.) 대형 회사의 경영난이 촉매 작용을 했지만, 전조와 징후는 이미 곳곳에서 간헐적으로 나타나고 있었고, 충분한 조건들이 조용히 쌓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