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잘 알고 있듯이 걷기 좋은 도시는 기능적인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게 하고,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만나게 한다. 스스로 루트를 짤 수 없는 옆길 없는 길은 그래서 재미없다. 잘 가꾼 길이라고 해도 일직선의 길은 한두 번 걷고 나면 ‘이제 됐다’는 생각에 그 길로 걷기를 멈춘다. 아무리 유명 건축가와 조경가 그리고 예술가가 참여했다고 해도, 엄청난 재원이 투입되었다고 해도, 그 길에선 조미료의 냄새가 난다. 목적지를 향한 길은 풍미는 약하고 시각만 자극한다.
도시의 새로운 활용 옛날 농촌 마을에서는 일상에서의 거의 모든 이동이 걷기로 이루어졌다. 생활의 공간적 범위가 제한되어 있었고 생활의 리듬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서두르며 살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대도시에서 살아가려면 걷기보다는 자동차나 지하철 등의 운송수단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동작인 걷기가 줄어들고 운전대 앞에 앉아있거나 지하철에 서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보통사람의 일상은,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자동차에 올라앉아 직장으로 향해서 주차장에 차를 놓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에 도착해 책상 앞에 앉아 일하다가 점심시간이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다시 사무실에 올라가 일하다가 퇴근 시간이 되면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자동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서 주차장에 차를 놓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기 아파트로 들어가는 순서로 구성된다. 출퇴근 시간을 포함해 하루 평균 두 시간은 자동차 안에서 보낸다. 그런 생활을 하다 보면 일상의 생활에서 대지를 밟고 걷는 시간은 30분도 채 안 될 것이다.
도시를 만드는 사람 간 상호작용의 근본 요건 도시에서 걷기에 대한 논의가 ‘지금, 여기’의 상황에 현재성과 즉자성을 갖기 위해서는 서울의 ‘걷고 싶은 거리’ 사업이야말로 유용한 텍스트다. 이는 도시에서의 걷기에 대한 의미의 자각 내지는 반성, 그리고 새로운 21세기적인 인식뿐만 아니라 그 인식의 한계를 동시에 포함하기 때문이다.
러닝머신의 도시성 나는 한동안 피트니스센터를 다니며 트레드밀에서 걷고 달리곤 했다. 시간과 속도를 정해서 일정한 운동량을 확보해준다는 점이 합리적으로 느껴졌고, 날씨와 상관없이 할 수 있는 운동 방식에도 꽤 익숙해졌다. 트레드밀에서 걸을 때는 TV 스크린을 응시하는 것이 지루함을 극복하는 방법이었다. 때로는 산을 오르내리는 것과 같이 경사를 조정해 프로그래밍하기도 했다. 러닝머신의 경험은 마치 우리 도시의 현실을 압축한 것과 같다. 정해진 시간과 속도가 삶의 부분을 규정하고, 일상의 순간은 미디어가 지배하며, 가상이 실재의 경험을 대치한다.
걸어본다 걸어보는 일과 ‘걷고’ 또 ‘보는’ 일. ‘난다’라는 이름의 작디작은 출판사를 꾸려나가는 내게 어느 날 이 두 말이 우연한 산책 중에 몸에 들렸다. 그래 들렸다, 라는 표현을 쓰는 데는 시가 내게 실리듯 아무런 통증 없이 몸을 꿰뚫고 들어앉은 어떤 세상에서 내가 나도 모르게 놀고 있었다는 뜻도 된다. 어쨌거나 반질반질한 파주의 도토리처럼 말간 얼굴로 길 위에 떨어져 있던 말, 내가 안 주우면 누군가의 발에 밟혀 짓이겨져 버리고 말 것 같은 말, 그래서 허리 굽혀 줍고는 외투 주머니에 넣은 채 만지작거렸던 말, 그러나 손에 넣고 손에 길들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너무나 사소해서 그만큼 나 혼자만의 것 같아서 당신들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았던 말, 그게 뭐 별거냐 하겠지만 눈앞에 그림으로 그려내기까지 몇 날 며칠 하얗게 밤을 지새우게 했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