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라는 직업 전숙희 중간점검 자리를 준비하면서 ‘건축가’라는 말을 곱씹어봤다. 건축학과에 왔다면 모름지기 건축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절에 학교를 다녔다. 그 시절 제일 좋아했던 건축가가 루이스 칸이다. 루이스 칸과 정서적 공감대가 이루어졌던 계기가 있었다. 대학 1학년 때 학과지를 만들면서 편집장이었던 친구의 집에 3일 동안 감금되다시피해서 루이스 칸 평전을 독파한 내용을 글로 실었다. 그러면서 그의 건축과 철학에 매료되었고, 지금까지도 그는 내게 영감을 준다. 일하다가 길을 잃어버릴 때면 그의 말을 떠올리곤 했다. 『침묵과 빛』이나 『루이스 칸 – 학생과의 대화』에서 그가 하는 말을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나고 보니 시적으로 압축적인 표현으로 자기 생각을 말했다는 것을 알았다. “What do you want to be, brick?”이라는 유명한 말도 그 책에 나온다.
‘중간점검’은 2010년 전후 무렵 젊은 건축가로 호명되어 지금까지 꾸준히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중진 건축가의 심층 인터뷰 시리즈입니다. 건축가로서의 깊이와 여유가 묻어나는 한편 여전히 치열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그때와 지금, 다가올 미래를 묻습니다. 그리고 건축가 개인의 관심사를 확장하여 건축계에 산재한 이슈를 함께 이야기합니다.
우리 건축가에 대한 구술채록은 일찍이 2003년부터 국립문화예술자료관에서 진행한 박춘명, 송민구, 엄덕문, 이광노, 장기인의 구술채록이 있었고, 2010년부터는 목천건축아카이브의 건축가 구술사업이 진행되어 오고 있다. 김정식, 안영배, 윤승중, 4.3그룹, 원정수+지순, 김태수 구술집에 이어 일곱 번째로 김종성 구술집이 발간되었고, 이후 서상우, 유걸 구술집도 출간되었다. 4.3그룹을 제외한다면 구술의 목표는 우리의 전후 현대사에서 현대건축의 기반을 형성한 1세대 건축가들, 즉 1930년대에 태어나 1950년대에 대학을 졸업하고 우리나라의 고도 경제 성장기에 활동한 건축인들의 다양한 증언을 기록으로 남기는 데에 있다. 80년대 중반 이후에는 건축잡지가 확산되고 각종 출간을 통해 건축관과 설계과정의 기록을 남기는 환경이 조성되었지만, 1세대에게는 상대적으로 그러한 기회가 적었다는 측면에서 구술채록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건축 행위의 목표가 지식 생산이라면 건축적 지식이 가장 순수하게 전달될 수 있는 통로는 아이디어가 건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전시 속의 건축적 상황이 아닐까? 1980년 처음 개최된 베니스건축비엔날레에서 <스트라다 노비시마(Strada Novissima)>라는 거대한 설치 작업에 포함된 건축가 중 한 명인 레온 크리어는 “내가 건물을 짓지 않는 이유는 내가 건축가이기 때문” 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자신이 건물을 짓지 않는 것이 저항적이고 대안적인 선택임을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건축 이론을 책과 전시라는 대안적 매체를 통해 실현하는 것을 선호했다. 답사를 통해 얻는 지식과 전시를 통해 얻는 지식은 동일한 영역 속에 존재하며 표현 수단이 다를 뿐이라고 가정한다면, 건축가의 의도가 최대한 간섭받지 않고 존중되며 외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전시 공간 속에서 건축가의 작업은 더 온전히 구현될 수 있다. 물론 건물의 배경이 되는 지형과 주변 환경의 맥락 속에 품길 때 느낄 수 있는 신체적 또는 현상적 경험은 있다. 그러나 답사를 통해 기억되는 경험이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감상적인 반면, 책이나 그림, 설치 등 전시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지식은 한결 집중된 주제 의식과 더불어 시대와 사회적 관념 속에서 편집된 명료하고 생산적인 지식일 수 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이 최근 건축 전시의 수와 규모가 전 세계적으로 늘고 있으며, 이를 통한 건축의 지적 세력이 무서운 속도로 확장되고 있는 것 같다. 건물보다 전시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지면서 누가 다음, 어느 비엔날레의 큐레이터로 선정될 것인가에 대한 루머와 추측들이 건축계의 뉴스거리가 된 것이 사실이다.
고귀한 작품으로서의 건축 ‘건축가의 일’이라면 이 나라의 건축가라는 이름의 직업을 가진 수많은 이들은 건물을 설계해 그 설계대로 잘 지어지게 하고, 그것이 시작이고 마지막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일까? 문제는 너무나 많은 이 직업의 전문가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 익숙하다는 데 있다. 그러니 그렇지 않다고, 달리 생각해 보자고 강조한들 또 다른 공허한 메아리로 남을 것이 분명한데, 이런 주장을 할 필요가 있을까?
명함을 디자인하는 건축가 건축가라 자처하며 여러 해를 보냈지만, 아직 의뢰가 많지 않아 시간이 남을 때가 있다. 이런저런 것들을 궁리하고 디자인하는 것을 좋아해서 가구나 명함과 같은, 건축설계가 아닌 다른 분야의 디자인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명함 디자인의 경우는 ‘개인 명함 캠페인’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인 정체성이 아닌 스스로가 부여한 개인의 정체성을 건축가와 의뢰인이 함께 탐색한다는 명분을 겸하고 있다. 영문명이나 직장명 등을 표기하는 관습 하나하나를 의심하면서 반드시 드러내고 싶은 것들만을 골라낸다든지, 여백의 개념에 구애받지 않고 지면 전체를 활용하여 정보를 배열한다든지, 명함의 앞 뒷면을 두 개의 분리된 평면이 아닌 서로 간섭하고 관통하는 두 공간의 경계로 해석한다든지, 글자가 의미가 아닌 형상으로 드러나는 순간에 주목한다는 것 등이 내가 세운 나름의 명함 디자인 방법론이다. 이런 과정에서 건축가로서의 기질이나 스타일이 은연중에 배어 나오길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늘 의식하는 것은, ‘그래픽 디자이너가 아닌 건축가로서 명함을 디자인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라는 질문이다. 이런 물음에 기대하는 답변이 나올 때도 가끔은 있다. “이유를 콕 짚어 말하기 힘들지만, 왠지 건축가가 디자인한 명함답다”라는 식의 반응으로 말이다.
우연의 안내 건축은 나에게 있어 세상을 보는 눈이자 세상을 느끼는 몸이다. 그 나라의 언어를 조금씩 배워가며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람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것처럼, 건축을 통해 조금씩 세상을 알아간다. 건물에 개구부가 뚫리는 방식을 보고 세계관의 변화를 감지하고, 부엌과 거실의 가구 배치를 통해 사회의 가치관을 읽어내고, 예측하지 못한 감동에서 세상의 원리를 느끼기도 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공간을 그려보기도 한다. 건축은 내게 철학이자 종교이며, 곧 삶의 방식이다.
당신 건축가 맞나? 10년도 더 전에 쿠알라룸푸르에서 일하던 때였다. 늘 하던 대로 외주업체들과의 공식미팅 자리였다. 나는 기계, 전기, 구조, 소방업체들에게 건축에서 원하는 사항들을 주욱 얘기했고, 그들의 의견을 듣고, 문제점들을 찾아 해결책을 궁리했다. 나는 내 아이디어를 얘기했고,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전문적인 얘기들은 점점 더 깊이를 더해갔다. 그러던 중에 한 업체의 대표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눈짓을 줬다. 그러자 그가 나에게 대뜸 하는 말이, “당신, 건축가 맞나?”였다. 나는 그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도 그걸 알았다. “당신은 설비의 문제에 있어 당신의 디자인과 관계된 얘기를 하면 된다. 그렇게 해서 생기는 문제는 우리가 해결하는 것이다”는 것이 그의 얘기의 골자였다. 그리고는 이어지는 얘기가, “당신은 건축가가 아니라 마치 설비 전문가나 구조 전문가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말에 좀 충격을 받았다. 한국에서 건축교육을 받을 때 나는 당연히 건축가는 그 모든 것에 정통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공부를 하고 경험을 쌓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한국에서는 꽤 유능한 건축가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마치 내가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결격을 가진 건축가처럼 얘기하는 것이었다.
건축 시장은 갈수록 위축되고 전망도 어둡다. 획일적인 규제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는 건축·도시 관련 제도의 완고함도 여전하다. 사회적 문제에 대응하는 건축가들의 건축적 상상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다. 건축가 온영태는 계층 간, 도시 간의 양극화를 줄이고, 삶과 사회적 요구를 담아낼 새로운 정주공간을 만드는 것 역시 건축가의 상상력이라고 말한다.
건축가와 디자이너는 주어진 조건이나 문제해결 모색이 곧 프로젝트의 시작이며, 논리적이고 감각적인 사유는 디자인의 기반이 된다. 디자인의 의미와 경계가 모호해지는 가운데 동시대 디자인의 정의를 생각해보기 위해 디자이너 김황과 건축가 안지용을 페이스북의 비공개그룹에 초대했다. 본질적 대화가 오갈수록, 디자인과 건축이 갖는 미학적·사회적 과제에 대한 이들의 고민은 점점 더 그 깊이를 더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