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어디엔가 가닿을 무구한 돌림노래를
강림
분량4,570자 / 9분
발행일2026년 10월 26일
유형서문
잡담회를 맺어준 것은 예비군 훈련이었다. 2024년 여름의 어느 날, 나와 곰은 예비군 훈련장에서 마주쳤다. 예비군 훈련은 늘 끔찍하게 지루했기 때문에, 나는 훈련 때마다 군복 주머니에 들어갈 정도 크기의 책을 챙겼다. 곰 역시 예비군 훈련을 끔찍하게 지루해 하던 참이었기에, 내가 챙겨 갔던 책을 빌려 갔다. 『의심이 힘이다』였다. 곰은 ‘건축책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지만, 이 책은 술술 읽힌다’며 즐거워했다. 양서(良書)의 힘, 또는 끔찍하게 지루한 예비군의 힘. 훈련이 끝난 후 곰은 나를 집까지 태워다 주었는데, 차 안에서 우리는 건축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독서모임에 관해 이야기했다. 사람을 한번 모아 보자. (어차피 그 나물에 그 밥이겠지만.) 생각해보면 약속의 말이었다. 어떤 사건을 일으키게 될 약속의 말. 아직 도래하지는 않은, 도래할 사건에 대한 말. 그 중요한 말의 앞뒤로, 우리는 올해의 단풍 시작 날짜나 안전 운전 수칙에 관한 말들을 두런두런 덧붙였었다. 차에서 내려 곰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나서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나는 몇 명과 몇 권을 떠올렸다.
첫 책은 『건축은 무엇을 했는가: 발전국가 시기 한국 현대 건축』. 『건축 없는 국가』와 『대한민국에 건축은 없다』 사이에 끼여 시니컬한 체했던 내게 무엇인가를 약속하는 듯했던 책. 지금은 사라진 동교동의 어느 대형 카페. 강림의 친구이고 책 읽기에 관심이 있다는 공통점으로 모였던, 그러나 서로는 전혀 친하지 않았기에 어색했던 표정들. 아직은 별다른 직업도 직함도 없는, 건축학도와 건축사보(혹은 대학원생) 사이에 끼인, 모호한 정체성들. 2층의 창가 자리였다. 나무 창틀과 아연 배관.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 요약이 옳은지도 확신하지 못한 채, 책에 대한 요약을 허둥지둥 전하고, 서로는 나름대로의 감상을 말하려 애쓴다. 그 자리에 잡담회의 정수(?)가 이미 모두 있었다. 있으나 마나 한 모더레이터. 확신 없는 화자. 툭툭 끊어지는 대화. 가끔 내려앉는 긴 침묵. 번갯불처럼 모임을 관통하는 논쟁. 어쨌든 우리는 이 책에 관해 잘 모른다. 아무튼 우리는 이 책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 모르는데 이야기해야 하고, 모르면서 하는 이야기를 경청해야 하는, 이 기묘한 모임. 끝나갈 때 즈음 다음으로 읽어야 할 책을 힘없이 공지하면서, 나는 ‘다음’이 과연 있을지 내심 궁금했다.
‘다음’이 궁금했던 모임은 허둥지둥 여차저차 흐지부지 3년이 넘게 이어졌고, 어느새 잡담회가 읽은 책의 목록도 그런대로 남부끄럽지 않은 길이를 가지게 되었다. 나는 잡담회에 관해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며 서서히 ‘우리’라는 주어를 채택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2년이나 흐른 뒤인 그때 즈음, 독서에 대한, 그리고 모임에 대한, 궁극적으로는 독서모임에 대한 어떤 회의감이, 피로감이 모임을 덮쳤(던 것 같)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읽어야 하는 책의 목록은 책을 읽을수록 길어졌고,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에 책에 걸었던 기대감은, 늘 철저한 무력함 및 무지함으로 변환되었다. 그러니까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이만큼 치욕스러운 경험이었다. 우리는 책의 어떤 쓸모를 깨달았다. 우리는 얼어붙은 바다를 도끼로 깨는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우리가 바로 그 얼어붙은 바다였던 것이다! 그 치욕을 서로에게 가감 없이 드러내야 하다니. 책에 의해 내가 쪼개진다는 비극. 책에 의해 내가 부서진다는 절망. 누가 쪼개짐을, 부서짐을, 아픈 것을 좋아할까. 우리는 사람이었으므로 아프기 싫었고, 그럴수록 책에 관한 대화는 다소간의 공회전을 이어 갔다. 나는 ‘다음’이 과연 있을지, 내심 다시 궁금했다.
『건축신문』의 연락을 받게 된 것, 그리고 잡담회에 관한 글을 써보게 된 것은 거의 나란히 일어난 사건이었다. 협업을 제안받았을 때, 우리는 어리둥절했다. (지금도 어리둥절하다.) 그리고 나는 모 공모 사업에 잡담회에 관한 어떤 기획을 통과시키기 위해 글을 써야 했다. 잡담회를 왜 하는지 이전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기에, 그걸 생각해보지 않았던 나 자신과, 아무 생각 없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을 관습적으로 이어 나가고 있는 나 자신의 아무 생각 없음에 머리를 싸맸다. 연역법에 연달아 실패한 나는 제한적인 귀납법을 통해,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모임을 요약함으로써 잡담회를 정의해보고자 했고, 몇 차례의 소요 끝에 간신히 몇 줄을 적었다. “잡담회는 건축책을 성의 있게 읽습니다.” 방점은 ‘성의 있게’였다. 함께 이야기하려면 얼마간의 성의가 있어야 하니까. 그리고 “잡담회는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방점은 ‘기록’이었다. 쓰면서 생각해 보니 우리는 함께 이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함께 기록했다. 그리고 예외 없이, 우리가 읽었던 모든 글들은 늘 과거의 누군가가 남긴 기록이었다. 이토록 당연한 것에 대한 불현듯한, 낯선, 때 늦은 깨달음. (그러고 보면 협업 제안 메일에도 기록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쓴다. “저희는 텍스트를 읽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나름 자부심을 담아, 이어 쓴다. “텍스트를 생산합니다.” 우리는 보기 좋게 공모 사업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약속의 말 하나를 얻었다.
그리고 어느 날의 정림건축문화재단, 보는 것은 익숙하지만 둘러 앉는 것은 어색한 원형 테이블. 『건축신문』을 인쇄해 온 구성원들. 잡담회는 익숙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어색했던 표정들. 모호한 정체성들. 있으나 마나 한 모더레이터. 확신 없는 화자. 툭툭 끊어지는 대화. 가끔 내려앉는 긴 침묵. 번갯불처럼 모임을 관통하는 논쟁. 모르는데 이야기해야 하고, 모르면서 하는 이야기를 경청해야 하는, 이 기묘한 모임. 회의감, 피로함. 다소간의 공회전. 우리는 비로소, 말하는 데에는, 적어도 공적으로 말하는 데에는, 우리의 이야기를 들을, 아직 알지 못하는 어떤 이를 향해 이야기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용기. 우리에게 있는, 모두에게 있는, 그러나 있어도 거의 없는. 가능성과 불가능성.
우리는 스스로의 경험을 특권화하고 싶지도 않고(특권화 할 건덕지도 없거니와), 용기라는 미명 아래에 숨어 우리의 비겁함을 합리화하고 싶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서의 힘인지 끔찍하게 지루한 예비군의 힘인지, 우리에게는 허둥지둥 여차저차 흐지부지, 끝없이 쪼개지고 부서질 수 있을 만큼의, 적은 양의 용기가 있었다. 우리에게 있다면 모두에게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의 제한적인 귀납법에 불과하기에. 귀납법에 불과하기에 우리는 과거형으로 말해야 한다. 우리에게 있었다. 모두에게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여러분에게도. 『건축신문』은 함께 이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록해왔다. 『건축신문』을 비롯하여 우리가 읽었던 모든 글들은, 예외 없이 늘 과거의 기록이었다. 우리는 어쩌면 누군가가 읽을 과거의 기록이 되기 위하여, 함께 나눈 부족한 이야기들을 기록한다. 이 무구한 돌림노래. 누군가가 기록했던 것을 “성의 있게 읽”기. 그리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 것을 기록”하기. 그리고 누군가는 그 기록을 읽고, 그리고 누군가들은 함께 모여 그 기록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리고 누군가는 그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리고 누군가는 읽고, 그리고 누군가는,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건축신문』 속 글들을 골라 읽고 이야기를 나누어 달라는 요청에 따라 잡담회는 키워드 ‘프리츠커상’, 23호 『건축, 전시, 큐레이팅』, 40호 『등장하는 건축가들 6』을 읽었다. 이 셋을 선택한 이유는 각각 다음과 같다.
‘프리츠커상’은 한국에서 매년 어느 순간 빠르게 달아올랐다가 단숨에 증발해 사라지는, 휘발성 강한 담론을 대표하는 듯했다. 모두 내심 기대하다가 내심 실망하고 내심 괘씸해 하기에 더 빠르게 휘발되는 것으로 보였다. 동시대를 향유하는 한국 건축계에 매년 끼얹어지는 괘씸한 타자! 그러나 프리츠커상은, 바로 그렇기에 우리의 유용한 거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휘발되는 말들로 증류할 수 있는 말들이 있는지 살펴 보기로 했다.
『건축, 전시, 큐레이팅』은 『건축신문』이 발행한 여러 책 가운데에서도, 시간의 커다란 파고를 가장 잘 견디어 온 책으로 여겨졌다. 모든 글들이 웹에 공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중고가를 형성하고 있었고, 필진 목록과 각 필진이 쓴 글 모두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심지어 글이 쓰일 때보다 오늘날에 더욱 유효한 것으로 보였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들이 건축 전시의 매력을, 그리고 ‘건축을 전시하는 것’의 불가능성에서 오히려 비롯되는 가능성을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등장하는 건축가들 6』은 일련의 ‘등장하는 건축가들’ 기획 중에서도 가장 파격적이었고, 또 논쟁적이었다. 선정된 건축가들은 건축의 외연을 표상하는 것 같기도, 건축의 정수를 표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들의 글(혹은 발표)의 형식과 내용도 흥미진진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우리와 아주 가까운 세대로,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문제 의식 위에서 우리가 아직 갖지 못한 각자의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별자리 삼아 우리의 항로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가 택한 이 세 글이 시의에 적절한 것이기를 바랐다. 이 선택을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시의성과 적절함이 무엇인지 미소하게나마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란다.
강림 잡담회 모더레이터
어느 날 어디엔가 가닿을 무구한 돌림노래를
분량4,570자 / 9분
발행일2026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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