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시간이 있으니까
심미선
분량2,636자 / 5분
발행일2026년 9월 28일
유형서문
한국 사회에서는 보통 가정과 의무교육, 국가교육과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서야 비로소 각자의 삶을 설계하는 순간을 맞는다. 이 시점에는 내가 선택한 사람들과 ‘우리’를 만드는 경험도 시작하게 되는데, 많은 실수와 잘못을 거듭하며 관계의 기술을 배워나간다. 오랫동안 익혀온 가치관과 내가 속하려는 사회의 법칙이 충돌하거나 서로 흡수되면서, 그 사회에 빠르게 편입되기도 하고 아예 튕겨 나가기도 한다.
동시에 우리는 어딘가에 충분히 머무를 여유가 없이 자꾸만 떠밀리고 있다. 당장 내 손에 쥔 스마트폰을 매개로 축지법, 순간이동을 한다. 2초 안에 내 눈길을 사로잡지 못하는 것은 손짓 한 번에 치워버린다. 초 단위의 경험이 반복 축적되다 보면, 시간 감각뿐만 아니라 체류, 정주와 같이 공간과 연관된 관념도 바뀐다. 게다가 형편에 따라 좁히고 넓히고 옮기는 삶이 이어진다. 그럴수록 우리는 들고나는 것이 편해질 방법을 찾는다. 점점 미끄러워지고, 가벼워진다.
이런 역학과 현상 속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있는 대학생들과 함께 생각해보고 싶었다. 공간과 건축, 도시를 다루는 우리는 ‘딸깍’ 한 번에 찬란한 그림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한동안 한 곳에 서 있는, 무겁고 값비싼 무언가를 만들기도 한다. 그랬을 때, 우리가 우리다울 수 있는 장소를 만든다면 무엇을 고려해야 할까? 아니, 그 전에 나로부터 시작하는 무언가를 꿈꾸어야 하지 않을까. 이 막막한 질문이 이번 공모전의 씨앗이었다.
나로부터 시작해 우리를, 집을, 건축을, 도시를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건축 설계는 보통 콘텍스트 분석으로부터 시작한다. 주어진 대지와 법규, 환경과 맥락을 따져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출발점을 바꿔보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삶은 어떤 모습으로, 어떤 모양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그리고 너를 받아들여 우리가 되려면 나를 어떻게 깎아내야 할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나를 아는 데에도, 나를 깎는 데에도, 너를 받아들이는 데에도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번 공모전은 설계 이전의 기획과 그로부터 시작하는 설계, 건축가의 역할까지를 과제로 두었다. 임태병, 홍보라, 이해든, 최재필, 윤주선까지 서로 다른 현실과 이상, 실천의 위치에서 건축을 바라보는 다섯 심사위원을 모신 것 또한 결과적으로 주제의 반영이었다. 심사위원단은 가속과 소외, 서사와 공동체, 도시와 커먼즈, 혼자 사는 삶과 함께 사는 삶 등을 다룬 여러 책을 공유하며 서로의 생각을 연결해 나갔다.
이 주제는 우리가 배워온 방식을 거스르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관점의 사례와 이야기도 필요했다. 그렇게 사전 포럼을 준비하며, 자료 조사와 심사위원 추천 등을 거쳐 여섯 연사를 모시고 세 차례의 자리를 만들었다. 김하나, 황선우, 김다은의 이야기를 통해서는 새삼스럽지만, 삶의 모양이 다양할 수 있다는 것과 자신이 원하는 삶을 그때그때 선택하면서도, 그 선택을 쌓아가며 만들어가는 모습을 공유하고 싶었다. 그리고 도연정, 백진, 이장환의 강연으로부터는 우리가 건축이나 도시에 모여 살면서 쉬이 잊곤 하는 가치와 존재,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실은, 사전 포럼을 마치고 나서 번뇌에 빠졌다. 이 주제의 어려움, 난해함이 뒤늦게 와닿았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모양’이라는 말은 귀엽지만, 시간을 겪어내지 않고는 다루기 어려운 영역이며, 문학적, 영화적 상상으로도 구체화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탓이다. 한편으론 ‘나를 찾아야만 한다’고 강요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교육을 받아본 적 없는 이들에게 과한 주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떨칠 수 없었다.
이런 걱정과 초조함에도 불구하고 이번 공모전 수상작만의 뚜렷한 개성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건축 기획 측면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발굴한 것이다. 예년과 다른, 엉뚱하고 유쾌한 프레젠테이션도 눈에 띄었다. 설계로의 반영이나 끝맺음에 아쉬움이 없었다면 거짓이다. 그러나 이번 공모전에서 중요한 것은 완성된 설계보다, 무엇을 건축의 출발점으로 삼을 것인가를 발견한 과정이었다. 또한 재단은 이 질문을 ‘다름’이라는 또 다른 주제로 확장해 건축학교 새싹꿈(초등학생) 과정에서 ‘다름으로 건축하기’라는 제목으로 이어받았다. 어린이 건축가들에게도 당연히 어려운 주제이겠지만, 건축을 생각하는 다른 차원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돌고 돌아 길을 찾아가는 여정, 많은 이들의 시간을 쏟아부어 만드는 작업, 질서를 세우고 통합하여 결과를 내는 일의 가치는 갈수록 귀해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건축을 통해 배우는, 함께하는 지혜가 요구된다. 건축은 여러 사람이 시간을 들여 하나의 결과를 만들어가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를 감각하고 이룰 수 있는 능력은 단숨에 취할 수 없다. 생각해보면 건축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삶과 일상을 이루는 모든 일이 그렇다. 우리는 우리에게 기꺼이 시간을 들여야 한다. 시간만큼은 우리의 것이다.
건축신문 편집자 심미선
이어서 읽을 책들
- 김하나, 황선우,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 연계 토크 나와 우리의 연결고리
- 백진, 『정의와 도시』 – 연계 포럼 우리가 읽은 도시
- 김수영, 『필연적 혼자의 시대』
- 김희경, 『에이징 솔로』
- 사이토 고헤이, 『지속불가능 자본주의』
- 이계수, 『반란의 도시, 베를린』
- 장강명, 『먼저 온 미래』
- 하르트무트 로자, 『소외와 가속』
- 한디디, 『커먼즈란 무엇인가』
- 한병철, 『리추얼의 종말』
- 한병철, 『서사의 위기』
우리에겐 시간이 있으니까
분량2,636자 / 5분
발행일2026년 9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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