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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소장의 고군분투기

이선민

1

“이왕 고생할 거면 젊어서!”

갑자기 제주로 이주하여 어쩌다 소장이 된 순간부터 마음에 새긴 소신이다. 지금도 이 마음으로 맨땅에 헤딩을 계속하고 있다. 개소 초기부터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 있다. 지금 이 시기에만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사전은 젊음을 ‘나이가 한창때에 있다’라고 정의하는데, 이 말 속에는 그 시절에 겪어야 하는 고생도 함께 들어 있는 것 같다. 젊음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면, 젊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어려움도 많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소신과 닮은 옛 어르신들의 말을 한번 다시 외친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2

얼마 전, 막 공사가 끝난 현장에서 건축주를 만났다. “마음에 드세요?”하고 묻는 내게 건축주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마음에 들어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우리가 계획안을 주고받을 당시의 대화를 상기했다. “제가 초반에 안을 보여드리면서 ‘이만큼을 다 하려면 예산이 많이 올라갈 것 같으니 선택해 달라’고 했던 말 기억하세요? 그때 저한테 해 주신 말씀으로 온 시간을 버텼어요”라고. 그러자 건축주가 “제가 뭐라고 했죠?” 물었고, 이어진 내 대답에 둘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소장님 안대로 다 하고 싶어요. 제가 돈 많이 벌어올게요.”

이 한마디가 그 프로젝트의 지난한 여정을 버티게 했다. 프로젝트마다 누군가 내게 해준 말 한마디를 마음속에 저장해두고 힘을 낸다. 건축가인 나를 포함해, 일을 맡기는 건축주(때로는 발주처), 일을 함께 풀어나가는 협력사, 그것을 행정적으로 승인해 주는 주무관, 그리고 그렇게 거쳐온 일을 실질적으로 구현해 내는 시공팀까지가 모두 한 팀이라고 생각한다. 이 프로젝트가 어떻게든 되게끔 하려는 멋진 한 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계약서상에는 갑·을 관계일지라도, 동등한 위치에서 노력하고 서로의 전문 분야를 존중하며 일한다. “잘 되게 해보자”는 모두의 마음이 하나의 건축을 만든다. 그렇기에 결국 사람이 중요하고, 태도가 중요하다.

의뢰인과 사전 미팅을 할 때 내가 보는 것은 단 하나다. ‘우리가 같은 곳을 보는가.’ 어디를 보고 가느냐에 따라 그 길은 직선일 수도, 구불구불할 수도, 진흙탕일 수도 있다.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는 선택의 문제고, 그 선택에는 그 사람이 우선하는 가치와 태도가 담겨있다. 건축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그 선택에 담긴 태도가 서로 맞을 때, 우리의 가치는 어긋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때 건축은 어느 하나의 요구만을 충족하는 결과가 아니라 공동의 태도를 담는 공간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방향일 때, 설계라는 과정을 지나면서도 스스로를 소모시키지 않고 오래 함께할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한 팀이 된다는 사실을 사무소를 개소한 이후 더욱 선명하게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미팅 때, 함께하고자 하는 건축의 방향과 태도가 서로 너무 다른 프로젝트는 거절한다. 이런 나를 두고 누군가는 배가 덜 고프네, 배부른 소리 하네 할 수 있다. (실제로도 들어봤다.) 그렇지만 이런 방향성이 서로 잘 맞아야만, 그러잖아도 호흡이 길고 힘든 건축일이 덜 고되어진다는 것을 잘 안다. 또한 이것이 나 스스로가 더 좋고 옳은 방향을 선택하는 사람이 되려고 계속 노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야 내가 운영하는 사무소가 좋은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서로 좋음을 향해 나아갈 때, 우리는 더 나은 세계를 반드시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3

프로젝트마다 내 머릿속에 하나의 장면을 저장한다. 이는 앞서 이야기한 어떤 문장 하나를 마음속에 저장해두는 것과 같다. 하나의 장면은 어떤 개념이나 형태를 단번에 떠올리는 방식으로 만들어지기보다, 질문을 통해 서서히 형성된다. 건축은 한번 완성되면 주변 모두의 환경이 된다. 그렇기에 더욱 세심하게, 어떤 공간이면 좋을지를 고민하며 대지를 여러 차례 방문하고 그 과정에서 주변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어떤 건축물이면 좋을지 상상한다.

건축주와의 대화도 마찬가지다. 나는 주로 질문을 던지고, 건축주가 답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이어간다. 예를 들어 주택의 경우, 어떤 형태를 원하는지를 묻기보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먼저 묻는다. 어떤 시간대에 어떤 풍경을 마주하고 싶은지, 생활의 패턴과 동선은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통해 하나의 장면을 설정해 나간다. 공공건축물의 설계에서는 다수를 위한 질문을 많이 던지면서 장면의 실마리를 찾아 나간다. 유저 협의를 통해 현재의 불편함이나 개선되었으면 하는 지점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중심으로 공간을 구상한다. 보다 나은, 질 좋은 공간을 만드는 것이 공공건축의 핵심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프로그램에 따라 경험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구체적인 장면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것은 배치나 평면일 수도 있고, 구조의 한 부분일 수도, 입면의 한 요소이거나, 어느 순간의 단면적 경험이 되기도 한다.

선택의 기로 앞에 고심해 결정해야 할 때, 도무지 어려워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때, 머릿속에서 계속 이 장면을 떠올린다.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언제나처럼 거대한 파도들이 나를 거듭 덮쳐 올 것이다. 그럴 때마다 머릿속에 저장한 그 장면을 자꾸만 꺼내 본다. 끝까지 놓지 않아야만 구현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므로, 그러기 위해서 마지막까지 중심을 지키며 나아가야 하는 것은 건축가 나 자신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파도를 넘거나 타다 보면 내가 꼭 부여잡았던 그 장면이 내 앞에 1:1로 드러난다. (이것이 엄청난 중독이다!)

결과에 아쉬움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보다 보람이 컸으면, 그리고 스스로가 나 자신을 더 좋아할 수 있으면 좋겠다. 고생하고 고민한 흔적들이 내 눈앞에 나타났는데 내가 싫어진다면 그건 부끄러운 선택이었거나 부족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시간과 경험은 절대적인 것이어서 어떻게든 나에게 남는다. 그렇게 남은 내가, 나의 작업이 계속해서 내 맘에 들면 좋겠다.

갈림길에서 무엇을 선택했느냐가 그 사람의 가치관을 보여주듯, 건축에서도 어떤 것을 최종적으로 도면에 남기기로 했고 어떤 형태로 세울지 결정했는지를 통해 그 공간을 설계한 사람의 정체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찰나에 소비되는 공간보다는 방문했을 때 좋은 에너지가 절로 느껴지는 그런 공간을 설계하는 건축가가 되면 좋겠다.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분명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먼 훗날에 내가 누군가의 건축물을 보기 위해 답사를 하고 여행을 갔듯이 누군가가 나의 건축물을 보러 와준다면 너무 행복할 것 같다.

4

동그라미세모네모 건축사사무소(이하 동세네)는 내 이름 초성(ㅇㅅㅁ)에서 보이는 기본 도형으로 지은 이름이다. 건축을 이루는 기본 도형이 본질에 충실한 공간을 상징하듯, 나도 그런 공간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사무소 이름에 대한 설명을 웹사이트 한켠에 올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렇게 제주대학교 건축학과의 ‘건축형태구성’ 수업을 시작하게 됐다. 2학기마다 주 1회 수업을 나간지 3년 차. 내가 학생 때 제일 구석 자리에 앉는 학생이었고, 설계를 잘하진 못했지만 좋아해서 계속하다 보니 지금까지 온 것이라, 수업 갈 때마다 그런 아이들을 알아본다. 나는 그런 친구들이 건축을 업으로 삼길 바라며, ‘너도 할 수 있어!’하고 응원하는 마음으로 수업을 준비하고 내가 아는 것을 많이 나눠주려고 노력한다.

섬이라는 특성상 제주도 내 학생들은 육지 학생에 비해 여러 측면에서 기회가 적다. 요즘은 많은 정보를 인터넷으로 찾아볼 수 있지만, 건축은 실제로 찾아가 보는 경험이 중요하다. 이미지만 보고 전하는 것보다, 직접 겪은 공간감을 전하는 것은 분명 입력값이 다를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많이 가보라고 이야기해 주고 나도 휴가를 거의 건축 답사처럼 쓴다. 되도록 많은 건축물 가서 보고, 그 경험을 많은 학생들에게 공유해 주고 싶다. 어쩌면 강의와 수업도 ‘좋은 것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힘을 얻어 지속하는 것 같다.

“과정을 즐겨라.” 학생에게 자주 하는 말이고, 어쩌면 나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은 말 같기도 하다. 결과는 하나의 형태로 드러나는 것일 뿐, 사실 과정이 전부다. 설계는 분명 자주 지치고 힘들 수밖에 없는 일이므로 더더욱, 어떤 마음과 태도로 시간을 보내느냐가 중요하며 이것이 각자에게 고스란히 남는다. 그러므로 과정을 의미 있게 지나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수업 때 꼭 해주는 말 하나가 더 있다. 5학년까지 포기하지 말고, 계속하라고. 그렇게 성장한 여러분을 꼭 현업에서 동료로 만나고 싶다고. 이건 진심이다. 재능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뿐인 친구들이 건축을 계속하면 좋겠다. 무작정 재밌으니 계속해보라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업으로 삼았을 때, 한 사람으로서의 삶 또한 건강하고 즐겁기 위해서 우리 세대의 건축가들이 해야 할 숙제가 아직 많다는 것을 안다. 나부터 이들의 환경이 보다 나아지도록 노력하는 건축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계속해 주는 건축가이고 싶다.

5

건축을 잘하게 되기까지 지나야 하는 과정과 단계가 있다면 나는 아마 여태 초입 그 언저리일 것이다. 나이가 더 들어 이제는 더 이상 젊다는 타이틀이 붙지 않을 때쯤이면 설계를 잘하게 될까? 아직 잘 모르겠다. 건축은 호흡이 긴 반면 요즘은 모든 게 빠르게 변하고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점점 더 우리(건축가)의 경계를 흐릴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우리가 계속해서 건축가일 수 있게 하는 건 과연 무엇일까? 이것도 아직 모르겠다.

아마 내가 건축을 하는 여정이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되지 않을까. 거기까지 가는 모든 길마다 최선을 다할 것이다.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누군가의 한마디, 놓지 않아야 할 장면 하나를 꼭 쥔 채, 모든 과정을 즐겁고 의미 있게 지날 것이다. 단계를 거칠 때마다 건축을, 사람을 더 잘 헤아릴 줄 아는 눈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리고 먼 훗날 나라는 사람은 건축가를 어떻게 정의하는 사람이 되어 있을지 궁금하다. 그러니 계속해 봐야겠다.

6

첫 프로젝트 ‘제주에서 행복한 집’으로 2025년 제주건축문화대상 본상을 수상했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 모든 게 어려웠던 프로젝트였다. 연고가 없는 곳에서 첫 현장을 하는 것이 쉽지 않으리라 각오했음에도 예상보다 더 어렵게 했던 프로젝트여서,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기쁨보다 위로가 컸다. 온갖 좋지 않은 말과 갈등 속에서도 끝까지 지켜낸 현장이었기에, 그동안의 고생 속에서 지켜내고자 했던 것들을 외부에서도 의미 있게 봐주셨다는 확인이었다. 여러 축하 말씀 중에 이 말이 기억에 남는다. “스스로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있는 것 같아 기쁩니다. 앞으로의 행보도 응원합니다.” 나를 알아봐 준 사람들이 준 기회가 지금의 동세네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혼자서는 절대 하지 못했을 일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해서 내가 발견되면 좋겠다. “좋음을 향해 걷다 보면 같은 방향으로 가는 또 다른 사람을 반드시 만나게 된다”는 말처럼, 내가 가는 길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는 것 또한 이 길을 가다가 만나게 되는 좋은 사람들인 것 같다. 그렇기에 더, 어렵고 힘든 과정들 속에서도 내가 좋은 선택을 해야 계속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음을 잊지 않고 건축을 해 나가려 한다. 한 선배가 내게 해준 말로 끝맺음을 하려 한다. 씩씩하고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못 할 것도 없지!”를 외치며, 이 지난하고도 초 중독적인 건축의 길을 재밌게, 즐겁게 계속 걸어나가 보려 한다.

“(어렵고 힘든 와중에) 네 것을 올바르게 만드는 내일이 되어라.”

제주에서 행복한 집 / 사진: 박성욱
제주에서 행복한 집 / 사진: 박성욱

동그라미세모네모

이선민은 서울에서 태어나 명지대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정림건축과 솔토지빈에서 실무를 익혔습니다. 2021년 제주도로 이주하면서 동그라미세모네모 건축사사무소를 개소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작업으로는 제주에서 행복한 집, 제주 별장 리모델링이 있으며, 현재 제주대학교 건축학과에 출강 중입니다. https://www.ctsarchitecture.com/

어쩌다 소장의 고군분투기

분량5,858자 / 12분 / 도판 2장

발행일2026년 5월 13일

유형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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