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실재
강림, 겜돌이, 곰, 냥꾼, 닥터페퍼, 쪠, 채운, 천하장사
분량11,390자 / 23분
발행일2026년 10월 26일
유형대담
잡담회는 세 번째 읽을거리로 40호 『등장하는 건축가들 6』을 골랐다. 이 책은 2024년 7월 진행된 포럼 시리즈 ‘등장하는 건축가들: 구분되기와 구분짓기’의 기록으로, 이듬해 2월 발행되었다. 포럼의 내용은 발표를 원고로 정리한 강연록, 에세이, 영상 등 각 건축가에게 맞는 방식으로 담겼다. 잡담회는 (예비) 건축가의 관점에서 여섯 번째 시즌 건축가들의 생각을 유심히 살폈다. 멤버들은 건축가의 조건과 역할, 말과 글, 과정과 용기에 관해 잡담했다.
- 일시: 2026년 5월 25일 월요일 오후 2:30 – 오후 5:00
- 장소: 정림건축문화재단 라운지
- 참석: 강림, 닥터페퍼, 겜돌이, 곰, 쪠, 냥꾼, 천하장사, 채운
차례
- 누가 건축가인가? 나는 건축가인가?
- 두려움과 실재
- 자연과 실천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려운 글쓰기
강림: 저희는 건축에 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고, 건축에 관해서 써야 한다고 늘 말하면서도 정작 저희도 그런 이야기를, 글을 잘 생산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어요.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건축에 관해서 어떤 말을 하는 것, 어떤 글을 쓰는 것이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지, 저희에게 “흑역사를 쓸 용기”가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한번 공유해보면 좋지 않을까요?
겜돌이: 저는 ‘흑역사를 쓸 용기’라는 글이 『미로』 5호의 마지막 글 ‘다시 만난 세계: 글로 잇는 건축’과 이어진다고 생각했어요. 이 글에도 건축에 관한 글을 쓰기 어려운 이유가 나와요. 이 글과 그 글을 이어서 이야기해볼게요.
건축에 대한 글을 쓰기 어려운 이유는, 우선 기본적으로 기존 건축가들이 글을 너무 어렵게 써요. 저는 건축가들이 쓴 글을 읽는 것이 즐거워요.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예를 들어 하이퍼스팬드럴이 기념품을 만들게 된 경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하이퍼스팬드럴의 여러 글을 읽어야만 비로소 웃으면서 ‘이 분 재밌는 것 하시네?’하고 ‘건축적으로’ 이해가 되잖아요? 이해와 웃음에 앞서는 과정이 많이 필요한 거예요. 글이 어렵기도 하지만, 이 과정을 통과하는 것이 우선 어려워요.
그리고 저희가 잡담회에서 지금껏 몇 차례 글을 썼어요. 잡담회 구성원이 썼던 글 중에서도 지적인 글, 특히 아름다운 글이 몇 편 있었다고 생각해요. 강림이 쓰는 글은 항상 그렇고요. 천하장사의 이번 글도 저는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어요. 그런 글들을 읽는 것이 아주 즐겁지만, 한편으로 저는 그런 생각도 들어요. “나는 평생을 살아도 저런 식으로 글을 못 쓰겠다” 싶은 거죠.
강림: 저랑 천하장사가 갑자기 쓸데없이 어렵게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군요?!
겜돌이: 그건 아닌데, (웃음) 분명히 그런 생각이 들긴 해요! 저는 글을 멋있게 써보려고 해도, 결국 저렇게 진지하게는 못 써요. 다른 사람의 글을 읽을수록 글을 쓰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건축가의 글을 읽어 보면, 어떤 개념이나 어떤 일화를 소개할 때, 다른 어려운 책을 인용하는 것을 필수로 여기는 것 같아요. 그런 인용 자체를 즐기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 측면에서 제가 접한 많은 건축 글 중에서는 너무나 어려운 글들이 많았어요. ‘건축에 관해서 글을 쓰려면 이 정도의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나? 그래야만 글을 쓸 자격이 주어지는 건가?’라는 생각을 가끔 해요. 이쯤에서 푸하하하프렌즈의 책 『우리는 언제나 과정 속에 있다』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네요. 물론 이 책 속에도 어려운 정보를 가져와서 풀어낸 글도 있었어요. 그럼에도 저는 그 책이 대중적으로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그 이유에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여러 사람과 공감할 수 있는 쉬운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고, 친근한 언어로 사람들에게 다가갔다는 점을 짚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또 한편으로는 언젠가 강림이 제게 반론했던 말이 생각나요. ‘사람들은 어려운 말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저자가 쉽게 써주는 것이 말이 되느냐? 그것은 대중 기만이다. 사람들의 수준을 낮추어 보고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자신의 우월함을 느끼려는, 일종의 선민의식 아니냐’라고 했었어요. 제게도 또한 그런 생각이 한구석에 있어요. 그러니 의도적으로 너무 쉽게 풀어서 쓰려고 할 필요도 없겠지만, 의도적으로 너무 어렵게 꼬아서 쓰려고 할 필요도 없는 것 같아요.
정리하자면, 건축계에는 어려운 글들이 많아서, 저도 어렵게 써야 할 것만 같아서, 저는 건축에 대한 글을 쓰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저는 우선 쉽게 써보고 싶어요.
곰: 솔직히 말하면, 건축가들은 남의 글을 인용하지 않고는 글을 쓰는 법을 몰라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한편 제 이야기를 해보자면,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가 정리가 안 되기 때문에 글을 잘 쓰지 못하는 것 같아요. 물론 글을 씀으로써 생각이 정리되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생각이 정리되어 있지 않으니 글을 못 쓰겠어요. 항상 글 쓰는 것이 너무 어렵더라고요. 머릿속에서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그러다 보니 저도 남의 이야기를 끌어다 제 생각에 덧붙이는 것을 많이 해요. 그래서 글쓰기가 어려운 것이 아닐까요? 정리되지 않은 말을 하는 것이 어려워서, 싫어서.
강림: 글쓰기뿐만 아니라 건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5년 동안 그 이야기만 하는 학부를 모두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여전히 익숙지 않아 해요. 상대적으로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잘하는 것 같아요. ‘내가 겪었다’ 류의 이야기죠. ‘실무를 하는 도중에 이런 일을 겪었다’는 얘긴 잘해요. 그런데 건축에 관해서 이야기해달라고 부탁받는다면, 그 부탁 자체가 다소 추상적이라 생각하거나, 그것에 관해서는 달리 할 말이 없다고 느끼는 듯해요.
이 책에 수록된 글을 읽어보면, 저희가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과는 다소 다른 점이 있어요. 대체로 건축가가 쓴 책은, 이윤석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아”한 면이 있어요. 완성된 것, 독립적인 것, 결과로서 제시되는 것이에요. 반면 『등장하는 건축가들 6』 속 글들은, 뭐라고 할까요, 딱 봐도 어떤 과정 중에, 도중에 튀어나와버린 글이라는 것이 느껴져요. 어디를 향해서 나아가는 중인 글이지, 어디에 도착해 있는 글은 아니라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었어요. 그러다보니 저희가 가진 통념에 위배되기 때문에 더 읽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을 테고요. 겜돌이가 푸하하하프렌즈를 말했듯, 과정 중에, 도중에 글을 남기는 것은 건축가들이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런 점에서 ‘등장하는 건축가들 6’ ‘등장하는 건축가들’ 시리즈 중에서도 유독 낯설어요.
동시에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분명한 친근함이 있어요. 어떻게 보면 ‘건축가’라는 직업이 가진 이미지가 이제야 조금씩 전환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제가 학부를 다닐 때만 해도 건축가라면 최욱, 조병수, 승효상처럼 뭔가 예술가적 아우라(?)를 가진 분들이 대표적으로 떠올랐는데, 지금은 다양한 건축가들이 떠오르는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지금은 오히려 ‘건축가’라고 했을 때 딱 떠오르는 이미지가 딱히 없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닥터페퍼가 말했듯 이윤석처럼 솔직하고 담백하게, 그러나 커다란 의제에 관해서도 거리낌없이 자신의 삶을 아래 깔고 글을 써나갈 수 있는 건축가도 있어요. ‘아, 저렇게 쓰다 보면 모여서 무엇인가가 되는 거구나!’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글 중 하나가 이윤석의 글이었어요. 그리고 제가 아까 말했듯 사울 킴도 아주 솔직하게 말했어요. 온라인 플랫폼에서 첫 번째 강연을 했는데 흑역사가 됐다, 이런 문장을 거리낌없이 남기는 것이 진정한 ‘흑역사를 쓸 용기’가 아닐까요?
다르게 말해보면, 완성된 사유를 하는, 그것을 말과 글로 전달할 뿐인, 이미 어딘가에 정초해 있는 건축가라는 이미지 자체가 일종의 판타지가 아니었을까요? 결국 주어진 그 이미지로부터 벗어나서, 완전하지 않더라도, 우아하지 못하더라도, 어쩌면 다소 더럽더라도,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쓸 수 있는 용기를 내는 것, 결국 『등장하는 건축가들 6』을 읽으면서 저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용기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어요.
냥꾼: 그 용기를 내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요? 우선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순전히 건축적인 차원’과 ‘건축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사람의 차원’과 ‘그 둘 사이 관계의 차원’, 이 세 가지 차원이 섞인 것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먼저 ‘순전히 건축적인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우리는 건축에 어떤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무의식적으로. 그래서 틀리는 것을 싫어해요. 가령, 어떤 말을 했는데, 그 말이 알고 보니 틀린 것이었다면 너무 부끄럽잖아요? 정답인지 아닌지 모르는 상태에서 어떤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려워요. 사실은 그렇지 않아서, 모든 나름의 이야기가 다 정답이 될 수도 있는 무엇인 것인데, 혹여나 틀릴까 봐 일단은 말을 하지 않아요.
‘건축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사람의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할 이야기가 없어서일 수도 있어요. 곰이 이야기해 준 것처럼 스스로 정리가 안 되어 있다고 느낀다거나, 하고 싶은 이야기 자체가 없는 거예요.
‘그 둘 사이 관계의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저희도 건축을 충분히 친근하게 대하지 못하고 있기에 용기가 나지 않는 것 같아요. 만약 건축이 저희에게 굉장히 친숙하고 가까운 것이라면 ‘정답이든 아니든 그냥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이렇게 친한 친구에게 말하듯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텐데, 지금 건축이라는 것은 저희의 일상으로부터, 생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느껴지고, 저희가 발 디딘 곳으로부터 너무 높이 있는 것처럼 보여요. 이 어색한 관계도 저희가 용기를 내지 못하는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강림: 건축 자체가, 저희가 습득한 지식이나, 쓰고 있고 구사하고 있는 기술 자체가, 가끔은 잘 배운 외국어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요. 도면 속에서 선 맞추기 게임을 하는 것, 르 코르뷔지에가 누구인지 아는 것, 르 코르뷔지에의 알제리 계획안이 무엇인지 아는 것 자체가 어색할 때가 있어요. 다 크고 나서 잘 배운 제2외국어 같은 느낌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정해욱도 자신의 글을 열면서 이 글에서의 건축은 세울 건(建), 쌓을 축(築)이 아니라 아키텍처라고 딱 잘라서 정의하죠. 멀리 있는 것으로, 높이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 대문자 A의 건축이에요. 건축을 배운 사람이 건축으로부터 느끼는 거리감, 그에 뒤따라오는 할 말 없음, 이것들이 여기에서 파생된 것이 아닐까요. 영어로 말해보라고 하면 할 수 있지만, 영어에 관해서 말해보라고 하면 웬만한 사람들은 할 말이 없듯.
실제와 실재, 리얼리티
강림: ‘파빌리온 건축가’라는 단어가 2010년대 초 한국에서 유행했어요. 한편으로는 ‘페이퍼 아키텍트’도 있어요. 요즘에는 ‘인스타그램 건축가’겠죠? 인식론적인 측면에서는 인스타그램과 더불어 핀터레스트나 아크데일리 같은 온라인 매체를 빼놓고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건축가들이, 그리고 사람들이 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이 이러한 여러 웹 기반 매체들의 등장으로 인하여 바뀌었다는 거예요. 오늘날 일부 건축가들이 지닌 위기감도 그 매체들로 인해서, 즉 건축 이미지가 너무나 보편적이고, 지나치게 많다는 까닭에서 유발되기도 해요.
이를테면 아크데일리나 핀터레스트를 통해서 그 어느 때보다 잘 지어진(well-made) 건물들에 관한 정보를 흡수할 수 있는 때에, 좋은 건축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지를 사울 킴은 묻고 있어요. 그리고 정해욱은 요즘 아이들은 액정 화면만 보면 눌러본다는 예시를 들죠. 그 이유는, 상호 작용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가상이나 허구가 아니라 실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에요. 게임 속 장소이더라도 인터페이스가 가능하다면 실재라는 것이죠. 저희에게 실제로 영향을 끼치고, 저희를 바꾸어버리는 무엇이니까요.
채운이 고민했듯, 발전하는 기술들과 통념적인 건축 사이의 괴리가 커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요.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이 저희를 바꾸고, 바뀐 저희는 건축을 다르게 인식하게 된다는 논리로 이 괴리를 좁히려 하고 있는 듯해요. 여러분의 경험도 이 논리와 일치하는지, 아니면 차이가 있는지 묻고 싶어요.
닥터페퍼: 부동산에서 방을 구할 때 보면 엄청난 광각으로 찍어놔서 방이 넓게 보이잖아요? 막상 가보면 조그맣고요. 건축에서도 마찬가지로, 사진으로 봤을 때에는 엄청 멋있는 공간이었는데 그 공간은 그 건물 전체에서 보면 정말 일부이고, 그다지 인상 깊지 않은 나머지 부분들이 대부분인 건물도 있어요. 저는 가끔 이런 상황을 속임수라 여길 때도 있어요. 최소한, 다른 부분도 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희는 지어지는 환경(built environment)에서 이러한 것들, 그러니까 인상 깊지 않지만 대부분인 나머지 부분들을 배제한 채 매체를 사용하고 있기도 해요. 정해욱이 글머리에 건축을 아키텍처로 한정해서 썼듯, 매체에 정보를 담을 때에는 무엇을 선택했고 무엇을 배제했는지를 명시해 주면 독자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가 더 용이해질 거예요.
강림: 그런데 이희준의 글을 빌려 이야기하자면, 부동산에서 편집해 올린 사진이 더 건축적인 의도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그 이미지 자체가 이미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배제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니까요. ‘넓었으면 좋겠다, 소화기는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고, 스프링클러가 없는 실링이 더 좋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이미지가 그 자체로 더 건축적이지 않나요?
닥터페퍼: 저는 그런 이미지에 더불어 명시도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죠. 부동산 매물을 보러 다닐 때의 충격과 괴리는 잊을 수가 없어요. 한강이 보인다고 해서 갔는데 건물들 사이로 손톱만큼 보이지를 않나, 넓어 보여서 갔는데 광각으로 찍은 사진이질 않나…. 의도가 너무 불순한 것 같아요. 속이는 게 목적이잖아요. 건축가도 마찬가지예요. 이미지를 편집한 의도를 명확히 알 수 있게 명시해 주어야 옳은 편집인지 어떤지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봐요. 사람들로 하여금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하면 안 되죠.
강림: 저도 비슷해요. 저는 이미지는 이미지라고 생각해요. 건물보다 더 건축적이지도 않고 덜 건축적이지도 않아요. 이미지가 실재일 뿐만 아니라 건물보다 더 건축적인 실재라고 가정해봐요. 엄청 좁은 방에 살고 있는 사람한테 ‘너는 그래도 상호작용 가능하기에 실재하며 건물보다 더 건축적인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있으니, 너는 실재하는 좋은 집 속에서 살고 있는 거야’라고 말할 수 있나요?
예를 들어 유현준은 “카페가 도시인들의 거실이다”라면서 집이 좁을수록 가까이에 카페가 많은 지역에서 살아야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카페는 사유 공간이 아니잖아요? 어떻게 카페를 실재하는 거실과 동등한 것으로 놓고, 거실이 없으니 카페를 거실로 받아들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거실 비슷한 것과 진짜 거실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소유의 문제가 있고 주체의 문제가 있어요.
마찬가지로, 이미지는 실재해요. 이미지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실재와 같은 지위에 있어요. 그러나 이미지들을 많이 본다고, 가지고 있다고 해서 실재하는 내 집이 더 커지지는 않아요. 실재하는 집의 지위를 그렇게 쉽게 흔들 수는 없어요. 이미지에는 이미지만이 가지는 특성이 있고 집에는 집만이 가지는 특성이 있어요. 그 두 가지를 변증법적인 관계로 바라보는 것, 교환 가능한 것으로 바라보는 것이 문제예요. 이를테면 ‘이미지가 집을 대체하고 있다, 카페가 거실을 대체하고 있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가능하지 않아요. ‘오늘날에는 실재하지 않은 것 = 이미지들이 증폭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받아들일 수 없지만(이미지는 실재하니까), ‘실재하는 A(= 이미지)가 늘어나면서 기존에 실재하던 B(= 집)를 밀어내고 있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받아들일 수 없어요.
천하장사: ‘실제’와 ‘실재’가 있어요. 먼저 ‘실재’의 측면에서, 이미지는 실재하는 것이 맞아요. 제가 관계하는 순간, 그것과 소통하는 순간 그것은 실재하는 것일 수밖에 없어요. 다만 그렇게 실재하는 두 가지, 즉 건물과 이미지가 ‘동등한 실제적 가치를 가지고 있느냐?’를 물어야 해요.
강림: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천하장사: 제 경험을 하나 말씀드리자면, 제가 아주 좋아하는 건축가가 있었어요. 외부인으로서 보았을 때, 그리고 유튜브 등의 영상에서 보았을 때, 그 사람이 이야기하는 내러티브도 무척 좋았고 작업도 너무나 좋아 보였어요. 그런데 얼마 전 기회가 되어 실제로 그분이 설계한 건물에 가보았어요. 그 건물의 공간 속에 제 몸이 들어가는 순간 보이는 것들이 달라졌어요. 저렇게 턱이 높아도 될까? 저렇게 실링을 마감해도 괜찮을까? 목재가 저렇게 외부로 나와 있어도 될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어요. 이미지, 화면으로 보았을 때에는 들지 않았던 생각들이에요. 따라서 이미지도 실재하고 건물도 실재하지만, 둘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수는 없어요.
곰: 전시에서도 VR과 같은 기술을 활용해요. 한국에서 가우디에 관한 전시가 열렸을 때에도 먼 곳의 현장에 카메라를 설치해서 3D로, 360도로 VR 체험을 할 수 있게 했어요. 그렇게 보면 실제로 보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고 믿는데, 사실 직접 가서 보고 느낀 것과 굉장히 달라요. 그건 가보면 알아요. 따라서 저는 건물 외적인 매체와 건물이 동등한 위치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해서 건축 사진을 비롯한 건축 이미지가 건물보다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떨어뜨려서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각각의 매체가 가진 고유한 성격이 있어요.
다만, ‘건물 외적인 매체 때문에 결국 실재하는 건축이 점점 밀려나고 있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위기감이라는 측면에서 공감해요. 10년 전쯤부터 건축이 건물 외적인 매체를 통해 소비되는 성향이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어요.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요. 건축이 이미지로서 소비되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들어요. 이미지를 보고 갔다가 실망했던 건물도 많았고 한편으로는 이미지만 봤을 때는 별 기대가 없었는데 막상 가보니 ‘너무 괜찮네?’ 싶은 건물도 있었어요. 그래서 이 건물이 좋은가, 좋지 않은가를 따질 때는 실제 건물을 경험하는 것 이상의 방법이 없다는 것을 매번 느껴요.
건축이 소비되는 양상에 대한 위기의식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매체가 갖는 문제를 강조해서 해소될 일은 아닌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해서 건물로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도 솔직히 모르겠어요. 건물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영향력이나 파급력 측면에서는 이미 매체에 밀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천하장사: 곰의 말을 들으면서 생각이 났어요. 저는 건물과 공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한, 어떤 매체를 활용하든 건축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저희는 선택을 내려야 해요. 무엇이 담론에서 더 우선시되어야 하는지, 어떤 이야기를 우리가 더 중요하게 들어야 할지를요. 『미로』 5호에 실린 박세진의 글에도 나오는 이야기인데, 저는 ‘이것이 건축의 매체적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가?’를 우선시해서 판단해야 한다고 봐요. 건축적 매체로서 건물이 가지는 매체적 특성은 막대한 물리적 형상을 가진다는 거예요. 그 막대한 물리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우선해야 하지 않을까요? 가상의 공간 위에 도형을 그린 후, 그 도형이 나타내는 건축과 공간을 이야기하는 것도 건축이겠지만, 그것이 실질적으로 지어진 것에 대한 이야기보다 앞설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겜돌이: 정해욱의 글이 너무나 흥미로웠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근본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웠던 부분은 리얼리티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내러티브나 추상적인 설득의 과정, 상호작용이 있을 때 더 많은 리얼리티가 가상적인 어떤 것에 깃들고, 심지어는 그것이 실재하는 무엇을 리얼리티의 차원에서 뛰어넘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공감하기 어려웠어요. 뛰어넘을 수 있다고 보지는 않고, ‘동등하게 여겨질 수 있다’까지는 제가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언리얼 엔진으로 만든 요즘의 게임들은 시각적으로만 봤을 때는 실제로 저희가 보는 환경에 가까워요. 심지어는 일부러 실제 환경보다 더 아름답게 묘사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 게임의 목표가 과연 실제 환경을 그대로 구현하는 것에 있을까요? 물론 게임 속 상호작용들이 실재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눈밭을 걸어 다니면 발자국이 남기도 하고요. 현실보다 더 현실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죠. 어떤 게임에서는 길거리에 놓여 있는 항아리나 상자를 부수어 돈과 아이템을 얻어요. 저는 그 게임 속에서 온 도시를 돌아다니며 상자를 부숴요. 그 순간 그 도시에 있는 그 박스는 제게는 실재하는 것이죠. 리얼리티가 부여된 거예요. 그런데 제가 지금 종로를 돌아다니면서 온갖 상자를 부수고 다니지는 않잖아요? 그렇다면 현실 속 상자는 게임 속 상자보다 리얼리티가 적게 부여되어 있겠죠. 저와 상호작용을 하지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리얼리티가 적게 부여된 현실 속 상자보다 리얼리티가 부여된 게임 속 상자가 제게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일까요? 저와 더 높은 관계를 맺으며, 더 순수하게 존재하는 것일까요? 그런 생각은 위험해 보여요.
강림: 위계가 동등하다는 것과 교환 가능하다는 것, 대체 가능하다는 것은 다른 개념이라고 생각해요. ‘A와 B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과 ‘A를 B로 바꿀 수 있다’는 다른 문제예요. 겜돌이가 말한 것처럼 게임 속 모든 것도 실재죠. 상호작용의 차원을 제외해도, 데이터가 존재하고 그 데이터는 어딘가 하드웨어 속에 보관되어 있어요. 화면이 그 데이터를 원거리에서 출력할 뿐이죠. 도면도, 영상도, 렌더링도 실재예요. ‘~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는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다지 파격적인 일도 아니에요. 어떤 게임을 하고 굉장히 큰 감동을 받아서 누군가의 삶이 바뀔 수도 있잖아요? ‘스펙 옵스’를 하고 반전주의자가 된 사람도 있잖아요?
그런데 게임 속에서 체험할 수 있는 감동적인 사건들이 늘어나서 현실 속의 감동적인 사건들이 줄어들고 있을까요? 게임이 늘어나면서 상상력이 줄어들까요? 마찬가지로, 건물에는 건물의 매체 특정성이 있잖아요? 도면에는 도면의 매체 특정성이, 렌더링에는 렌더링의 매체 특정성이, 투시도에는 투시도의 매체 특정성이 있겠죠. 각각의 매체들은 자기만의 고유한 성질을 가지고 있고, 그렇다면 건물도 건물만의 고유한 성질이 있을 거예요. 예를 들어, 건물은 중력을 견디고 있어요. 눈과 비를 맞아요. 저 혼자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다른 매체 때문에 건물 지을 일이 없어진다, 대체된다? 그럴 일은 없어요. 건물의 매체 특정성을 다른 건축적 매체들은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요.
기술 발전 속도나 건축 매체의 다양성 부족을 문제 삼아서 건물 외적인 매체에 권위를 부여하려는 경향이 생기는 것은 충분히 수긍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건물의 매체 특정성이 생략될 수 있다거나, 짓는 것이 덜 중요해지고 있다거나, 저희의 세계 경험 방식이 바뀌고 있다는 등, 저희 세대가 어떤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는 생각에는,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계속-
잡담회
잡담회는 건축의 이름 아래에서 생산되는 텍스트들을 성의 있게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 후,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를 텍스트로 재생산하는 독서모임이다. 아홉 명의 정규 구성원이 함께하고 있으며, 한 달에 한 번 정도, 한 권의 건축책을 읽고 와서 두 시간 반 동안 이야기를 나눈다. (비건축적인 의미로) 늘 매너리즘에 허덕이고 있기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주실 손님을 환대한다. 잡담회 아카이브: 블로그 / 인스타그램
두려움과 실재
분량11,390자 / 23분
발행일2026년 10월 26일
유형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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